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말 기준 미국 내 한인 수는 223만8989명(2015년 9월 집계 ‘재외공관별 한인 인구 현황’)이다. 이 중 시민권자는 141만4875명(63%)이며, 영주권자는 42만6838명(19.1%), 일반 체류자는 29만7714명(13.3%)이다. 미국 내 한인 유학생 수는 9만9562명에 이른다.
일반 체류자 29만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이민을 희망하면서도 영주권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들의 자녀인 이민 1.5세대에게 매브니는 시민권을 얻는 ‘초고속 패스’다. 자신의 시민권 취득은 물론 부모까지 영주권자로 만들 수 있다. 매브니를 이미 마쳤거나, 현재 수행 중이거나, 합격해 입대를 기다리는 이들이 ‘미국의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미국 시민이 되려는 이유’를 말했다. _편집자
“미합중국을 위해 복무하겠습니다.”
양승훈(19·가명)씨는 오른손을 들고 선서했다. 볼에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승훈씨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나이에 ‘미군 자격’을 얻었다. 승훈씨는 만 18살이 되면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귀국해 한국군에 입대하거나, 미군이 되어 미국에 남을 방법을 찾거나.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은밀한 폭력이 자행되는 한국 군대에 갈 필요가 없다.” 주한미군에서 복무했던 미국인 모병관은 승훈씨에게 넉살 좋게 말했다. “매브니(MAVNI)를 통해 미군에 입대하면 건강보험, 생명보험, 치과보험, 주거비, 학비가 지원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3~6개월 만에 시민권 취득승훈씨 아버지는 화이트칼라였다. 유능한 ‘삼성맨’으로 팬택에 스카우트됐다. 평탄해 보였던 아버지의 인생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고꾸라졌다. 팬택이 고전하면서 승훈씨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었다. 먹고살기 위해 아귀찜 식당과 부동산 중개업도 해봤지만 모두 망했다. 승훈씨 아버지는 ‘실패의 땅’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승훈씨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9년, 그의 가족은 하와이에 새 둥지를 틀었다.
한때 펜만 쥐었을 아버지의 손은 짚처럼 푸석해졌다. 떡집에서 바닥을 쓸었고, 마트에서 물건을 날랐으며, 레스토랑에서 발레파킹을 했다. 어머니도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45살에 식당 막내가 되어 갖은 구박을 견뎌가며 일했다. 두 사람이 열 사람처럼 일했지만 살림은 빠듯했다. 승훈씨에게 부모님은 “학비를 보태주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승훈씨는 미군 모병소의 문을 두드렸다.
매브니는 승훈씨처럼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에게도 입대를 허용하는 미국의 모병제도다. 매브니를 거쳐 미군이 되면 최소 7~8년이 걸리는 시민권 취득 절차를 3~6개월로 크게 단축할 수 있다. 만 18살 이상 35살 미만의 고졸 학력 이상 외국인이면 지원할 수 있다. 미국 비자를 소지하고 2년 이상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거주 기간 동안 외국에 90일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매브니는 언어 분야나 의료 분야로 지원할 수 있다. 언어 특기자는 최소 4년의 현역과 6년의 예비군으로, 의료 요원은 최소 3년을 의무복무해야 한다.
승훈씨는 서류를 작성하고, 입대시험을 치르고, 체력시험을 봤다. 한국어 특기자로 지원해 한국어 구술 면접도 봤다. 전세계로 병사를 보내는 미국은 전세계 언어 사용자들을 흡수해 파병 군인을 채우고 있다. 입대를 허가받은 승훈씨는 2016년 7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식 입대한다.
그가 이른 나이에 군 입대를 결정한 것은 대학교 학비를 미리 마련하기 위해서다. 승훈씨의 목표는 군대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휼렛패커드(HP) 같은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다. 요즘 그는 일주일에 한 차례 입대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미래 군인 양성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다.
미군 입대로 얻게 되는 ‘그린카드’김미연(26·가명)씨는 26살에 잿빛 군복을 입었다. 현재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상태다. 의무행정병으로 2016년 4월25일에 정식 입대한다.
