눈물로 보낸 며칠이 훌쩍 지나가고 벌써 8월이 되어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불안한 마음은 여전히 가시지 않네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서 편지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듯했는데, 또 눈물이 나서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고 있어요.
몸 괜찮다는 말 믿었는데…감독님을 처음 만난 때가 2016년 9월이니, 채 1년도 되지 않아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회의가 끝나고 회식 때 막걸리를 자주 드신 감독님이 그러셨지요. “술을 너무 빨리 마셔서 소주는 안 먹어. 막걸리는 배가 불러서 많이 못 먹잖아.” 소주를 마셨던 저는 감독님과 막걸리 잔을 부딪치지 못했어요. 세월호 선체기록단으로 합류하기 위해 목포신항에 갈 때마다 감독님이 제게 물으셨잖아요. “먹고 싶은 거 없어?” 눈치 없이 “회요!”라고 외치면 항상 감독님은 차를 끌고 나가 열심히 흥정하고는 회를 사주셨어요. 언젠가 한번은 잘 드시지 않는 모습에 왜 안 드시냐고 묻자, “회는 찬 음식이잖아. 나한테 안 맞더라고” 하는 말씀에 정말 죄송했어요.
아침 식사로 누룽지를 먹자며 얼른 오라던 손짓이 자꾸 생각나요. 감독님이 주신 세월호 목걸이와 팔찌가 감독님의 선한 눈을 생각나게 해요. 목포역에 내린 저를 데리러 오셨을 때, 오후 4시16분 알람이 감독님 휴대전화와 제 휴대전화에서 동시에 울리니까 감독님이 살짝 미소를 지으신 것도 생생해요. 제가 촬영하고 있을 때 뒤로 슥 와 보시고는 어깨를 토닥여주신 것도, 다큐인 사무실에 놀러 갈 때마다 손수 내린 커피를 주신 것도, 막걸리를 사주신 것도 계속 생각이 나겠죠? 자꾸 다음 회의 때 감독님이 제일 먼저 도착해서 앉아 계실 것만 같고, 지각비를 걷을 것 같고, 안건지를 나눠주실 것 같아요.
7월2일 마지막으로 연락할 때, 감독님이 “몸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하신 말을 철석같이 믿은 제가 너무 미웠어요. 7월25일 감독님을 보러 갔지만 결국 보지 못했을 때는 창문을 바라보며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울음소리가 들릴까봐, 주저앉아 조용히 울면서 터져나오는 눈물에 부탁했어요. 제발, 제발 감독님을 살려달라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기도와 눈물이 하늘에 닿지 않았나봐요.
감독님이 떠나시던 그날 아침, 다시 잠들었다가 꿈을 꾸었어요. 현관문 앞으로 구급차가 휑 지나가더니 아버지가 들어와 카메라 가방을 주시면서 말하셨어요. “어떤 남자분이 너 주라던데?” 그리고 잠에서 깨니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똑같은 풍경이 있었어요. 엉엉 울며 감독님 이름을 목 놓아 불렀어요. 이 꿈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오후 4시가 넘었을 때, 감독님이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날 그렇게 정신없이 밤을 새우고 30분 쪽잠을 잤는데 꿈에서 감독님이 그러셨잖아요. “잘 받았어, 카메라?” 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저 잘할게요, 감독님!” 그리고 몇 시간 뒤 송윤혁 감독님께 이야기를 전해들었어요. 감독님이 “지수 잘하겠지? 잘할 거야”라고 하셨다고요. 저한테 직접 말해주시지, 이렇게 전해듣게 하는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럼 제가 대답도 해드렸을 텐데. 늦게나마 한 대답이 적당한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머물던 자리 지키겠습니다미디어위원회 MT를 가자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요. 뭐가 그리 바빴는지, 항상 MT는 뒤로 밀려서 결국 가지 못했네요. 세월호 3주기 프로젝트 이름을 정하자고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밤을 새울 때, 감독님이 해주셨던 닭볶음탕이랑 갈치조림도 잊히지 않고, 이젠 막걸리를 잘 마실 수 있는데 감독님이 계시지 않네요.
책임감이 강하고 멋진 감독님은 원칙을 중시하셨지만, 그 전에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셨어요. 나이 어리든,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감독님은 무시하지 않고 대해주는 착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다큐인 사무실에 잠깐 일이 있어 갔다가 감독님하고 둘이 술 먹었던 날 기억하세요?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이야기하다가 말씀해주셨잖아요. “다큐의 목적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 마음, 이 마음이라고 생각해.” 다큐멘터리를 어떤 수단으로 쓰지 않고 가슴의 말들을 담았던 사람, 아픔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사람, 몸으로 싸우지 않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쥐었던 사람, 참지 못할 땐 소리 한번쯤 지를 줄 알았던 사람, 말뿐인 위로보다 곁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위로임을 알았던 사람, 함께 가는 이 길 위에서 누구보다 묵묵히 걸었던 사람. 감독님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저를 포함한 감독님이 아꼈던 수많은 후배들은 그 모습을 닮아가려 해요. 이젠 감독님 혼자 속앓이하지 마시고 하늘나라에선 속병 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보고 싶다고 하셨던 세월호 아이들과 김관홍 잠수사님을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감독님의 장례를 홍보하고 추모하기 위한 웹자보와 영상을 만들면서 참 많은 사진을 보았어요. 활짝 웃는 사진, 누군가에게 항의하듯 화내는 사진, 묵묵히 촬영하는 사진. 아픔을 품은 이들의 옆을 지킨 감독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imf> 등 감독님이 울고 웃으며 작업했던 영화들이야말로 어두운 곳을 조명하고 이들이 세상에 직면할 용기를 주었지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애정을 표한 감독님의 마음이 담겨 있어 더욱 소중한 작품들이 아닐 수 없어요. 아직도 변하지 않는 한국 사회가 참으로 마음 아프지만, 감독님 뒤를 이어 그들 옆을 지키는 우리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감독님이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며 고맙다고 하셨잖아요. 저에게 감독님은 좋은 어른이에요. 아빠처럼 챙겨주시고 다독여주신 지난날들이 자꾸만 생각나네요. 회식 때 장난 삼아 “박 아빠, 박 아빠” 불렀던 건 진심으로 감독님이 우리 아빠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이제 너무 슬퍼하지 않으려고 해요. 너무나도 감독님을 보고 싶고 안고 싶지만 우리가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하니까요. 감독님, 계속 많이 보고 싶겠지만 감독님이 하려던 것들 이어받아서 열심히 할게요.
더 살 만한 세상 위해
이제 아름다운 시간들이 추억으로 남겠지만, 머물렀던 그때를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갈게요. 감독님이 마음 두던 곳에 이제 우리가 있을게요. 처음 감독님이 제 손을 잡아주셨던 것처럼, 저도 어른이 되면 후배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될게요.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 감독님께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할게요. 박 아빠, 이젠 그곳에서 더 따뜻하고 행복하게 계세요. 나중에 만나면 그땐 꼭 안아줄게요.
오지수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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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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