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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일은 안 하고…

신영복 교수가 쓴 대통령기록관 현판 교체 전말… 보수단체 민원 제기 뒤 대통령 기록 다루는 ‘전문위원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논의, “‘NLL 대화록 공개’ 등 입장 밝힐 일에는 침묵하고 지엽적인 일에 이념 잣대”
등록 2015-10-13 13:25 수정 2020-05-07 01:44

“자기편 아니면 전부 빨갱이 취급, 정부가 통합은커녕 만날 국민 편가르기만 하나.” “신영복 교수가 글씨를 쓴 ‘처음처럼’ 소주는? 종북소주?”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이 지난해 12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신영복 글씨체’(쇠귀체) 현판을 교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2008년 4월 대통령기록관 개관 때 임상경 초대 관장은 신영복 교수에게 요청해 글씨를 받아 현판을 만들었다. 임 전 관장은 10월9일 <한겨레>와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 최고의 고급 기록인 대통령 기록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정 운영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에 ‘국민 중심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의미가 ‘서민체’라고도 불리는 신 교수의 ‘쇠귀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08년 4월 대통령기록관 개관 때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원래 현판(위). 보수단체 블루유니온의 민원 제기 이후 국가기록원이 교체한 새 현판(아래). 대통령기록관 제공, 한겨레 김규남 기자

2008년 4월 대통령기록관 개관 때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원래 현판(위). 보수단체 블루유니온의 민원 제기 이후 국가기록원이 교체한 새 현판(아래). 대통령기록관 제공, 한겨레 김규남 기자

“예산 아끼려 ‘신영복 현판’ 위 새 현판 덧붙여”

경기도 성남에 있는 대통령기록관 정문에 있던 신영복 글씨체 현판은 ‘국가기록원 이미지통합체’로 교체된 상태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예산을 아끼려 신영복 글씨체 현판 위에 새 현판을 덧붙였다. 비용은 22만원 들었다”고 했다. 대통령기록관은 세종시 신청사로 11월20일 이전할 예정이다.

신영복 글씨체 현판은 2013년 10월 블루유니온이라는 보수단체가 “과거 간첩사건 연루자가 썼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민원을 제기한 뒤 1년2개월 만에 교체됐다. 블루유니온은 누리집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시민활동과 건전한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캠페인 사업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안보단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블루유니온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블루아이즈’(사이버안보감시단)라는 네이버 카페에는 2013년 10월8일 아이디 ‘간첩사냥꾼’이 6200여 명의 카페 회원들에게 현판 교체 민원을 독려하는 글이 있다.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하는 방법과 샘플을 적어놨다.

샘플에는 “자유대한민국에 위해를 끼치고 반국가적인 테러 행위를 획책한 자가 대통령기록관의 현판 글씨를 썼으며 버젓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걸고 있는 대통령기록관의 행태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다. 통혁당 간첩단 사건 주모자 신영복 교수의 휘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곳곳에서 맞춤법이 틀린 부분도 눈에 띈다.

이 글이 게시된 그날 국무총리실로, 이틀 뒤인 10월10일에는 대통령기록관으로 각각 시민단체 블루유니온 이름으로 민원이 제기됐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당시 “신중하게 검토해서 추후 결정하겠다”고 답변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5월26일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이 민원을 받아 현판 교체를 정식 안건으로 심의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통령기록관으로부터 제출받은 ‘제15차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 회의 결과 보고’ 자료에는 현판 교체와 관련한 위원들의 논의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위원들은 “신영복 교수가 써준 글씨로 공공기관의 상징적인 현판을 제작한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세종시 이전 시점에 현판을 교체하고 현재 현판은 기록으로 남겨 수장고에 보존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 “보수단체의 문제제기로 당장 현판을 교체하게 되면 좌파 정권의 기록물을 의식적으로 훼손하게 되는 것이며, 이 경우 좌파 단체에서 문제제기를 할 가능성이 있다. 세종시 이전 시점에 현판을 교체하고 새로운 현판은 공식적인 위치에 걸고 교체된 현판도 예우 차원에서 다른 장소에 걸도록 한다”며 비판 여론을 의식하는 내용도 거론됐다.

