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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증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취재 위해 북한에 간 이토 다카시…

‘피해 증언’ 곽금녀 할머니 등 14명 모두 세상 떠나
등록 2017-06-22 14:29 수정 2020-05-03 04:2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금녀 할머니의 가족들이 4월11일 함경남도 단천에 마련된 할머니 묘소 앞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다. 곽 할머니의 아들 김영도씨(가운데 허리 굽힌 인물)가 할머니에게 술잔을 올리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금녀 할머니의 가족들이 4월11일 함경남도 단천에 마련된 할머니 묘소 앞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다. 곽 할머니의 아들 김영도씨(가운데 허리 굽힌 인물)가 할머니에게 술잔을 올리고 있다.

지난 4월10일 아침 8시, 사륜구동차를 타고 평양 시내 호텔을 출발해 북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휴식하고 목적지인 함경남도 단천에 도착하니 저녁 7시였다. 도로 사정이 나빴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북한 당국과 수차례 교섭한 결과 취재 허가가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이하 ‘피해 여성’)를 취재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10월 한국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충격적인 피해 경험을 듣고 나서다. 1991년 8월 김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으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됐다. 이후 한국의 피해 여성 26명을 차례로 만났다.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의 피해 여성을 만나기 위해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북한 등을 수차례 방문했다.

북한에서 만난 피해 여성은 모두 14명이었다. 그중 한 분인 곽금녀 할머니(1924년 1월8일 출생)를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5월이었다. 이후 다섯 번 더 만나 그의 피해 증언을 들었다.

“나의 고향은 충청남도 천안입니다. 내가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지주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16살 때 전라남도 광주의 제사공장에 일하러 갔습니다. 배가 고파서 누에고치의 번데기를 먹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1년 정도 일했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불러 갔더니 형사 같은 일본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형사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나중에 열차를 탔을 때 권총을 찬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빵과 엿을 만드는 식품공장에서 일하면 배를 채울 수 있으니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

기차로 서울까지 가서 여관에 묵었습니다. 다음날 형사는 ‘무단장(牡丹江·중국 헤이룽장성의 지명으로, 예전 관동군 기지가 있어 많은 일본 기업이 진출해 있었다)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안 갑니다’라고 항의했지만, ‘조선은 식민지이니까 어차피 너희는 죽은 목숨이다’라고 말하면서 억지로 열차에 태웠습니다. 무단장에서 덮개가 달린 군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은 만주와 소련의 국경지대인 무링(穆稜)이었습니다.

우리는 헌병대가 주둔한 3층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나온 밥도 먹지 않고 모두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방에 있을 때 헌병 장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차고 온 칼을 벽에 세워두고 옷을 벗고 나를 덮쳤습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였기 때문에 일본군이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방에서도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루 20~30명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원수를 쳐부수겠다는 굳은 다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 4월 곽금녀 할머니에 대한 영화 제작을 계획했다.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단천에서 살던 곽 할머니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것은, 북한에 생존한 피해 여성 가운데 가장 기억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을 출발하기 전날 북한의 관계 기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 입국자에 대해서도 사스의 예방 격리를 시작했다”라는 안내였다. 2002년 11월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증후군)는 순식간에 감염이 확대됐다. 치사율은 약 15%로, 북한에서 774명이 사망했다. 내가 취재를 위해 평양으로 향하던 때는 감염자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촬영을 수개월 뒤로 연기하는 문제를 순간 고려했다. 하지만 곽 할머니의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고 들었다. ‘지금 만나지 않으면 일생 후회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격리를 각오하고 출발했다. 주변과 완전히 떨어진 평안남도 안주시의 한 호텔에서 10일간 격리 생활을 했다. 격리를 끝낸 마지막 밤, 곽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열차에 올랐다.

곽금녀 할머니의 묘지로 향했다
199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공청회’에서 얼굴을 마주한 남북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가운데 허리를 굽히고 울음을 터뜨리는 이가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힌 김학순 할머니다.

199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공청회’에서 얼굴을 마주한 남북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가운데 허리를 굽히고 울음을 터뜨리는 이가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힌 김학순 할머니다.

병원에 입원한 곽 할머니는 병상에서 일어나 반가운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건강한 듯 보였지만 방광암이 상당히 진행돼 있었다. 그는 3년 뒤 2007년 6월7일 사망했다.

곽금녀 할머니의 묘소를 참배하고 싶었기에 몇 해 전부터 북한의 관계 기관에 여러 차례 취재를 신청했다. 그것이 올해 겨우 허가가 나왔다. 4월11일 아침 단천 시내의 숙박소를 나와 묘지로 향했다.

