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도 곤혹스럽죠. 저희가 재판하는 기계가 아니잖아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형사처벌이) 사회 격리, 교화, 죄에 대한 응보 등 양형 요소 중 아무것에도 해당하지 않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선량한 시민에게 징역 1년6개월씩이나 선고하는 데 아무런 논리가 서지 않는 거죠.”
징역 1년6개월 ‘정찰제’ 판결최근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판결이 잇따르는 이유를 묻자, ㄱ판사는 “많은 판사들이 곤혹스러워한다”고 털어놨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유죄를 선고할 때, 판사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말이다. 실제 형사사건 재판을 맡은 몇몇 판사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종교 또는 신념을 이유로 총 들기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처럼, 이들에게 무조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하는 ‘정찰제 판결’을 거부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를테면 판사들의 ‘양심의 자유’에 따른 직접행동이다.
청주지법 형사4단독 이형걸 판사는 지난 8월9일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장아무개(21)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 “전쟁 준비를 위해 총을 들 수 없다”는 종교적 신념을 품은 장씨는 2015년 12월 현역병 입영통지서를 받았으나 입대를 거부했다. 병역법 제88조 1항에는 “현역입영 또는 소집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이나 소집기일부터 일정 기간이 지나도 입영하지 않거나,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다.
이형걸 판사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법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국가가 대안을 마련하려는 아무런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형사처벌만 감수하도록 한다면 양심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헌법상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제19조). 여기서 말하는 ‘양심’이란 “세계관·인생관·신념이나 신앙일 수도 있고 그 밖에 개인의 인격 형성에 관계되는 내심의 가치관·윤리적 판단을 포함”한다. 특히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만다는 정도의 진지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형사처벌, 공무원 임용 자격 박탈, 취업 제한 등의 불이익을 감수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해 감옥에 갇힌 이는 해마다 600~700명, 지난 60여 년간 1만7천여 명에 이른다.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라는 헌법 가치가 서로 갈등관계에 있을 때, 국가는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가치만을 쉽게 선택하고 ‘양심의 자유’를 쉽게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국가는 충돌이나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하며, 대안 마련이 불가능해 기본권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최소한의 제한에 그치도록 해야 한다.” 이형걸 판사는 판결문에서 국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대만 등 여러 나라가 이미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고 있고 유엔 인권위원회도 각국에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는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등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중대한 헌법적 갈등 상황을 외면한 채 징병제도가 실시된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위헌제청보다 무죄판결?이 판결에 앞서 지난 6월에는 인천지법 부천지원 형사4단독 류준구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 박아무개씨 등 2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류준구 판사는 “극단적 비폭력주의자에게 군대 입영을 무조건 강제하는 것은 그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허물어버리는 것으로써 양심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병역 외 다른 방법을 통해 국가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들의 양심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면서까지 형벌로써 군대 입영을 강제하지 않더라도, 국방의 의무라는 본질을 침해할 것이라고 보이진 않는다”고 무죄 판단 이유를 적시했다.
주목할 만한 흐름이다. 지난해 5월부터 1년3개월 사이에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은 모두 9건이 나왔다(하단 표 참조). 지난해 광주지법 형사5단독 최창석 판사가 3건, 수원지법 형사2단독 황재호 판사가 2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로만 따지면, 4개 재판부가 무죄판결을 쓴 셈이다. 이같은 ‘무죄판결’ 행렬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2015년 이전에 나온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판결은 2004년 서울남부지법(3건)과 2007년 청주지법 영동지원(1건) 단 2개 재판부뿐이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2004년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이정렬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처음 무죄를 선고했을 때만 해도 ‘튀는 판결’로만 치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 사법부가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은 크게 2가지다. 병역법의 처벌조항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헌법재판소가 결정해서 법을 개정하도록 만들거나, 병역법의 ‘정당한 사유’에 ‘양심의 자유’도 포함되므로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법 위반이 아니라고 폭넓게 해석하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판사들 사이에서는 대법원보다 헌법재판소에 더 기대는 분위기였다. 박시환 전 대법관이 서울남부지법 판사 시절이던 2002년 사상 처음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않은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병역법 제88조 1항은 헌법 위반”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이후 병역법과 향토예비군설치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이 이어졌다. 향토예비군설치법(제15조 8항)에는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병역을 마친 뒤 집총을 거부하는 종교 또는 신념을 품게 된 예비군 거부자는 많게는 전과 40~50범이 되기도 한다.
