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8일, 한국 사회는 ‘관행’이라는 이름의 익숙함과 결별을 고해야 할지 모른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이하 청탁금지법)이 전격 시행되는 까닭이다.
청탁금지법은 시행령에서 ‘원활한 직무수행이나 사교, 의례 목적을 띤 경우에 한해’ 식사 대접과 선물, 경조사비 허용 상한액을 각각 3만원, 5만원, 10만원으로 못박았다. 그러나 직무와 연관된 부정청탁 목적의 식사, 선물, 경조사비 제공은 ‘3만·5만·10만원 조항’에 상관없이 처벌 대상이 된다. 지연, 혈연, 학연에 인정이라는 관행으로 포장된 ‘끈적한’ 한국식 청탁·접대 문화의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자는 공무원, 공공기관 임직원, 언론인,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국공립·사립학교 임직원 등 400만 명에 이른다. 이들과 어울리며 생활하는 일반 시민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한국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거대한 정치적·문화적 실험이 시작되는 셈이다.
경기침체론, 위헌론 등 각종 우려를 쏟아내던 해당 기관들은 앞다퉈 청탁금지법에 대해 교육하며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익히고 있다. 그 이면에서 ‘시범 케이스’가 돼선 안 된다는 불안감도 읽힌다.
그러나 여전히 청탁금지법에 대해 ‘잘 모르겠다’, ‘헷갈린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은 국민권익위원회가 9월 초 펴낸 ‘Q&A 사례집’을 중심으로 다수의 시민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청탁금지법 관련 사례 10개를 추려 정리했다. 더 많은 사례는 국민권익위원회 홈페이지(http://www.acrc.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OK] 이럴 땐 신고하세요유치원 학부모 황진이씨는 유치원 운전기사 서경덕씨에게 “수고가 많으시다”며 선물로 들어온 시가 5만원이 넘는 홍삼팩 1상자를 선물했다.유치원 운전기사 서씨는 유치원 직원이다.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인 공직자 등에 해당한다. 학부모 황씨는 공직자에게 5만원이 넘는 선물을 줬기 때문에 선물 가액의 2배 이상, 5배 이하의 과태료 부가 대상이 된다.
한 중학교의 학부모 30명은 스승의 날을 맞아 2만원씩 갹출해 60만원 상당의 선물을 담임교사 홍두깨씨에게 줬다. 위법행위인가?그렇다. 교사 홍씨가 받은 60만원 상당의 선물은 한도 5만원을 초과한다. 학생을 지도하고 평가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로서 직무와 관련해 선물을 받았다는 점도 피할 수 없다. 학부모들은 개인별로 선물 가액 한도 내인 1인당 2만원씩을 냈지만, 법은 학부모들이 함께 위법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한다. 학부모 각자는 홍 교사에게 준 선물 금액 60만원의 2~5배 과태료 대상이 된다.
고등학교 교사 임꺽정씨는 담임을 맡고 있는 학생의 학부모에게 2만원짜리 카카오톡 음료 쿠폰을 받았다.두 사람 모두 법 위반 제재 대상에 해당된다. 비록 5만원 이하의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직무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금액과 상관없이 부정청탁으로 간주된다. 임 교사는 담임으로서 학생의 지도, 평가를 직접 담당한다. 청탁금지법은 부정청탁이 아닌 원활한 직무 수행이나 사교, 의례 등의 목적이 인정될 때에 한해 3만원 이하의 음식물, 5만원 이하의 선물, 10만원 이하의 경조사비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직무와 관련된 부정청탁은 금액에 상관없이 제재 대상이 된다. 학부모가 담임교사에게 식사 가액 5만원을 넘지 않는 2만원 상당의 식사를 대접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동탁씨는 한 국립대 병원에 입원하려고 해당 병원 원무과장과 친분 있는 친구 설까치씨에게 순서를 당겨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원무과장은 마씨를 먼저 입원할 수 있도록 했다.세 사람 모두 위법행위에 해당한다. 우선 마씨는 친구 설씨를 통해 부정청탁을 했다.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 설씨 역시 마씨를 위해 부정청탁을 했기 때문에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된다. 원무과장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아버지 고길동씨는 아들 고희동씨의 병역 판정 검사에서 4급 보충역을 받아 서울 관내의 사회복무요원이 되게 하려고 아들 몰래 평소 알고 지내던 병무청 홍보담당 간부 둘리씨를 통해 병역 판정검사장의 군의관 도우너씨에게 부탁했다.아버지 고씨는 부정청탁을 했다. 2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 병무청 홍보담당 간부 둘리씨 역시 공직자로서 부정청탁을 했기 때문에 3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에 해당한다. 군의관 도우너씨는 청탁을 거절했다면 제재 대상이 되지 않지만 들어줬다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아들 희동씨는 부정청탁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제재 대상이 아니다.
