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극우 성향 보수단체 대한민국어버이연합(어버이연합)에 각각 집회 지시를 내리거나 자금 수억원을 지급한 정황이 드러난 가운데, 국가정보원(국정원)마저 보수단체의 실무를 지휘한 흔적이 나타났다.
취재 결과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국정원과 보수단체가 긴밀한 ‘커넥션’을 맺어온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국정원 직원은 보수단체에 신문광고 문구를 전달하고 보수단체는 이 문구를 주요 일간지 광고로 실었다. 이 직원은 보수단체 인터넷 카페에서 직접 ‘열혈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 보수단체의 전단지 배포 계획, 대자보 문구 작성에까지 관여했다. 이 입수한 ‘국정원 대선 여론 조작 사건’ 재판 기록 등을 보면 이처럼 국정원이 보수단체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보수단체와 긴밀한 활동을 벌인 부서는 국정원 심리전단이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인터넷에서 대통령과 여당을 적극 옹호하고 야당을 비판하는 게시글을 작성한 조직이다.
국정원 직원, 직접 보수단체 활동 벌여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박아무개씨는 보수 청년단체인 대한국인청년단(청년단)의 네이버 카페에 두 개의 아이디를 사용해 가입했다. ‘나라사랑’이란 별명으로 2012년 3월13일 가입했고, ‘투덜이 스머프’라는 별명으론 2012년 4월6일 활동을 시작했다. 박씨는 이 카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회원 중 한 명이었다.
청년단은 2012년 6월 전체 회원들의 방문 횟수 등을 통계 내어 카페에 공개했다. 회원들의 활동을 독려하는 차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박씨는 두 개의 아이디를 활용해 한 달간 청년단 카페에 179차례 방문했다. 하루에 여섯 번꼴로, 전체 회원 중 3위였다. 게시물은 27개를 작성해 4위, 댓글은 74개를 써서 9위를 차지했다. 이 단체의 단장, 사무총장, 미디어국장 등 공식 직함을 지닌 이들을 제외하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회원이었다.
현재 박씨가 작성한 게시글은 모두 삭제됐다. 하지만 단서는 남았다. 대선 여론 조작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박씨는 2012년 7월21일 이 카페에 ‘[펌글] [사설] 안철수 교수가 여전히 기회주의적으로 보이는 이유’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올린 것으로 나온다. 제18대 대선(2012년)을 앞두고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른 안철수 현 국민의당 공동대표를 깎아내리는 내용이었다.
박씨와 청년단의 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씨는 2012년 3월6일 당시 청년단 단장 김아무개씨에게 전자우편을 보낸다. 이 전자우편에는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중략)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북한 독재정권의 도발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훼손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국정원 직원이 특정 보수단체의 활동 방향까지 제시한 것이다. 박씨는 이같은 내용을 김씨에게 보내면서 “다시 보니 조금 유치하기도. 아무튼 보고 고치건 아니면 새로 멋진 글 만드시건 알아서 하시길”이라고 적었다.
국정원, 보수단체 전담팀 운영 정황국정원은 심리전단 내에 보수단체 전담팀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꺼내드는 카드인 ‘개인적 일탈’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박씨의 광범위한 보수단체 관리 정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0여 개 보수단체들을 관리해온 것으로 알려진 박씨가 주로 접촉한 인물은 뉴라이트 계열의 보수단체인 자유주의진보연합(자유연합)의 최아무개 대표였다. 박씨는 2011년 7월19일 최 대표에게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반대하는 내용의 광고 문구를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이 전자우편에는 “부제목은 ‘야당 의원도, 지역 주민들도 반대하고 있습니다’로” “고성방가 다음에 쓰레기 투기 추가 삽입” 등 광고 문구의 여러 곳을 수정하라는 취지의 설명이 담겼다. 박씨는 최 대표에게 문구 수정을 요청하며 “새로 온 분이 광고 문안 수정에 재미 들렸는지 자꾸 손대려고 하네”라고 덧붙였다. 적어도 복수의 직원이 보수단체를 관리해온 정황이다. 국정원 쪽이 수정한 문구가 반영된 광고는 이틀 뒤인 7월21일 와 에 자유연합 명의로 실렸다.
국정원 내부에서 박씨가 보수단체 활동 현황을 보고하는 ‘윗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2011년 6월26일 최 대표에게 ‘연평해전 9주년’과 관련한 신문광고 문구를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박씨는 이 전자우편에서 “근데 디자인은 어쩌실런가?”라고 물은 뒤 “월요일 오전에 이 문구만 검토받을까 아니면 시안을 보내주시려나?”라고 물었다. 박씨로부터 보수단체의 광고 내용을 보고받아 검토하는 상관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이 의견을 주고받은 자유연합의 연평해전 9주년 광고는 박씨가 작성한 문구 거의 그대로 2011년 6월29일 와 에 실렸다.
‘우익화 프로젝트’ 의혹국정원 심리전단은 국정원 3차장 산하 조직이었다. 당시 국정원 3차장 산하 조직은 대북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국내 보수단체를 접촉할 이유가 없다. 앞서 국정원은 심리전단이 인터넷에서 대선 여론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자 ‘온라인 공간에서 북한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해명해왔다. 자신의 업무 영역이 ‘대북 업무’에 한정돼야 함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전단이 국내 보수단체의 활동을 지휘하는 것은 이런 조직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북한 공격 방어용이라는 해명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이 때문에 국정원 심리전단이 온라인·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한국 사회 ‘우익화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진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만 깊어진다. 최근 어버이연합에 대한 청와대 행정관의 집회 지시, 전경련의 자금 지원 정황에 이어, 국정원이 국내 정치 개입을 위해 보수단체를 주도적으로 동원한 정황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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