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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두 번째 고향은…

방세에 떠밀려온 제주, 정작 문제는 “놀 곳이 너무 많아” 현무암의 고향과 닮은 신들의 섬에서 희로애락 그리는 김홍모 만화가
등록 2016-08-02 07:46 수정 2020-05-02 19:28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작업실에서 웹툰 사이트 ‘어른’에 연재 중인 <좁은 방>을 그리고 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생활을 하게 된 경험을 만화로 풀어낸 작품이다. 정용일 기자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작업실에서 웹툰 사이트 ‘어른’에 연재 중인 <좁은 방>을 그리고 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생활을 하게 된 경험을 만화로 풀어낸 작품이다. 정용일 기자

검은 돌담 따라 걷다 웃옷을 벗고 물에 뛰어들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곳. 만화가 김홍모(45)의 고향은 경기도 연천읍 전곡리다. 뭍에서 보기 힘든 용암지대로 집집마다 현무암 돌담이 늘어서 있었다. 햇볕이 뜨거울 때는 마을을 두르는 한탄강에 풍덩 몸을 던지면 됐다.

서울에서 멀지만 가까운

제주도는 김 작가가 중학교 때까지 살던 고향과 닮았다. 두 번째 고향으로 삼기 손색없다. 바다로 뛰어들어 한바탕 멱이라도 감고 싶은 날씨가 이어지던 7월25일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의 작업실에서 제주살이 4년째인 김 작가를 만났다.

김 작가는 2003년 인터넷 에 를 연재하면서 만화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등 어린이만화로 작품 영역을 넓혔다. 서울 용산 참사를 다룬 만화책 과 소외된 곳에서 싸우는 노동자와 장애인, 제주 강정마을 주민 이야기를 다룬 에도 참여했다.

그가 제주에 터 잡은 데에 뾰족한 이유는 없었다. 삶을 떠미는 힘에 실려 이곳에 왔다. “홍대입구에 작업실이 있었어요. 집값이 너무 올라서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었죠. 경기도 파주로 작업실을 옮겼어요. 그런데 거기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지나온 거처 중 한 곳에 빚을 얻어 땅 한 뙈기라도 사놓고 버텼다면 제법 큰돈을 만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난한 만화가’라고 말하는 그는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수도권의 방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가 새로운 터전으로 꼽아본 곳은 변산반도, 지리산 자락 등이었다. 여러 후보지 중 최종 낙점을 받은 곳은 제주였다. 비행기로 김포공항까지 1시간이 채 안 걸리는 제주가 다른 곳보다 교통이 편하다는 게 장점이었다. 그가 터를 옮긴 2013년 2월만 해도 제주에 집을 얻어 사는 것은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섬으로 왔다고 일이 더 번거로워지진 않았다. “일하는 데 불편한 건 없어요. 만화야 전자우편으로 보내면 되고 의논할 일이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되죠. 회의가 있으면 서울에 놀러 가듯 한 번씩 올라가요.”

복병은 늘 그렇듯 의외의 곳에 있었다. “가서 놀아야 할 곳이 너무 많아요.” 한라산, 사려니숲, 386개의 오름. 제주도의 자연에 마음을 빼앗겼다. 놀다보면 작업을 잊고 싶어졌다. 하지만 제주 곳곳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새 작품을 시작하는 힘이 됐다. “어떻게 보면 제주가 오랜 기간 변방이었잖아요.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너무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제주해녀항쟁이죠.”

변방이 선물한 상상력

제주해녀항쟁은 1931년부터 1932년까지 200여 차례 시위에 해녀 1만7천여 명이 참여해 일제의 수탈에 맞서 싸운 항일운동이었다. 김 작가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의 지원을 받아 지난 1월 을 펴냈다.

다음 작품으로 준비하고 있는 웹툰 도 제주를 모티브로 한다. “제주에는 1만 명 넘는 신들이 있어요. 대재앙 이후 여러 부족을 정벌해 세운 제국이 섬을 침략하는 과정과 여기에 맞서는 신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에요. 주인공은 여자 심방이에요.” ‘심방’은 무속 사제를 일컫는 제주어다.

섬에선 아이디어만 샘솟는 것이 아니다. 어울려 살기도 좋다. 제주에는 ‘괸당’ 문화가 있다. ‘친족’을 의미하는 제주어다. 외지인에 배타적 경향이 있지만 한번 마음을 열고 괸당이 되면 서로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제주에는 삼무, 즉 세 가지가 없다고 해요. 도둑과 거지, 담장이죠. 그만큼 서로 믿고 도와주는 일이 자연스러운 곳이에요. 이곳 문화를 따르고 어울리면 이웃과 더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어요.”

사방 곳곳 즐거운 일이 가득한 제주살이지만 아픈 일도 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과 세월호 참사는 김 작가의 가슴에 응어리를 남겼다. “고향인 전곡도 미군부대가 엄청 많았어요. 범죄도 많았고. 그래서 미군부대가 들어오면 얼마나 마을이 황폐해지는지 잘 알아요. 강정마을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죠.”

‘괸당’으로 함께 살기

그는 제주로 옮겨와 살기 전부터 강정마을에서 열리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제주해군기지가 지어진 뒤에도 마을 주민들과 매년 열리는 ‘강정 평화대행진’을 함께하며 평화를 향한 제주의 열망을 되새긴다.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등져야 했던 세월호 참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용산 참사 만화를 그리기 위해 유가족분들을 만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저에게도 전해졌으니까요. 세월호 참사도 만화로 그려보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이 거대한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올해 초 작업실 근처 김녕 앞바다에 세워진 빨간 등대에 ‘노란 리본’을 그려넣으며 희생자들을 기렸다.

제주가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거대 자본이 섬을 차지하는 것도 걱정이다. 김 작가가 이주할 때만 해도 제주 여러 마을의 학교는 문 닫을 것을 걱정했다. 지금은 마을 구석구석 펜션과 커피숍이 들어섰고 이주민과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제주 이주에 필요한 돈은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으로 순식간에 늘어났다. “한 주민이 ‘이제 내 바다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이주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 섬을 진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어요.”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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