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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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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입으로 말하고, 누구의 귀로 들을까?

유령처럼 떠돌며 사안마다 스며드는 ‘이 죽일 놈의 표현의 자유’ 국가가 나서고 공동체가 합의하는 ‘형성적 규제’ 없이는 끝없이 출몰해
등록 2016-01-14 14:51 수정 2020-05-03 04:28
독일에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역사단죄법’이 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2015년 12월28일, 서기석씨가 손팻말을 들고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 나타났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독일에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역사단죄법’이 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2015년 12월28일, 서기석씨가 손팻말을 들고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 나타났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말하지 못하는 자가 말하게 하고, 권리 없는 자에게 권리를 주던 자유가 있었다. 표현의 자유다. “왜 이것을 말하면 안 되는가?” 약자와 소수자가 이 자유에 근거해 금기를 넘어선 말들을 쏟아냈다. ‘표현의 자유’는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가야 할 길을 밝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자유도 공유하자며 애써 다져온 권리를 훔치는 자들이 나타났다. 서울의 중심에서 사랑이 아니라 증오를 외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최근의 극단적 장면 하나. “당신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진실은 나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맞춤법도 틀린 손팻말을 서아무개라는 자가 소녀상 근처에서 휘둘렀다.

민주노총, 뜻밖의 논평

그렇게 “표오오오현의 자유”는 “혐오오오의 자유”로 변질됐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의 나라에서 아무리 “노오오오력”해도 백주대낮의 난동을 처벌할 법률이 마땅치 않다. 하필이면 병신년에 벌어진 일이다.

“2016년은 육십갑자로 따져 병신년(丙申年)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여성인 박근혜와 병신(病身)을 엮어서 ‘병신년’이라는 조롱이 적지 않습니다. 조롱만으로도 부족하다는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병신년은 장애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악의 없는 비유라도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면 버리고, 피할 수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길입니다.”

민주노총이 지난 연말 ‘진지충’스럽게 내놓은 ‘2016년, 민주시민들의 멋진 풍자를 기대합니다’ 논평의 일부다. 옮기고 나니 그 소문이 나쁘다고 하면서 소문의 내용을 말해 퍼뜨리는 꼴처럼 됐지만, 하여튼 대통령이 나오는 방송 화면과 병신년을 합성한 ‘짤방’이 인기리에 돌았다. 그 와중에 논평이 나왔다. 한 민주노총 활동가는 “그나마 민주노총 2015년 논평 중에서 관심을 받았다”며 웃었다. 자발적인 자제 움직임도 있었다. 새해에 ‘병신년 소재 농담 No 캠페인’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퍼졌다.

웃자고 던진 말에 상처를 받았을까?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에게 물었다. “불편하죠. 장애인에 대한 낙인이 문화적으로 재생산되는 거잖아요.”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도 그 표현을 쓰지 말자고 주장해온 터였다. 박 교장이 덧붙였다. “맞받아쳐서, 이슈화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논쟁을 벌여야죠. 논쟁의 대상이 되도록 해야죠.” 그렇게 차별에 맞서는 몸으로 살아온 그는 고급한 학문적 용어인 ‘대항하는 말’(Counter-Speech)을 쏟아냈다.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소수자를 불편하게 해도 좋은가? 병신년 논란이 남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그 정도 풍자도 못하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서씨의 손팻말과 병신년 농담은 분명히 차원이 다르다. 명백한 혐오는 ‘차별금지법’이나 ‘혐오처벌 조항’을 만들면 된다. 물론 명백한 혐오를 처벌할 법조차 없다는 현실이 문제지만 말이다. 페미니스트 손희정씨는 “표현의 자유가 최종 심급의 권리인가?”라고 회의한다. “마지막 한 사람”의 “가장 섬세한 인권 감수성”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말은 논란의 에 대한 답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데 한해
2015년 6월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서울광장 입구에서 동성애 차별 발언을 쏟아내는 일부 개신교 세력을 향해 퍼레이드에 참가한 성소수자들이 ‘대항하는 말’(Counter-speech)을 내걸었다(왼쪽). ‘병신년’ 표현을 자제하자는 캠페인도 있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페이스북 갈무리

2015년 6월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서울광장 입구에서 동성애 차별 발언을 쏟아내는 일부 개신교 세력을 향해 퍼레이드에 참가한 성소수자들이 ‘대항하는 말’(Counter-speech)을 내걸었다(왼쪽). ‘병신년’ 표현을 자제하자는 캠페인도 있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페이스북 갈무리

그놈의 ‘동지적 관계’가 문제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그 책에서 (일부)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그 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검찰은 형사 기소했다. 이 사태를 두고 국가권력의 학문의 자유 탄압으로 보는 지식인의 성명이 나온 반면, 책 내용이 자의적 근거와 주장으로 약자인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주목한 지식인 성명도 있었다.

표현의 자유는 이처럼 유령처럼 떠돌고, 권리의 충돌에 스며든다. 어디까지 표현의 자유이고, 어디부터 제약돼야 하는지,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허약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만큼 복잡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박권일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는 ‘박권일의 말자지라’에 이렇게 썼다. “‘누구의 표현의 자유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누구를 ‘향한’ 표현인가’라는 질문이 반드시 제기돼야 한다.”

