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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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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대의 서글픈 ‘문화 융성’

구속영장 통해 살펴본 ‘블랙리스트’ 잔혹사
등록 2017-04-11 11:30 수정 2020-05-02 19:28

“‘문화 융성’ 시대를 국민 여러분과 함께 열어가겠습니다.” 2013년 2월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제18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문화’는 당시 취임사에서 ‘경제, 창조, 행복’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됐다. 4년1개월 뒤 박 전 대통령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범죄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과 이 함께 입수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을 보면, 문화계 범죄 관련 내용이 전체 91쪽 가운데 총 26쪽에 달한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에게서 받은 뇌물 혐의 관련 내용(60쪽) 다음으로 많다.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와 이를 이어받은 검찰의 수사 결과는 한마디로 ‘문화 융성은 없었다’고 요약된다. 검찰은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문화적 권리’와 문화기본법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구속영장에 적시했다. 박근혜 시대의 문화행정은 문화적 가치 체계 파괴였고, 정치적 처지에 따라 국민의 일부를 ‘블랙리스트’라는 수단을 통해 비국민으로 배제했다. 그 모든 포괄적 범법 혐의의 정점에는 ‘피의자 박근혜’가 있다. 박영수 특검팀 등이 밝혀낸 블랙리스트에는 무려 3천여 개 단체와 8천여 명의 개인이 포함돼 있다.
김기춘 “종북세력이 문화계 15년 장악”
검찰에 따르면, 최순실은 평소 “진보 성향의 인물을 기피하였고, 현 정권과 코드가 맞는 성향이 인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으며, CJ그룹 등에서 제작되는 콘텐츠들이 좌파적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런 생각은 이후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통해 정부 정책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은 임명된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2013년 8월21일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간 장악했다. CJ와 현대백화점 등 재벌들도 줄을 서고 있다. 사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당시 박 전 대통령이 강조한 ‘비정상의 정상화’의 핵심 과제였다. 이후 조원동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은 CJ에 압력을 가해, 이미경 부회장은 머잖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 전 실장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은 단체들을 ‘좌파’로 낙인찍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2013년 12월20일 대통령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반정부·반국가적 성향 단체들이 좌파들의 온상이 되어 종북세력을 지원하고 있다. 현 정부가 지원하는 실태를 전수조사하고 그에 대한 조치를 마련하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계 전반에 대한 ‘좌파 지원 실태 조사’에 나선다. 결국 김 전 실장 자신을 나락에 떨어뜨리고 마는 블랙리스트 사태의 시작이었다.
김 전 실장은 2014년 1월4일 “중간 과정까지 보고하라”며 반복적으로 대통령의 ‘국가 개조 의지’를 설파했다. 이를 위해선 ‘좌파 척결’에 이은 ‘우파 보강’이 필요했다. 김 전 실장은 2014년 4월께부터는 “좌파에 대한 지원은 너무 많은데 우파에 대한 지원은 없다” “좌파는 잘 먹고 사는데 우파는 배고프다”며 우파 지원책을 찾도록 한다. 이 지시를 받은 청와대 비서관들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배고픈 우파’ 지원책 마련에 나섰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 융성이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들을 좌파로 규정해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지원을 ‘위법’적으로 뺏고, 이를 배고픈 우파에게 ‘탈법’적으로 나눠주는 악순환이었다.
‘식물정권’의 사상·문화 지배 시도
왜 이런 무모한 일이 기획, 실행된 것일까. 그 답은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직후 깊은 바닷속에서 떠오른 세월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블랙리스트 작성이 집중된 시기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 의원은 블랙리스트 사태의 본질에 대해 “세월호 사건 이후 시민들로부터 사실상 ‘식물정권’ 판정을 받은 박근혜 정권이 더 이상 물리적으로 질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사상과 문화를 장악해 지배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라는 진단을 내놨다. 박근혜와 김기춘의 대한민국에선 반문화로 문화를 잠식하는 전근대적 회귀가 허울 좋은 ‘애국주의’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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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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