십수 건에 이른 위헌제청에 견줘, 무죄판결은 드물었다. 고뇌하던 판사들은 징역 1년6개월 선고로 어느 정도 고민을 정리하는 듯했다. 병역법 제88조 1항 위반에 대한 법정 최고형은 징역 3년이다. 한때 징역 3년이 선고되기도 했으나, 2001년부터 법원은 기계적으로 짜맞춘 듯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하기 시작했다. 징역 1년6개월보다 적은 형량을 선고받으면 재징집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 이상 판사들이 봐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처였다.
대법원은 2004년 전원합의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유죄로 판결했고, 헌법재판소도 2004년과 2011년 병역법 처벌조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2004년 헌재 결정에서는 헌법재판관 5명이 국회가 대체복무제 도입 등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보호할 수 있는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국방부는 대체복무제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가 여론을 핑계로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그런데 최근 1~2년 새 판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무죄판결은) 재판관으로서 양심에 따라 판결한 것뿐이다. 만약 병역법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면 위헌제청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려야 했겠지만, 현행 병역법 자체가 문제 있다 하더라도 ‘정당한 사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법원의 재량 아니겠나. 설사 병역법이나 향토예비군설치법이 합헌이라고 하더라도 법관이 유무죄를 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판결을 내린 ㄴ판사의 말이다.
국민 70%, 변호사 80% ‘대체복무제 찬성’ㄴ판사뿐만이 아니다. 2014년 12월, 판사 회원 수백 명이 가입한 ‘법원 국제인권법연구회’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가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점과 대체복무제도의 필요성’이라는 주제로 공동학술대회를 열고 판사들의 고민을 공개적으로 털어놓으면서 뭔가 다른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헌법재판소도 지난해 7월9일 양심적 병역거부를 형사처벌하는 병역법이 위헌인지 따지는 공개변론을 열었다. 헌재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다루는 것은 이번이 3번째다. 이르면 연말께 결론이 나올 것으로 점쳤으나, 공개변론이 열린 지 1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선고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헌법재판관들은 평의를 열어 몇 차례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판사들 사이에 모종의 기류가 있어요. 헌재 결정만 기다리지 말고, 법원 판사들이 ‘정당한 사유’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죠.” ㄱ판사는 “10개 재판부 정도가 무죄판결을 내리면 기류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법원 바깥 분위기도 비슷하다. 서울지방변호사회(서울변회)가 지난 6~7월 소속 변호사들에게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1297명 가운데 80.5%인 1044명이 ‘대체복무제 도입’에 찬성했다. 응답자의 74.3%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63.4%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지 않은 채 병역 의무만을 요구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답했다. 서울변회는 이같은 설문조사 결과를 헌법재판소에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국제앰네스티가 5월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 1004명 가운데 70%가 대체복무 허용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1심 법원 판사들의 잇단 무죄판결은 아직 작은 물꼬에 불과하다. 9건의 무죄판결 가운데 2건은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혔다. 이 중 1건은 현재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 중이다. 하지만 잇따른 무죄판결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둘러싼 사법부 내부의 큰 물줄기가 출렁이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선 법원에서 법관들이 겪고 있는 고뇌와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어야 합니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법원의 위헌법률심판제청의 의미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위헌법률심판제청 한건 한건에 담긴 법관의 양심의 무게는, 낡은 눈금으로 저울질할 수 없는 천금 같은 것입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은 2014년 12월 학술대회 기조발제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수많은 반복의 고리를 끊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로 법관의 양심을 이야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어떤 응답 내놓을까일선 법원 판사가 최고 사법기관의 기존 판단에 반기를 드는 판결을 내놓을 때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만다는 정도의 진지함”을 가슴에 새겼기 때문이다. 몇몇 용감한 판사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뿐만 아니라 이제는 무죄판결로 자신들의 고뇌와 양심의 무게를 내보이고 있다. 이제는 이 ‘양심의 소리’에 헌법재판소가 응답할 차례다. 헌재 관계자는 “법원에서 계속 (무죄)판결이 나오고 있으니 마냥 시간을 끌 수 없을 것 같고, 조만간 재판관들이 다시 논의를 시작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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