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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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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병역의 나라에서 살아남기

고환적출수술 등 안 했다고 끝없이 현역병 판정받았던 MTF 트랜스젠더…현역병 입영처분 취소 판결을 받은 이의 “져줄 수가 없었던” 5년
등록 2016-01-06 09:49 수정 2020-05-02 19:28

준비를 하고 준비를 하고 준비를 해도 3급(현역병 복무)이 나왔다. 이예린(25·가명)씨에게 징병제는 잔인하다. “얼마나 든든했겠어요?” 2015년 12월15일, 마주 앉은 이씨가 말했다. 스무 살, 열심히 징병신체검사(신체검사)를 준비했다.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처지에 오로지 인터넷을 뒤져서 찾았다. 다행히 가까운 병무청 인정 병원이 있었다. 진단서를 끊었다. 3개월이 걸렸다. “든든한” 성주체성장애 진단서를 품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3급 판정, 2011년 4월28일이었다.
철저한 준비, 처절한 좌절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몇 번이나 신체검사를, 몇 번이나 성주체성장애진단을 받았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법원 판결문을 보니 지난 4년여, 그는 최소 6차례 성주체성장애 진단을 받았고, 6개월마다 신체검사를 받았다. 성주체성장애는 트랜스젠더의 정신과적 진단명이다. 이씨는 MTF(Male To Female·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스젠더(Transgender)다. 2015년 11월19일, 서울행정법원(재판장 조한창)은 병무청이 이씨에게 취한 현역병 입영처분이 “위법하다”고 취소 판결했다.
1심은 “원고는 적어도 ‘징병신체감사 등 검사규칙’ 제11조 제1항[별표 2] 질병·심신장애 정도 및 평가기준 102호 나목의 경도(3급)를 넘어서는 성주체성장애가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했다(등급판정 기준이 판결문에 첨부된 [별표 2]에 나온다).
[별표 2]의 102호는 인격장애 및 행태장애 항목인데, 성주체성장애, 성적선호장애를 포함한다. 장애는 다시 경중에 따라 경도는 3급(현역병), 중증도는 4급(보충역·공익근무), 고도는 5급(제2국민역·현역병 면제) 판정을 받도록 명시돼 있다. 고도는 ‘1년 이상 치료 경력이 있거나… 심각한 증상이 있어 군복무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등을 포함한다. 이렇게 공식 기준에는 ‘고환적출수술’ ‘성전환수술’ 등 외과적 수술을 해야 한다는 기준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일부러 20분 늦었다. 그래도 피하지 못했다. “뒤에 뒤에” 고등학교 동창이 서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손에 땀이 나요.” 안과를 거쳐 정신과에 이르렀다. “성주체성장애 있네요?” 군의관의 한마디면 동창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 뻔했다. “6개월 치료 받으셔야 됩니다.” 다행히 그 말만 했다. “너무 다행이었죠. 희망이 생겼으니까. 아르바이트해서 번 30만원으로 심리검사를 받고 가면…”. 첫 신체검사 날의 기억이다.
“액션이 없으면 안 돼요.” 6개월 진단도 허사였다. 다시 간 신체검사에선 “(여성)호르몬 처방을 받아 가슴이 나온 컴퓨터단층촬영(CT) 해오면 4급, 남성으로서 돌이킬 수 없는 수술을 하면 5급”이라고 했다. “그때 진짜 제일 충격을 먹었죠.”
이씨에 대해 병무청은 그때부터 ‘정신과 진단은 믿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돌이킬 수 없는 수술”은 고환 적출을 포함한 생식기 관련 외과수술을 뜻한다. 그가 말했다. “절대 수술이 두려운 게 아니에요. 오히려 하면 좋은데, 현실이 그걸 받아들이냐고요. 부모는 (수술을) 절대 허락 안 하죠. 수술해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잖아요. 얼굴은 아직 남자인데 가슴만 나왔다거나 해봐요. 그래서 불가피하게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분들이 생겨요.” 그렇게 떠밀린 성전환 수술은 가족과 절연, 직장에서 배제로 이어진다.
그만의 얘기가 아니다. 20대 초반, 가족의 지원은 받지 못하지만 징집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 MTF 트랜스젠더가 부딪히는 다반사다. 한국 사회에서 자녀의 성전환수술 비용을 지원할 부모는 지극히 드물다. 이런 현실이 결합해 성전환 수술 기준은 ‘역대급’ 자기결정권 침해 압력이 된다. ‘신성한 징병제’의 다른 얼굴이다.
“1500만원 빚졌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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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 공익법무법인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는 이런 현실에 대해 “유엔이 금지하는 불임수술 강요”라고 지적했다. 햇수로 5년, 철저한 준비는 처절한 좌절에 번번이 꺾였다. “재검을 계속 받는데, 언젠가 ‘3급 드릴게요’ 하더라고요.”

