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제도보다는 검인정제도를, 검인정제도보다는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의 이념을 고양하고 아울러 교육의 질을 제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92년 11월 헌법재판소(헌재)가 내놓은 판단이다. 국정교과서가 헌법의 취지에 맞지 않는 제도라는 점을 사실상 확인한 대목이다.
당시 남기정(56·서울 창덕여고 국어교사)씨는 “국정교과서 제도가 교사들에 의한 자주적·전문적인 교과용 도서 저작의 자유를 봉쇄하고 있다”며 국정제도 위헌 소송을 냈다. 헌재는 8 대 1로 남씨의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들의 학습권이 충돌할 경우, 학습권이 우선돼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 때문에 판결문에서 헌재는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원칙으로 하되, 예외적인 경우에만 국정제가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헌재는 이 예외를 “저작·발행에 비용은 많이 드는 반면 수요는 적어 어느 누구도 그러한 교과서를 집필·발행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라든지 사인에게 맡기는 경우 그에 관한 연구가 충실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라고 풀이했다. “예컨대, 현재 중학교 1종 교과서로 되어 있는 가정,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가사가 그에 해당할 수 있다”고 용례까지 곁들였다.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국정교과서가 헌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다는 일종의 ‘예외적 합헌론’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3년 만에 다시 헌법재판소로 </font></font>특히 헌재는 ‘역사 과목’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적 요소에 대해 별도로 판단을 할애했다. “교과서의 내용에도 학설의 대립이 있고, 어느 한쪽의 학설을 택하는 데 문제점이 있는 경우, 예컨대 국사의 경우, 어떤 학설이 옳다고 확정할 수 없고 다양한 견해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위헌 요소’를 지닌 국정교과서의 대표적인 사례가 역사 교과서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 역사 교과서는 교육부 고시를 근거로 진행되고 있다. 일개 행정규칙에 불과하다. 반면 헌법은 ‘국가 통치 체제와 기본권 보장의 기초에 관한 근본법’이다.
국정교과서가 다시 헌법재판소 문을 두드리게 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대리인을 맡아 ‘국정교과서 고시 위헌 헌법소원’에 나섰다. 헌법소원은 공권력에 의해 침해된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구제받는 제도다.
12월1일부터 민변(<font color="#C21A1A">minbyun.or.kr</font>)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font color="#C21A1A"> /historyact2012</font>) 누리집에서 시민 청구인을 모으고 있다. 국정화저지네트워크 쪽은 청구인이 모집 첫날인 12월1일에만 500여 명 참여했고, 12월4일 현재 1200명까지 늘었다고 밝혔다. 마감은 12월15일 오후 4시까지다.
청구인 참여는 1분만 짬을 내면 가능할 만큼 절차가 간단하다. 청구인 대상은 초·중·고등학생과 이들의 학부모를 비롯해 교사, 학교장, 검정제 교과서 집필자, 출판사, 앞서 국정화 고시에 반대 의견을 제출한 시민 등이다. 이번 소송을 이끌고 있는 송상교 변호사(민변 사무차장)는 “교육부 장관 확정고시는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다. 고시의 위헌성을 확인하고, 그 취소를 요구하는 헌법소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헌법소원을 준비하는 민변 쪽은 보도자료를 통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위헌인 10가지 이유를 댔다.
무엇보다 교육 3주체인 학생, 교사, 학부모가 헌법이 정한 교육 기본권을 침해받는 문제가 크다. 가장 큰 피해 당사자는 역시 국정교과서로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학생이다. 국정교과서에 정부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 담길 경우, 학생들은 ‘자유롭게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
헌법에 따르면, 학생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의 주체’(제31조)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창의력 계발 및 인성 함양을 포함한 전인적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교육기본법 제2조, 제9조). 하지만 교육기본법의 이념에 배치되는 국정교과서 때문에 학생들은 헌법이 정한 학습권을 침해받게 되는 것이다.
신옥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국정제는 국가가 교육 내용 독점권을 갖고, 국민이 이념적으로 일치된 생각을 갖도록 강제한다. 교과서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이루어져 교과서에 수록된 것 이외에는 전부 배척하는 풍토가 조성돼 가치관의 경직화가 초래된다. 이는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세계관, 다양한 사상의 형성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정교과서는 역사 역주행</font></font>교사들은 헌법이 정한 교육의 자주성·자율성·독립성(제31조 4항)을 근거로 수업권을 보호받는다. 특히 ‘교육의 자주성’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보장한다. 하지만 국정화는 단일 교과서를 통해 교육 내용을 획일화해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이번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원하는 하나의 ‘의제화된 진실’을 학생에게 가르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헌재도 2006년 “국정교과서인 국사 교과서의 편찬 행위로서 학교의 장은 국정교과서를 의무적으로 교과용 도서로 사용하여야 하고,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참여하는 교사나 학생의 경우에는 그 편찬된 내용대로 수업을 하거나 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그 범위에서 이들의 기본권이 직접 제한될 여지가 있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font color="#00847C">“역사 교과서의 근본적인 문제는 학생들에게 국가가 요구하는 내용만을 교육하도록 강요받는다는 점입니다. 역사교육은 해석의 다양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국정교과서 탓에 학생들이 다양한 역사관을 가질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역사교육의 본질이 사라지고, 정부 입맛에 맞는 것을 기록하겠다는 의도만 남는 셈입니다. 교과서를 단일화하면, 교사가 학생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이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겁니다. 국정교과서 문제가 교사들의 양심의 자유와도 긴밀하게 맞닿은 이유입니다. 특히 현대사와 관련된 부분에서 국가 입맛에 맞춰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부각할 수 있습니다. 헌법이 정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자주성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것입니다. 또 교재 선택권이 사라지는 등 교사의 자율성도 상당 부분 국가에 빼앗길 것입니다.” 청구인 김태우 교사(삼성중 역사과)</font><font size="4"><font color="#008ABD">부모들의 자녀교육권도 침해 </font></font>학부모들 역시 헌재가 인정한 중요한 기본권인 ‘자녀에 대한 교육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 자녀가 국정교과서 탓에 획일화된 교육을 받지 않기를 원하는 모든 부모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국정교과서를 통해서 학생들은 국가가 원하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의 경우, 교과서 내용이 조작·왜곡되거나 지나치게 편향된 내용이라도 시험을 위해 주입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부모로서는 국정교과서로 인해 헌법이 정한 자녀교육권을 국가에 빼앗기는 셈이다.