미연씨는 어업에 종사하던 부모님을 따라 전세계의 바닷가를 떠돌았다. 물살을 타고 중국, 통가, 뉴질랜드를 거쳐 미국 하와이에 닻을 내렸다. 하와이주립대 마노아캠퍼스에 입학했지만 그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이방인이었다. 유학생 신분이어서 합법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다. 미국 학생들의 한 학기 학비가 5천달러 정도일 때, 유학생들은 1만4천달러를 내야 했다.
취업시장에서도 유학생은 기피 대상이다. 워킹비자를 받으려면 채용하는 회사에서 보증을 서줘야 한다. 회사 쪽에선 비자 발급비와 교육비, 도중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잠재적 인력 손실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인문계 출신 유학생들이 간혹 채용되기도 하지만 “1천 명 중 한 명꼴”이라고 미연씨는 말했다.
그에게 매브니는 미국 사회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는 기회다. 미연씨는 “제대하고 사회에 다시 나와도 바로 취업이 가능하다”고 했다. 미연씨 같은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 군대로 향하는 이유다.
“사업비자(E2)를 보유한 이민 1세대의 자녀들이 매브니에 많이 지원한다”고 미연씨는 말했다. 자녀가 미국 시민이 되면 부모의 영주권을 신청해 1년 이내에 ‘그린카드’(영주권)를 받을 수 있다. 부모가 완성하지 못한 안정적인 정착을 그 자녀의 미군 입대로 매듭짓는 셈이다.
승훈씨와 미연씨는 매브니를 ‘소박한 아메리칸드림’이라고 불렀다. 미국에서 안정적 중산층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의 삶은 불확실하다.
한국에서 승훈씨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유급을 면하기 위해 텅 빈 교실에 앉아 잡히지 않는 활자들을 머릿속에 구겨넣곤 했다. 미국에 온 뒤에는 성적이 400명 중 50등 안에 들었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거나 비정규직 월급쟁이가 되어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5580원의 시급에 만족하며 힘겹게 학업을 병행하는 또래들을 보면 ‘헬조선’의 현실이 살갗에 와닿는다고도 했다.
한국인 몰려 하루 만에 마감되기도매브니 모집은 충원 계획에 따라 수시로 닫히거나 열린다. 2009년 의료 분야 333명과 언어 분야 557명을 모병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육군 1천 명을 뽑았고, 2015년에는 육군 3천 명으로 확대됐다. 그때마다 한국인 지원자가 몰렸다. 한국인 지원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는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 따르면 2009년 9월 당시 매브니에 지원한 언어 특기자(의료 전문성이 없는 경우 모두 언어 특기자로 지원) 385명 가운데 한국어 구사자가 112명(29.1%)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박준성(29·가명)씨는 2009년 매브니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처음 실시됐을 때 지원했다. 준성씨는 유독 한국인이 많이 몰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원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신분 문제가 가장 큰 것 같다. 신분이 확실해지면 미국에서 살기가 편해지고 복지 혜택도 주어진다.”
준성씨는 부모님과 함께 2001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2009년 대학을 휴학하고 매브니에 지원해 포병(언어 특기자로 합격한 뒤 보직은 별도 선택·부여)으로 입대했다. 그는 학비 외에 월 6천달러의 생활비도 받았다. 아르바이트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었다. 매브니로 입대할 경우 의료보험은 물론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원된다. 학비는 연간 최소 4천달러에서 최대 17만2천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생활비(900~6천달러)는 각 주의 물가 수준과 집세에 따라 별도 책정된다. 입대하자마자 1만~2만달러의 보너스도 지급된다.
윤호진(25·가명)씨는 이민 청년들에게 매브니는 “정말 끌리는 기회”라고 했다. “한국인이 너무 많이 몰리자 미 국방부에서는 한국인 모병 수에 제한을 뒀을 정도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나 뉴욕에서는 매브니가 열리자마자 하루 만에 할당된 자리가 꽉 차버린다.” 호진씨는 중학교 2학년 때인 2005년 부모님과 함께 미국에 발을 들였다. 그는 명문이라 일컫는 조지아공과대학을 올해 8월 졸업했다. 그러나 취업박람회 때 작성한 이력서 20장 중 18장이 유학생이란 이유만으로 접수를 거부당했다. 시민권이 문제였다. 그는 영주권조차 발급받을 수 없었다. “친구들 중 시민권자는 98% 취업했다”고 호진씨는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올까 고심하던 차에 매브니를 알게 됐다. “시민권·영주권 신청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매브니가 얼마나 빠르게 시민권을 제공하는지 알 수 있다. 짧게는 6~7년, 길게는 10년까지 걸리는 절차를 한 방에 끝낼 수 있다. 매브니로 입대하려고 5~6년씩 기다리는 한국인도 많다.”
