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미국의 유명 만화 사이트 ‘도그하우스 다이어리’(thedoghousediaries)에서 공개한 세계지도가 화제가 됐다. 세계은행과 기네스북 데이터 등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국가별 선도 분야’(What each country leads the world in) 지도다. 지도에는 국가명 대신 그 나라가 세계에서 앞서고 있는 분야가 표시됐다.
일본은 로봇 생산, 중국은 탄소 배출과 재생에너지 분야 선도 국가(CO₂ Emissions and Renewable energy)로 표시됐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을까. 지도에서 한국은 ‘워커홀릭’(Workaholics·일중독자들)이라고 표시됐다. 세계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가 없는 분야가 ‘장시간 노동’이라는 것이다.
직업을 가리지 않는 ‘과로사’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2015년 기준 2113시간으로 OECD 회원국 평균 1766시간보다 347시간 많다. 한국의 노동자는 1년 동안 독일 노동자보다 4.2개월, 미국 노동자보다 1.8개월 더 일한다. 독일 노동자가 16.2개월에 하는 노동량을 한국 노동자는 12개월에 몰아서 한다는 얘기다. 노동자들이 주 7일을 휴일인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월화수목, 금금금’이라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노동자에게는 명절이든, 대체 휴일이든, 공휴일이든 가리지 않고 일터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 정부가 OECD에 보고한 통계를 살펴보면, 2000년엔 무려 2512시간에 달했다. 2512시간은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1일 평균 6.9시간을 일해야 나오는 시간이다. 통계상으로는 2000년 2512시간을 정점으로 2010년대 들어 2100시간대로 떨어졌지만 노동자가 체감하는 노동시간은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해 월 1회 금요일 조기퇴근제도를 만든다고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가 “정시 퇴근과 연차도 못 쓰는데”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한 정책을 들여다보면, 연장근로 시간을 줄이는 것에 불과해 실질적 노동시간 단축이라고 할 수도 없다.
최근 잇따르는 ‘과로사’ 관련 보도는 노동자들의 과로(過勞)가 떠받치고 있는 한국 사회가 한계상황에 다다랐다는 경고다. 얼마 전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지 7일밖에 안 된 보건복지부 공무원이 일요일 오후 청사에 출근했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복직 후 7일 내내 야근했고, 숨진 날 역시 일요일이었지만 출근한 상태였다. 지난 1년 동안 숨진 집배원 9명 중 7명이 과로사 의심을 받고 있다.
과로사는 직역을 가리지 않는다. 높은 연봉을 받는 대형 로펌 변호사도 ‘죽도록 일하다 죽는다.’ 최근 1~2년 사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로펌에서 30대 젊은 변호사가 돌연사한 것도 업계에선 ‘과로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 2월20일 “대형 로펌의 고용 변호사들은 보통 평일에는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다시 아침 9~10시에 출근하는 것이 일상화됐고 주말에도 근무해야만 겨우 맡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례가 많다”며 “최근 대형 로펌의 몇몇 고용 변호사의 과로사 이유가 사실은 비인간적 근무 환경 때문”이라며 개선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과로로 인한 자살’도 과로사로 인정하는 일본과로사는 사회적 과제다. 단지 과로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통계로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산재보상 시스템을 보면, ‘과로질환’으로 볼 수 있는 뇌·심혈관계질환(뇌심질환)으로 산업재해 처리를 받은 사람이 연간 63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약 46%가 사망한다. 뇌심질환은 업무 관련 질병 중 근골, 진폐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뇌심질환 산재 승인율이 15%밖에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과로로 인한 뇌심질환을 앓는 사람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노동시간 규제를 받지 않는 취업자의 규모가 전체 취업자의 70%에 이르기 때문에, 사실상 대부분의 노동자가 과로에 노출돼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과로로 인한 자살도 문제다. 특히 한국의 산재 처리 과정에서 과로로 인한 자살은 산재로 인정받기 매우 어렵다.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다. 자살은 한국 국민의 사망 원인 4위이기도 하다. 자살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지만, 한국의 노동 현실을 바탕으로 추정해보건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 통계에 따르면 2015년에만 일본에서 2천여 명이 과로사 등 근무 스트레스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과로로 인한 자살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는 등 과로사와 관련해 일본은 한국보다 한발 앞서 있다. 2014년에는 ‘과로사 등 방지대책 추진법’이 제정됐다. 2010년에 ‘전국과로사가족회’가 결성됐고, 2011년 11월에 ‘과로사방지기본법 제정 실행위원회’가 결성됐다. 2013년 5월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가 일본 정부에 과로사를 방지하라고 권고하자, 2014년 6월 중의원과 참의원 만장일치로 과로사방지법을 통과시켰다. 과로사방지법에 따라 지난해 10월 정부 차원에서 사상 처음 ‘과로사 조사 보고서’가 발표됐다. 이 보고서를 통해 월간 100시간 이상 초과근무를 시키는 기업이 전체의 12%에 이르고 월간 80시간 이상 시간외 근무를 요구하는 기업은 23%나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의 과로사방지법은 과로사를 “업무에서의 과중한 부하에 의한 뇌혈관질환 혹은 심장질환을 원인으로 하는 사망 혹은 업무에서의 강한 심리적 부하에 의한 정신장애를 원인으로 하는 자살에 의한 사망”으로 규정해, 과로로 인한 질병이나 정신장애, 자살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한국도 과로사방지법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모두 ‘성실’하고 ‘근면’하다. 법정 노동시간 8시간과 무관하게 야근을 밥 먹듯 하고 휴일을 반납해서라도 일을 완수해야 하는 ‘책임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이 ‘일중독자의 나라’인 것은 어찌 보면 우리 국민에게 명예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부와 사회, 기업에는 불명예다. 국민들이 성실하고, 근면하고, 책임감 있게 노동한 대가가 과로사일 수는 없다. 이들을 과로로 죽게 내버려두고(과로로 인한 질병과 자살을 포함한다),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부와 사회가 막아야 하는 일이다.
‘과로사 예방센터’ 설립한다일과 건강,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등에 소속된 의사·노무사·변호사들은 2015년부터 지속적인 내부 세미나를 진행했다. 과로사 방지를 현실화하기 위한 사회적 의제를 형성하는 작업으로 ‘과로사 예방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적극적인 지지를 바란다.
정병욱 법무법인 송경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부위원장)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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