“영화 에서 여주인공이 뱀파이어가 될까 말까 고민하잖아요. 부모님한테 얘기할지도 고민하고. 결국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뱀파이어가 돼요. 정말 내 얘기 같았어요. (성전환수술도) 절대 돌이킬 수 없고,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요.”

그는 ‘준비된 성전환수술’을 원한다. “항상 1500만원 빚졌다고 생각해요. 수술에 드는 비용이 1500만원인데, 누가 지원해줄 리 만무하니 제가 마련해야 하거든요. 수술 뒤 회복 기간 6개월에 필요한 생활비도 마련해야 하고요. 저는 호르몬 치료가 수술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아직은 아니에요.” 자립하는 트랜스젠더의 삶은 시작부터 마이너스 인생이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혼자 고민해 호르몬 처방을 받았다. 그래야 “4급을 준다”는 군의관의 말을 들어서다. “언제 (집에서) 쫓겨날지 모른다고 생각해 월세방도 알아보고 당장 나가면 사야 할 것도 적고… 항상 (밤에) 누우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편안하고 따뜻하게 잘 마지막 날이요.” 이것은 한 사람의 안전 문제다. “미흡해요. 3급 드릴게요.” 호르몬 처방을 받고도 같은 답을 들었다.

2012년 10월, 입대영장이 날아왔다. 유일한 희망, 병사용 진단서를 가슴에 품었다. “쟤 여군이야?” 입대자들이 그를 보고 수군댔다. 지옥에서 보낸 3일의 시작이었다. “10초 준다. 웃통 벗어!” X선 검사가 시작됐다. 가슴을 가렸다가 손을 내렸다. 당당하게 서 있었다. 티를 내면 볼까봐 그랬다. 호르몬 시술로 가슴이 나온 터였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눈물이 흘렀다.

소중한 진단서는 언제나 품고 다녔다. 언제 제출해야 할지 모르니까. 남들이 진단명을 볼까봐 윗옷 속에 넣었지만, 네모난 서류 실루엣이 보였다. “그때 다 늙었죠.” 3년만큼 긴 3일이었다. 다행히 귀가 조처를 받았다. 함께 국군병원에 갔던 이들은 온갖 면제 방법을 떠들었다. “척추랑 안과랑 섞으면…”. 그는 정당하게 판정받고 싶다. “병무청은 어떻게든 저를 (군에) 보내려 하고 군에선 (밖으로) 내보내려 했어요.”

외로워도 슬퍼도 꺾이지 못한다

아버지가 물었다. “왜 나왔어?” 대답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군대에서 왜 나왔냐고!” 거듭된 추궁에 “무섭고 힘들다고 했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수치스러워했다. 어렴풋이 전후 사정을 아는 어머니가 “차라리 말하라”고 권했다. “스무 살 때부터 성주체성장애 진단을 받았고….” 아버지는 ‘무서워서 못 갔다는 것보다 이게 낫다’고 여겼다. 종합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받아라, 아버지의 요구였다. 그런데 문제가 커졌다. 그 병원 의사가 아버지에게 “호르몬 투약을 아냐”고 했다. 아버지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나왔다. 부모가 자신 때문에 잘못될까 두려웠다. 말없이 입원했다.

