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100년 넘은 동네, ‘옥바라지 골목’이 흔적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옥바라지 골목이 위치한 무악동의 옛 이름은 현저동이다. 이 동네는 소설가 박완서가 자란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박완서는 황해도 개성 근처 개풍군 박적골이라는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학구열이 높은 엄마의 치맛바람에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 앞동네인 현저동으로 유학 왔다. 소녀는 고된 셋방살이를 하며 서울의 복닥복닥한 생활에 적응해나간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여 박완서는 자전적 성장 소설 를 썼다.
욕소리, 곡소리 끊이지 않던
현저동은 부자 동네가 아니었다. 체장수, 굴뚝쟁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다. 저잣거리처럼 욕이 오가고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좁은 거리에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고, 시도 때도 없이 식수가 중단됐다. 아이들은 서대문형무소 안에 있던 미끄럼틀을 타고 놀다가 부모님에게 들켜 혼이 났다.
무악동은 본래 호랑이가 나오는 고개로 악명이 높았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수도를 정하기 위해 산에 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산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긴 탓에 무속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 동네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것은 일제 시기다. 1908년 일제가 의병이나 항일운동가들을 주로 수용하기 위해 서대문 감옥을 만들면서, 여관이나 식당들이 부쩍 늘었다. 감옥 수용자들의 밥과 옷가지를 챙기려고 가족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수용자마다 하루 한 명만 면회를 시켜줬다. 그마저도 일본 순사들의 기분에 따라 이유 없이 가족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가족들은 여관에 머물거나, 생면부지의 동네 사람들에게 하룻밤 신세를 지며 하염없이 면회를 기다렸다. 이렇게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에 ‘옥바라지 골목’이 형성됐다.
일제의 의도대로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이곳에 갇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김구 선생의 를 보면, 옥에 갇힌 2천 명 가운데 대부분이 의병이었다. 먹고 입는 것이 모두 여의치 않았다. 김구 선생처럼 옥바라지를 해주는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경우는 그래도 나았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옥바라지 골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하루에 한두 끼는 꼭 사식을 넣었다고 한다.
곽낙원 여사는 옥고를 치르는 아들에게 “나는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딸까지 데리고 왔으나 1회밖에는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딸은 저 밖에 있다. 너는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를 위하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간수하기 바란다”라고 17년형을 선고받은 아들 앞에서 담담해했다. 옥살이는 단순히 한 사람의 고충이 아니라 한 가족의 일이었다.
도시재생의 모든 조건 갖췄건만
서대문형무소에는 김구 선생 외에도 김좌진, 손병희, 유관순,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다. 이후에는 1960년 4·19 혁명과 이듬해 5·16 군사정변을 거치며 시국사범들이 주로 수감됐다. 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8명의 사형이 집행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이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이곳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다. 아직 옥바라지 골목에 사는 이들은 이날 동네에 떠나갈 듯 곡소리가 들렸다고 기억한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부터 군사독재 시절까지 굴곡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을 바꿨다. 1987년 서울구치소는 경기도 의왕시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옥바라지 골목도 쇠락했다. 2006년 이 일대가 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이제 10년 만에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도시재생을 위해 더는 구식 재개발을 하지 않겠다”던 서울시의 선언이 무색하다.
재개발로 사라진 보석 같은 곳이 한둘이겠는가. 특히 이 지역에선 10층짜리 아파트 4개 동을 짓는 작은 개발 사업이 이뤄진다. 80년간 현대사의 질곡을 담은 한옥 10채와 서대문형무소의 오랜 서사를 아파트 몇 채와 맞바꾸는 것은 밑지는 장사 같다.
무악동 옆 교남동이 있다. 이길자(63)씨는 교남동에서 30년 넘게 여관을 운영하다 6년 전 무악동으로 이사 왔다. 그는 헐값에 여관을 내놓고 나가야 하는 형편이다. “여기에서 나가면 다시 여관 하기 힘들지. 그래서 속이 바짝바짝 타.”
박금년(64)씨는 무악동에만 42년을 살았다. 21살 때, 인왕산 앞 판잣집을 얻었다가 월급을 힘들게 모은 돈으로 집을 샀다. 아이들도 여기서 키웠고 떠날 이유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일부러 한옥 보러 전주에 갈 이유가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여기를 한옥마을로 꾸며놓으면 얼마나 좋아. 서대문형무소에 갔다가 우리 마을에도 놀러 오면 좋겠어.” 37년 동안 이 동네에 살아온 최은아(50)씨는 낡아도 문화가 있는 동네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정든 고향을 떠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이다.
아직 주민들이 살고 있는 무악동은 현재 예비철거가 진행됐다. 바닥엔 잘게 부숴진 유리 파편이 나뒹군다.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떨어지거나, 지역의 역사적 자산이 풍부하지 못하면, (재개발의 대안인) 도시재생 사업에 어려움이 있다. 옥바라지 골목은 동네 자체에 무한한 이야기가 있다. 골목에는 100년 가까운 세월이 녹아 있고, 오밀조밀 지은 한옥촌도 있다.
마침 옆동네 행촌동은 성곽마을이다. 도시재생 마을로 선정되어 이미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 중이다. 한 폭 도로 차이로 마을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지금이라도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을 재개발보다 이야기가 있는 도시재생 사업으로 방향을 조금 바꿀 수는 없을까.
“천지에 인기척이란 없었다”
박완서 선생이 폐허로 변해가는 무악동을 본다면 어떻게 소회할까? 마지막 장은 한국전쟁 뒤, 인왕산에서 폐허가 된 서울을 내려다보는 소감으로 끝난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란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글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기획자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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