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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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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 꿈꾸는 ‘때깔’ 나는 삶

충남 홍성으로 귀촌해 그림과 커피로 농촌 노인·장애인 돕는 황선미·장원석씨 부부
등록 2015-12-24 10:07 수정 2020-05-02 19:28

2012년 부부는 모서리 끝에 서 있었다.
서울에서 입시미술을 가르치던 황선미(32)씨는 아이들을 경쟁의 한가운데로 몰아붙여야 하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다.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겠다고 비좁은 공간에 아이들을 밤늦도록 잡아둔 채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그리라’고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회의가 컸어요.” 다른 삶을 찾고 싶었지만 그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그림을 가르치는 일밖에 없었다.
그즈음 남편 장원석(36)씨도 직장을 잃었다. 그가 일했던 작은 와인회사가 부도로 사라졌다. 사장은 연락을 끊고 도망쳤다. 묵묵히 일했던 날들이 허무했다. “자괴감이 머리를 휘감았어요. 내 시간을 아무 데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감과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시기였어요.”

‘때깔’ 대표 황선미씨(왼쪽)와 남편 장원석씨가 충남 홍성 농촌 마을 주민들이 그린 캐리커처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때깔’ 대표 황선미씨(왼쪽)와 남편 장원석씨가 충남 홍성 농촌 마을 주민들이 그린 캐리커처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서울 삶에 지쳐 시골 옥탑방으로

젊은 부부는 서울이 고되게 느껴졌다. 삶의 터전을 옮겨 그들을 옭아맸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마침 장원석씨 부모님의 고향이 충남 홍성이었다. 부부는 짐을 싸서 홍성의 시골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부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농촌 마을은 고독한 땅이었다. 외지에서 온 젊은 부부에겐 더욱 그랬다. 장원석씨는 “아무것도 나를 닦달하지 않아 편안한 동시에 외로웠다”고 홍성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알게 됐다. 부부만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외로운 만큼 농촌 사람들도 외로웠다. 서울의 노인들이 외로운 것 이상으로 농촌 노인들도 외로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많지 않았어요.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자원도 부족했고요.” 황선미씨는 말했다. 외롭지 않으려면 우선 만나야 했지만,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부터 어려웠다.

이동권은 장애인만의 결핍은 아니었다. 시골 마을의 버스는 저녁 7시면 끊겼다. 차를 가진 이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노인들은 겨우 모일 수 있었다. 누군가 ‘발’을 자처하지 않으면 흩어져 있는 시골 노인들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만나더라도 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부부는 농촌 노인들이 ‘조금 덜’ 외롭도록 그들의 발과 다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더듬어봤다. 입시미술을 가르쳤던 황선미씨의 재능은 물론 그림이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그림을 매개로 한 활동을 모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원석씨는 바리스타 교육을 받았다. 이웃과 커피를 나눌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너무 평범해서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시골 노인들에겐 접하기 힘든 재능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선미씨는 그렇게 문화 비영리 단체 ‘때깔’을 꾸렸다. 경쟁이 아닌 공존을 이루며 이웃과 ‘때깔 나게 아름다운 삶’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부부는 주위를 둘러봤다. “도시의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열패감과 무력감으로 농촌으로 온 청년들”이 있었다. 황선미씨는 “당신의 평범한 ‘그림 그리는 손’이 이곳에서는 큰 재능이 되고, 당신의 ‘포토숍 하는 손’이 이 마을에선 큰 쓸모가 될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부부의 이야기에 청년 5명이 마음을 열었다.

2013년 황선미씨는 홍성의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같이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그가 시골 노인들에게 도화지와 펜을 쥐어주는 계획을 설명했을 때 마을 이장들은 고개를 저었다. 한가로이 그림을 그리기에 농사일은 고되고 바빴다.