헌재는 2000년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관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인생관·사회관·교육관에 따라 자녀의 교육을 자유롭게 형성할 권리를 가지며, 부모의 교육권은 다른 교육의 주체와의 관계에서 원칙적인 우위를 가진다”고 했다.
<font color="#00847C">“역사 교과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 아이가 여러 기준으로 보고, 배우고, 판단해야만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 교과서의 우편향, 좌편향 논쟁은 본질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올바른 것을 배우기 바라는 게 부모의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학생, 교사와 함께 학부모가 교육의 주체로 꼽히는 거고요. 학부모들이 직접 역사 교과서를 배우는 게 아니니 ‘당신들은 입 다물고 있어라’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국정교과서는 역사를 역주행하는 것입니다.” 청구인 김양환 초등학교 6학년생 학부모 </font>교과서를 제작하는 쪽에선 ‘학문과 예술의 자유’(제22조)를 침해받을 수 있다. 민변 쪽은 “정부가 하나의 역사 해석만을 공인하는 것은 자유로운 학문의 과정에 간섭해서 억압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정부가 교과서 집필진을 일절 공개하지 않는 점도 이런 우려를 키운다. 정부가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을 밀실에서 추진하면서, 집필진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신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교과서에 반영할 여지가 차단됐다. 민변은 이런 정부의 태도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제21조 1항)에 어긋날 소지도 지적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남아 있다. 학생이나 교사가 교과서 발행에 관여할 가능성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현행 국정교과서 발행은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의 의지만으로 가능하다. 초중등교육법에서 “교과용 도서의 범위·저작·검정·인정·발행·공급·선정 및 가격 사정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제29조 2항)고 했는데, 대통령령은 “국정도서는 교육부 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교과목의 교과용 도서로 한다”(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 제4조)고 정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외에는 일절 개입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헌법과 엇나가는 국정화 일방통행 </font></font>하지만 헌법은 교육제도와 운영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법률을 통해 정하도록(교육제도 법정주의) 하고 있다. 헌재도 1992년 “교육제도의 일환인 교과서에 대하여서도 법률주의의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밝혔다. 국가 공동체와 구성원에게 중요한 영역은 국민이 본질적 사항을 결정해야 한다는 ‘의회 유보의 원칙’도 있다. 국민이 스스로 교육제도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font color="#00847C">“요즘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린 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조선을 일으킨 이성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자유롭게 판단하고, 비판하고, 의견을 나눕니다. 이런 게 역사 아닐까요? 학생들은 어른보다 더 자유롭게 생각합니다. 학교에 있다보면,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어떤 학생은 장점을 보지만 또 다른 학생은 단점을 봅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유독 국가가 역사는 하나의 방식으로 해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장에 있는 대다수 선생님들이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청구인 이충익 의정부여중 교장</font>또 국정교과서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헌법 제31조 4항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부는 교육자와 교육전문가의 반대 의견을 무시한 채 국정교과서를 강행하고 있다. 최근 기독교사들의 모임인 ‘좋은교사운동’이 전국 초·중·고교 교사 852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90.4%에 이르렀다.
국정교과서 추진 자체가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헌법 전문)야 한다는 헌법의 근본정신을 침해하고 있다. 국정교과서 추진의 근거로 이용되는 ‘교과서 도서에 관한 규정’이 국가가 독점한 교과서를 모든 중·고교 학생들이 사용하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가운데 추진하는 정부 방침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 2항과도 어긋난다.
아울러 국정교과서 확정고시를 내는 과정에서 32만 건에 이르는 국정화 반대 의견을 무시한 것도 국민청원권(헌법 제26조)을 침해했다는 지적이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은 11월4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가 1919년이냐, 1948년이냐’는 질문에 “그 얘기를 하면 불필요한 얘기가 나온다. 학계의 큰 문제”라고 답했다.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하고 있다. 국정 역사 교과서가 헌법 전문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엔 권고 등 국제 규범에도 어긋나</font></font><font color="#00847C">“국정 역사 교과서는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여론조사와 언론 등을 통해 확인된 것입니다.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학생, 학부모, 교사, 집필자, 출판사들도 기본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2013년 유엔 총회와 2014년 유엔 인권위원회에는 ‘하나의 교과서, 국가 정체성 강화 목적, 정치 중심 서술의 역사교육은 안 된다’는 내용이 보고됐습니다. 우리 헌법 원칙과 국제 규범, 어느 쪽을 봐도 국정화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헌재가 각종 판단을 내릴 때, 유엔이 내놓은 여러 권고안도 깊이 고려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헌법소원은 국정 역사 교과서를 추진하면서 훼손된 헌법 가치를 회복해달라는 국민적 요구입니다. 헌재가 국정 역사 교과서가 학교에 배포되기 이전인 내년 상반기쯤이면 국정교과서의 위헌성을 판단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청구인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font>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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