하지만 시민권에도 대가가 따른다. 준성씨가 매브니로 입대한 2009년엔 입대 이후 전투 보직 지원만 가능했다. 당시 미국은 전세계의 분쟁에 개입하며 각지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2009년 미 국방부는 3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 간호사, 언어 특기자, 정보 분석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군의 모병 팸플릿은 명시하고 있다. “미 육군의 일원으로서 이라크나 기타 작전 수행 지역에 임무를 위하여 배치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준성씨는 포병으로 훈련받던 중 특수부대로 차출됐다. 그는 필리핀에서 특수부대를 보조하는 심리작전병으로 투입됐다. 귓바퀴를 가격하는 대포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교전이 벌어지면 특전사 병사들과 똑같이 총을 들고 싸워야 했다.
특수부대 보내기 위해 선발?이런 일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미군에서 (공식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매브니들을 특수부대에 보내기 위해 선발”하는 것이라고 준성씨는 말했다. 2012년 는 “매브니들 중 3분의 1은 특수부대에 합류한다”고 보도했다.
모병제 국가 미국에선 주로 가난한 젊은이들이 군인의 길을 택한다. 매브니는 미국인이 되길 원하는 외국인에게 ‘초고속 시민권’을 부여해 부족한 해외 파병 미군을 충원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전쟁터로 보낼 군인을 확보해야 하는 미국의 필요와 참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는 한국 청년들의 필요가 만난 셈이다.
매브니로 향하는 한국 청년들의 열망은 인터넷에서도 확인된다. 다음 카페 ‘강한 미군 & 더욱 강한 한국계 미군’에는 매브니 게시판이 따로 있다. 2009년 3월 이후 최근까지 3천여 개의 글이 올라와 있다. 주로 입대 시험 후기와 선발 관련 정보로 가득하다.
“분쟁 지역에 발령 나는 것이 두렵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승훈씨는 잠시 망설였다. “아프간에 발령 나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내가 아프간에 있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 확률이 나를 비켜가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파산한 그의 가족은 한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 비시민권자이므로 미국에 정착할 수도 없었다. 그의 가족은 덫에 걸린 쥐 같았다. 어딜 가도 차별받았다. 미국의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가 없어 차나 집을 사기도 어려웠다. 두렵다 해도 매브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같은 질문에 미연씨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후회는 없다. 분쟁 지역에 갈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은 돼 있다. 아프간에 가도 괜찮다. 처음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지원했기 때문에 모든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다.”
마른침이 미연씨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갑부의 딸로 태어나지 않은 내가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미군 입대다. 미군이 제공하는 혜택을 한국에서 받을 수 있을까? 그 혜택이 나의 (입대) 이유다.”
그래도 수월한 일은 없다. 호진씨는 지난 8월 입대해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시민권을 취득했다. 현재는 버지니아주에서 무기 수리병으로 보직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런데 “훈련소 생활이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나는 신분 문제를 해결하려 미군이 됐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싶을 때가 많다. 미국 시민권자로 아무리 10~20년을 살아도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란 쉽지 않다. 취직이야 되겠지만 어차피 외국인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국적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 선택이었는지는 시간이 한참 지나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민권 얻어도 달라지지 않는 삶매브니로 입대해 의무복무를 마친 준성씨는 현재 한국에 있다. 기대와 달리 미군 제대 뒤에도 미국 사회에서 할 일이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미국 시민의 증명서를 얻는 일과 미국 사회에서 시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세탁소, 네일숍, 편의점 등 소규모 자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한국계 이민자로서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준성씨는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대학원도 다니고, 프렌차이즈 창업도 하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연어가 태어난 하천으로 회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수도 있다. 연어가 내려간 바다는 냉혹했다.
그래도 한국의 살인적 경쟁이 두려운 이들에게 미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다. 준성씨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37살 한인 가장은 한국 군대를 제대하고도 매브니에 지원했다.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하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갈급함으로 ‘미국을 위한 전쟁’에 참전한다.
박로명 교육연수생 romyung926@naver.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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