세상의 모든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다. 보수와 개혁의 정치 지형만이 아니다. 축구장 빼고 모두 그렇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혐오 발언에 대한 법적 기준은 물론 사회적 논의조차 불모에 가까운 한반도에서 오히려 피해를 입은 이들이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겪는다.

조우석 한국방송공사(KBS) 이사는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이면서 민주노총 협력부장인 곽이경, 성소수자 활동가이자 인권재단 ‘사람’ 상근자인 정욜씨를 향해 “더러운 좌파”라고 했다. 당사자는 물론 성소수자 인권운동 진영이 함께 법적 대응을 검토했다. 모욕죄로 형사고소를 하는 것도 고려했다.

“형사소송을 하려면 모욕죄로 고소해야 한다. 모욕죄는 인권활동가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자주 쓰인다. 시위 도중 경찰에게 하지도 않은 욕을 했다고 모욕죄로 고소당한 지인도 있다. 현행법이 우리를 대변하는지 모르겠다.” 곽이경씨가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과 상의 끝에 형사고소를 넘어선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한 이유다.

이렇게 오히려 피해를 입은 이들이 국가 형벌권에 함부로 기대지 않으려 애쓴다. 국가권력이 가르는 표현의 자유가 양날의 검이고, 더 많은 자유를 위한 원칙을 모르지 않아서다.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한 ‘더 많은 표현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More Speech, Better Speech)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혐오표현 규제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법학자도 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과)는 최근 에 발표한 논문 ‘혐오표현의 규제: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를 위한 규제대안의 모색’ 등에서 이렇게 밝혔다.

“혐오표현의 여러 해악을 고려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규제의 방향은 단순히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어 그는 “혐오표현의 제한은 소수자가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며 “이렇게 접근할 때,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 충돌이라는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사상의 시장에서 ‘더 많은 표현’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원칙도 고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5년 들불처럼 번진 ‘대항하는 말’이 있었다. 여성 혐오에 반대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는 여성 비하를 남성에게 반사하는 ‘미러링’으로 주목받았다. 여성 비하를 일삼는 한국 남성을 일컫는 ‘한남충’ 같은 히트작도 나왔다. 급기야 일부 화살은 남성동성애자에게도 향했고, 이들을 비하하는 ‘×꼬충’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장이 갉아먹히는 고통”

메갈리아 운영진이 이 단어의 사용을 규제하자, 일부가 떨어져나와 ‘워마드’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여기엔 ‘유부게이’(동성애자이면서 이성과 결혼한 남성)를 아우팅(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성소수자임을 알리는 것)시키자는 프로젝트도 제안됐다.

놀이와 유희는 ‘핵노잼’을 예방한다. 문제는 손희정씨의 지적처럼 ‘혐오가 문제적 정동이 된 시대’다. 하 수상한 시대적 분위기에 지나친 농담은 타인의 상처가 되는 길로 빠지기 쉽다. 표현의 자유 문제에 천착해온 박권일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는 언어 유희의 양면을 지적했다.

“‘정계 아재들’ 몇 명 빼고는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에서도 초기에 이념적인 방향을 가지고 움직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여성 혐오, 지역 비하를 놀이와 유희로 즐겼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는 순간, 고통받는 사람이 생겼다. 유희가 아니라 다큐가 된 것이다. 그렇게 농담이 다큐가 되는 고독한 순간이 찾아온다.”

고삐 풀린 말들의 전쟁터 같은 사이버 세상에서, 익명의 말은 극단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손희정 씨는 이런 경향에 대해 “포르노적 언어가 지배한다”고 우려했다. “너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에 심장이 갉아먹히는 고통을 느껴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수년간 벌어진 거친 말들의 끝없는 반복에 상처받은 공무원의 호소다.

그렇게 비난받는 당사자가 아니라도, 혐오의 기운은 상식적인 시민의 영혼을 잠식한다. 단순히 참는 것을 넘어서 공동의 행동이 필요한 이유다. 홍성수 교수는 논문에서 “혐오표현이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여건을 만들어가는’ 긍정적인 조치”인 ‘형성적 규제’를 강조한다. 형성적 규제는 법적 규제, 차별 구제뿐 아니라 혐오발언을 방지하기 위한 홍보와 캠페인 등을 포함한다. 논문의 결론은 “시민적 공감대”에 이른다.

약자와 소수자의 자력화

“‘더 많은 표현’이 해법이라고 주장하면 시민사회의 힘이 미약하다는 회의론에 부딪힌다. 그런데 시민사회의 힘이 없다면 혐오금지법을 제정하는 것도 어차피 불가능하다. 더욱이 현재 한국 정부는 혐오표현에 대한 형성적 조치조차 사실상 방기하고 있으며 국가인권위원회도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선도적으로 혐오표현 규제 입법을 시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시민사회에서 혐오표현의 심각성과 규제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어야, ‘더 많은 표현’으로 맞받아칠 수도 있고, 규제 입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동력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표오오오현의 자유”가 유령처럼 떠돌며 다양한 의제와 사안에 스며들고 있다. 님의 침묵은 금이 아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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