위원들 사이에서는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현판에 대한 시민사회의 논의가 충분하지 않은 시점에 선제적으로 위원회에서 결정할 필요는 없으므로 논의를 유보했으면 한다”는 ‘신중론’과 “현판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는데 위원회에서 회피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맞다”는 ‘교체론’이 맞서기도 했다. ‘신중론’이 우세했던지 이 회의에서 현판 교체 결정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날 회의에는 이재준 대통령기록관장 등 모두 16명이 참석했다. 이 중 강규형 위원(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은 현판 교체 민원을 제기했던 보수단체 블루유니온 권유미 대표와 함께 보수 민간연구원인 ‘자유민주연구원’의 정책연구위원이다. “공산주의자” 발언으로 전방위적 매카시즘 공세를 펴고 있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자유민주연구원의 정책자문위원이다.

법이 정한 위원회 역할과 맞지 않는 ‘논의’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 위원은 김기석 위원장(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남영준 위원(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이해영 위원(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강규형 위원(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오영섭 위원(현대한국학연구소 교수), 황민호 위원(숭실대 사학과 교수), 강동석 위원(한국정보화진흥원 국가정보화사업단장), 이재준 위원(대통령기록관장, 당연직) 등 8명이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은 제5조에서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가 ‘대통령기록관 운영에 관한 주요 사항, 전직 대통령의 열람에 관한 기본 정책, 비밀기록물과 비공개 대통령기록물의 재분류’ 등에 대한 심의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같은 위원회의 역할에 비춰볼 때 위원회가 현판 교체 안건을 주요 사안으로 논의한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상경 전 관장은 “현판 교체는 위원회가 주요 안건으로 다룰 만한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기록은 진보와 보수 모두 활용하는 건데 이념적인 잣대로 현판을 교체한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덧붙였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 소장도 “2013년 ‘2007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논란 때나 올해 초 비공개 대상인 대통령지정기록물 누설 논란을 일으킨 이명박 전 대통령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출간 등 대통령기록물과 관련한 사안이 불거졌을 때, 교통정리를 해줘야 할 위원회가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정작 해야 할 일에는 침묵하고, 지엽적인 현판 교체 안건을 주요하게 다루는 등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위원장인 김기석 교수는 16차(2014년 12월23일), 17차(2015년 2월24일), 18차(2015년 5월12일), 19차(2015년 8월27일)까지 네 차례 회의에 연거푸 불참했다. 이에 대해 전 소장은 “위원장도 참석하지 않는 위원회에 제대로 된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꼬집었다.

“독립성 중요한 기록관 현판에 이념 잣대”

현판을 바꾼 이유에 대해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안전행정부’에서 ‘행정자치부’로 부처 명칭이 변경돼 현판을 교체해야 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교체하면서 국가기록원과 소속 기관(대통령기록관, 서울기록관, 대전기록관, 부산기록관) 현판의 글씨체를 국가기록원이 지난 2007년 개발한 ‘국가기록원 이미지통합체’로 통일하기로 했을 뿐 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보수단체의 민원이 제기되기 전인 2013년 3월에도 부처 명칭이 ‘행정안전부’에서 ‘안전행정부’로 변경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국가기록원 이미지통합체’는 존재했지만 신영복 글씨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 바 있다.

임수경 의원은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라 독립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가지고 대통령기록물의 보존과 관리를 논의해야 하는 위원회에서 현판까지 이념적으로 재단하며 시간과 예산을 허비한 것은 스스로의 역할을 망각한 것이다. 위원회가 능력과 자질이 적합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올바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남 <한겨레> 사회부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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