4개 마을 돌며 캐리커처 수업

황선미씨는 “도대체 그림을 그려서 어디다 쓰냐”던 이장들의 말을 곱씹었다. 묘안 하나가 떠올랐다. 생산자들이 농산물 포장지마다 붙이는 스티커에 노인들이 직접 그린 캐리커처를 새겨넣으면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림의 ‘현실적 쓰임새’가 가늠되자 4개 마을(장곡·홍성·홍동·용복)의 이장들이 앞장섰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노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동은 사무장들(홍성군 건설교통과 소속)이 담당했다.

때깔은 마을을 차례로 돌며 캐리커처 수업(3개월 과정)을 열었다. 수십 년간 흙만 만져온 홍성의 노인들이 난생처음 연필을 들고 흰 도화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때깔이 만들어낸 것은 노인들이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처음엔 주저하던 노인들이 수업 시간을 기다리고 예상외의 솜씨를 보이며 그를 놀라게 했다. 이웃들은 서로의 얼굴을 그리며 자신의 삶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누에 치랴 논일 밭일 하랴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도 몰랐다”는 이옥자(75)씨도 때깔을 만나서야 겨우 시간을 짜냈다. 그림이라곤 “소학교 다닐 적 마지막”으로 그렸다는 그가 캐리커처를 배우며 이웃의 얼굴 선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사람은 둥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주 뾰족해. 다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을 갖고 있더라고.” 그림을 계기로 그는 마을 일에도 열심히 참여하게 됐다. 최근 열린 마을잔치에선 ‘해가 달이 된 오누이’ 인형극의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

도화지 위에선 각자의 사정과 삶의 굴곡이 ‘평등하게’ 만났다. 3년간 때깔을 거쳐간 노인이 100여 명에 이른다.

황씨가 그림으로 노인들과 만나는 동안 장씨의 관심은 시골의 장애인들에게 향했다. 카페를 운영하다 알게 된 홍성여중 목련반(특수학급) 교사와의 인연이 출발이었다. 목련반 학생들에게 바리스타 과정을 가르치면서 문화·편의 시설에서 격리된 농촌 장애 청소년들의 삶에 시선이 갔다. 그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한 장애인 복지관의 바리스타 교육 컨설팅을 맡게 됐다. “서툰 저를 이해해주고 마음을 연 친구들이 ‘안녕’이란 문자를 겨우겨우 찍어 보내줘요. 장애 청소년들이 주는 뭉클함이 이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이에요.”

그동안 때깔은 황씨가 고군분투하며 이끌고 있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약간의 재료비(농림축산식품부의 권역 종합정비사업비) 말고는 수익이 거의 없다. 손을 보태는 청년들에게도 교통비 정도를 지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홍성의 학교들에서 방과 후 학교 미술 교사로 일하며 돈을 번다. 시민의 도움을 받기 위해 예술 분야 크라우딩펀드(예술나무)에 ‘홍성 실버 아티스트’를 등록했지만 후원은 미미하다.

“생계엔 전혀 도움이 안 돼요. 먹고사는 게 목적이라면 절대 못해요. 그래도 어르신들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못 그만두겠더라고요. 서울에선 느낄 수 없었던 뭉클함과 뿌듯함을 포기할 수 없기도 하고요.”

도화지 위에서 만난 삶의 굴곡들

벼농사를 끝낸 농촌의 노인들은 다음 봄을 기다리며 깊은 겨울을 함께 보낼 동무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농촌 노인들의 단절된 관계와 추락하는 자존감, 고독의 무게를 살피지 않는다.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퇴직한 이종엽(65)씨는 좋은 사람들과 ‘연결된’ 삶을 살고 싶어 귀촌했지만 농사일에 바쁜 주민들과 시간을 공유하기 쉽지 않았다. 그에게 때깔은 토박이 이웃을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때깔도 그의 소망도 거창하지 않았다. 이종엽씨는 말했다.

“작더라도 우리의 자존을 유지하면서 동네 이웃들과 체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시골에 빈 공간은 충분하니까 운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갖춰지면 우리가 쓸고 닦으며 가꿀 수 있을 거예요. 그것만 돼도 우리는 덜 외롭고 덜 고독할 겁니다.”

이은주 교육연수생 helloly3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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