대기업 홍보부장 김갑을씨는 알고 지내는 기자 홍길동씨의 부친상에 조의금 10만원을 내고, 해당 기업의 홍보팀은 김씨 이름으로 5만원짜리 조화도 함께 보냈다.최 기자는 총 15만원 상당의 부조금과 조화를 받아 경조사비 허용 가액 10만원을 넘었다. 부조금과 조화 등은 합산 금액이 10만원을 넘어선 안 된다. 15만원의 2~5배에 해당하는 과태료를 내야 한다. 홍보부장 김씨도 마찬가지의 처분을 받게된다. 기업 역시 직원 교육 소홀 등의 책임이 있으면 과태료를 물 수 있다.
대학원생 독고탁씨는 박사 학위 논문 심사 뒤 한정식집에서 논문 심사 교수들에게 1인당 7만원짜리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7만원짜리 식사는 음식물 제공 허용 기준인 3만원을 초과했다. 식사 자리 역시 논문 심사 통과를 부탁하는 취지로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학원생 독고씨와 교수들 모두 식사액의 2~5배에 해당하는 과태료를 물 수 있다.
[NO] 이럴 땐 신고하지 마세요한 사기업 부장 장길산씨는 공공기관 직원 3명과 오찬을 했다. 식비는 1인당 5만5천원씩 총 22만원이 나왔다. 이에 장 부장은 음식물 접대 허용 가액이 3만원이라 12만원을 자신이 결제하고 나머지 금액은 오찬 참석자가 각자 지급했다.법 위반이 아니다. 3만원 초과 부분은 더치페이(각자 내기)를 했기 때문에 음식물 접대 허용 가액인 3만원 범위 안에서 식사를 대접한 것으로 간주한다.
결혼식 혼주 이몽룡씨가 하객으로 참석한 직무 관련 공무원 등을 포함해 모든 하객에게 5만원 이상의 식사를 제공했다.위법이 아니다. 이씨는 모든 하객에게 동일하게 식사를 제공해 직무 수행의 공정성에 신뢰를 해치지 않을 정황이라는 점이 감안된다. 결혼식에서 하객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사회 상규로 간주된다.
4만5천원짜리 선물을 서울에서 서울로 보내면 택배비(4천원)를 포함해 4만9천원이 되는데, 같은 선물을 서울에서 제주도로 보내면 택배비(6500원) 탓에 선물 가액 5만원을 초과해 5만1500원이 된다. 택배비는 선물 가액에 포함되나.택배비는 선물 가액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경우 선물은 원가대로 4만5천원짜리로 간주된다. 그러나 식당 등의 부가가치세는 음식물 가격에 포함된다. 가령 2만8천원짜리 식사에 부가세 10%가 포함돼 3만800원이 되면 음식물 가액 3만원을 넘는 걸로 본다.
청탁금지법이 조기 정착하려면 공직자, 사립학교 교원, 언론인 등 법 적용 대상자의 실천 의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신고도 필수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의 특성상 공직자 등과 일반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시민들의 감시 참여 의지는 높다. 취업포털 사이트 ‘커리어’가 추석 전에 직장인 25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법 위반 사례를 목격하면 신고하겠다”고 한 응답은 76%에 달했다.
부정청탁이나 금품 수수 등 청탁금지법 위반행위를 발견한 시민은 누구나 신고할 수 있다. 위법행위가 일어난 해당 공공기관이나 국민권익위원회, 감사원, 수사기관에 자신의 인적사항과 신고 취지, 이유, 내용을 적어 서면이나 전자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다만 허위 신고는 무고죄로 처벌 대상이 된다.
청탁금지법은 신고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장치를 뒀다. 신고자의 인적사항을 공개한 사람에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고, 신고자를 파면·해임해 신분상의 불이익을 준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신고를 방해하거나 못하게 강요해도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신고자는 최대 2억원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 ‘란파라치’(청탁금지법 포상금을 노린 파파라치) 학원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포상금 지급 등에 쓰이는 국민권익위의 공익신고제도 내년 운영 예산은 20억300만원으로 올해(10억8600만원)보다 갑절이 늘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이 신고에 참여하기에는 여전히 문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신고하려는 시민은 증거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음지에서 이뤄지는 접대나 청탁 현장은 찾아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사진이나 동영상, 영수증 확보 등도 ‘작정’하지 않으면 녹록한 일이 아니다. 신고 시민이 조사 결과에 불복해 이의신청을 할 때도 새로운 증거 자료를 내야 한다. 경찰은 과잉 수사 논란을 피하려 112 등 전화 신고를 받지 않고 서면으로만 신고를 받는다는 방침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상임위원인 박경준 변호사는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으려면 신고 절차를 더 간소화해야 한다”며 “시민에게 사실에 관한 증명 책임을 넘겨선 안 된다.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조사기관이 묵살하지 않고 일단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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