살면서 제일 힘든 때였다. 당시를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남겼다. 그가 “지금도 손이 떨린다”며 메모장을 꺼내 읽었다. “재검 받으면서 살았던 상황이 행복했던 거구나. 신부전증 환자가 신장투석을 받듯이, 재검이 나올 때마다 생명을 넣어주는 느낌이었는데….” 그는 “긴장하고 초조해야 안심이 됐다”고 돌이켰다. “웃고 떠들다 갑자기 영장이 또 나오면 무너질 것 같아서.”

차라리 입원한 3주가 천국 같았다. 외부와 단절된, 군대 걱정도 없는 진공의 상태. 스무 살 이후로 그렇게 편한 날들은 처음이었다. “드라마에 보면 (정신)병원에서 나가고 싶어 하잖아요. 저도 처음 3일은 말도 안 했어요. 근데 다들 상처받은 사람들이라 착해요. 행복했던 시간을 얘기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휴가 온 기분이었어요.”

병원을 나와서 4~5개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성의학클리닉 상담이 아니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지 모른다. 트랜스젠더를 이해하는 의사를 만났다. 항상 주눅 들게 했던 말에 “역으로 찌르는” 법을 배웠다.

이번 진단서는 진짜 든든했다. 의사가 “수술 강요는 비현실적”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전에 있었던 ‘우울증, 자살’ 같은 말과 달랐다. 그러나 3급이 다시 나왔다. 통곡의 벽이었다. “항상 패배감을 가지고 살았는데 완전히 무너졌죠.”

그는 언제나처럼 검사통지서 끝자락에 있는 작은 글씨에서 희망을 붙들었다. “통지서 아래에 이의제기 안내가 나와요. 바로 가서 신청서를 썼죠. ‘(3급 판정은) 수술 강요라고 생각하며 (판정을 뒤집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증거를 찾겠다’고 써냈죠. 담당 직원이 ‘쳇!’ 비웃으면서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는 거예요. 저도 화가 나서 ‘안 된다는 건 그쪽 생각이죠’ 했어요.” 그 공무원 이름 석 자도 기억한다.

2014년 6월, 대구 중앙신체검사소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다니는 클리닉 의사가 “외국의 성정체성 진단 목록에는 수술하라는 말이 없다”에 형광펜을 그어줬다. 군의관에게 설명했다. “병무청 지정 병원 아니면 (진단서) 안 받습니다!”라는 고성이 들렸다. 결과는 뻔했다. ‘주관적’이라는 지긋지긋한 말과 함께 3급이 나왔다. 병무청 지정 병원의 심리검사에서 “남성들과 단체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나왔지만 허사였다.

원하는 모든 것, 정당한 병역 판정

주저앉지 않고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군문제에 정통한 행정사를 찾았다. 아르바이트로 소송비 100만원을 마련했다. 부산에 있는 행정사가 오전 11시 출근인 그에게 오전 10시30분에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출근을 늦추고 문방구로 달려가 팩스를 보냈다.

“행복했어요. 열심히 나를 위해서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요. 전에는 언제 영장이 나올지 몰라 기다리기만 했거든요.” 그러나 결과는 “패망”이었다. “병무청 주장을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결정이 나왔다. 행정사도 당황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성소수자를 위한 별의별 상담소에 연락했고 공익법무법인 공감과 연결됐다. 공감의 장서연 변호사가 “소송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공동변호인 한가람 희망법 변호사 등의 치열한 준비로 1심에서 승소했다. “제 생애 처음 승리감을 맛보았다”고 말하는 이예린씨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러나 병무청이 항소했다. 나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커졌다. 그는 “저는 더는 져줄 수가 없어요”라고 몇 번을 말했다. “대법원까지 가서라도 길을 만들어야죠.”

두어 달 전 병무청의 통지서를 받았다. “징병신체검사규칙 강화에 따른 보충역 처분 대상으로 병역처분변경원 출원절차 등을 안내하오니 빠른 시일 내 재신체검사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입영 적체로 안과(난·근시) 질환 등이 있는 사람에게 재검을 통해 보충역(4급) 판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통지서를) 찢어버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정정당당한 판정을 받고 싶다. 그것뿐이다.

신윤동욱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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