곽 할머니의 가족은 청명에 하려던 참배를 내 방문에 맞추었다고 했다. 차에서 내리자 장남 김영도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마을을 지나자 경사면에 밭이 나왔다. 그 가운데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멀리 몇 명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묘지가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자 2003년에 만났던 가족들의 그리운 얼굴이 다가왔다.

곽 할머니의 묘지는 참으로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해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고향인 충청남도 쪽을 향해 묘지가 있었다. 김영도씨가 주관하는 제사가 진행됐다. 곽 할머니의 부드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가족들의 순서가 진행된 뒤 마지막으로 참배를 했다. 곽 할머니가 좋아해 나에게도 들려준 적 있던 노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흐르는 듯했다.

필자가 북한에서 성노예 피해자를 취재한 것은 1992년이다. 피해 여성을 인터뷰할 때 통역해준 사람들 가운데 김춘미씨가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는 현재 ‘조선 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연행 피해자 문제 대책위원회’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당시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는데, 정확하게 통역해주던 언어와 표정에는 분노와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성노예 피해자를 만나 증언을 들을 때마다 같은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경악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한 정조 관념으로 살아왔던 할머니들이 수년간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면 인간으로서의 생활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는 해방됐지만, 사랑하고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낳는 인간적인 바람을 일제는 말살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의연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집니다.”

북한에서 가장 먼저 성노예 피해 여성임을 밝힌 리경생 할머니(1917년 6월29일생)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잠을 자면 옛날 일이 생각납니다. 피해 사실을 다 말하고 마음이 편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며칠을 고민하다가 방송사에 연락했습니다.”

“증언할 상태인 사람 아무도 없다”

리경생 할머니의 용기에 힘을 얻어 북한 피해 여성 219명이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이름과 얼굴을 모두 드러낸 피해 여성은 46명이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 여성은 239명(2017년 1월 현재)으로 거의 같은 수치다. 북한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다. 인구 대비로 따져보면, 북한에서 이름을 밝힌 사람이 한국의 약 2배에 이른다. 북한 피해자들이 좀더 자유롭게 경험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사회적 상황이 있다. 김춘미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인민은 피해자 여성들을 일제가 우리 문족에게 행한 반인민 범죄의 고발자로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수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투사로 생각합니다.”

북한 피해 여성 46명이 끌려간 장소를 분석해보면, 만주를 포함한 중국이 27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다음은 조선 국내가 5명, 중국과 싱가포르, 양쪽으로 끌려간 사람이 3명 등이다.

이번 취재를 통해 나는 아직 만나지 못한 다른 피해 여성과 접촉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더 이상 체험을 증언할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 비해 북한 피해 여성들의 수명은 분명히 짧았다. 김춘미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민 생활에 큰 난관이 찾아온 것은 1990년대(1990년대 중반 닥친 북한의 식량난인 ‘고난의 행군’ 시절을 말하는 듯함 -편집자)였습니다. 잇따른 자연재해와 미국 등의 경제제재는 피해자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부는 이때에도 피해 여성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했지만 생존자는 크게 줄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껏 북한 피해 여성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필자가 강력하게 반대했던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과 2015년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의 12·28 합의는 북한 피해 여성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북한처럼 일본과 국교가 없는 대만의 경우 희망자는 ‘아시아여성기금’에서 보상금(보상금 200만엔+의료지원금 300만엔)이 지급됐다. 일본 정부는 일본과 북한이 적대시한다는 이유로 북한 피해 여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김춘미씨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범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획책할 것이 아니라, 책임을 인정하고 생존 피해자는 물론 유족에게 철저히 사죄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또한 이 범죄와 관련된 자료와 문서를 전면 공개하고, 역사 왜곡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자국의 사회와 차세대에 대해 올바른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분노도 표출 못한 채

지난 10년 동안 한국과 북한의 민간 교류는 크게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남북의 피해 여성들이 한데 모이는 교류 기회가 있었다. 199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공청회’에서 증언한 북한의 김영실 할머니는 같은 위안소에 있던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와 만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2002년 4월과 2005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전후 보상 국제회의에서도 남북 피해 여성들이 만났다.

이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북한 피해 여성은 한 명도 생존해 있지 않다. 한을 풀기는커녕 일본 정부에 분노도 표출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북한 할머니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말을 전하고 싶다.

단천(함경남도)=글·사진 이토 다카시 일본 독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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