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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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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퍼레이드 이후에 오는 것들

게이 디아스포라에게 허용된 찰나의 고향, 법이 허락하지 않은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 선언’… 감동의 서울광장 퀴어문화축제가 끝나고 남은 것은 다시 행진할 권리를 위한 싸움
등록 2015-07-08 16:11 수정 2020-05-03 04:28
제16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2015년 6월28일 이전과 이후, 한국 성소수자 인권의 역사는 달라졌다. 이날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뒤로 보수 개신교의 펼침막이 보인다. 연합뉴스

제16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2015년 6월28일 이전과 이후, 한국 성소수자 인권의 역사는 달라졌다. 이날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뒤로 보수 개신교의 펼침막이 보인다. 연합뉴스

“올해 퀴어 퍼레이드는 이미 지난해 시작됐다.”

누구는 그렇게 말했다. 지난해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앞에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드러누우면서’ 올해의 퀴어문화축제는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한 해는 뜨거웠다.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둘러싼 싸움이 격렬했고, 반대세력은 날로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올해 퍼레이드는 성사될까? 끝까지 끝낼 수 있을까? 서울광장 사용 허가의 우여곡절과 퍼레이드 허가의 간난신고를 거쳐 마침내 지난 6월28일, 서울광장 일대에서 제16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열렸다. 20대 남성동성애자 ‘파게’는 페이스북에 이날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축제에 가기 전에 나는 이런 상태였다. 나는 여전히 무기력했고, 식욕부진과 두통에 시달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 약속이 생겼다. 어기적어기적 옷을 챙겨입고 시청광장에 나갔다.” 그렇게 찾아간 광장은 어제와 달랐다.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퍼레이드였다. 난 거리를, 내가 평소 왔다갔다 하던 시청 거리, 명동 어귀를 퀴어문화축제에서 산 셔츠를 입고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패널을 들고 지나갔다.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걸었다. 그때, 정말 눈물이 났다. 나는 평소에 그 거리를 그냥 걸어다닐 수 있었다. 그때에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나를 드러내면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마주하고, 인사하고, 그 인사에 답을 받는 경험을 하면서 그 길을 걸었다.”

나를 드러내며 걷자 “눈물이 났다”

자신의 땅에서 유배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태어난 땅에 속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나 자신으로 가장 편해야 할 곳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배제당해왔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 고향에서 스스로를 철저한 이방인, 고립된 외국인이라 느끼는 사람들. 기막히게 고향 땅에서 디아스포라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지독한 무기력, 끝없는 우울, 한없는 자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다. 그런 사람의 하나였던 ‘파게’에게 퀴어 퍼레이드는 고향을 만드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잠시일지라도, 나로 당신을 만나는 일이다. 떠나지도 않았던 고향 땅에 돌아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지난해 퀴어 퍼레이드에 처음 참여한 ‘파게’의 감격은 공짜 점심이 아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집회 신고를 선착순으로 받겠다는 요상한 원칙을 내세워 벌어진 ‘무지개 줄서기’를 사나흘 동안 네댓 시간씩 하면서 스스로 얻어낸 것이다. 취업준비생인 그는 “책을 읽거나 이력서를 쓰면서” 앉아 있다가 나중에 함께 줄 섰던 이들과 친해져 “보드게임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그의 무기력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가까운 지인이 미국의 동성결혼 법제화를 두고 ‘동성애가 합법이 되면 학교 성교육 시간에 항문섹스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피켓을 든 제3자가 아니라 가까운 이에게 이런 말을 듣는 기분은 또 달랐다. 이날 가장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과 동행한 사람도 있다.

“기쁘고도 너무 속상했던 하루. 엄마·아빠가 퀴어 퍼레이드에 함께 와줘서 기뻤고, 그리고 사사건건 쫓아다니며 내 피켓 내용이 틀렸다느니 동성애는 죄악이라느니 짖어대는 사람들 앞에 ‘가세요! 내 자식이야! 내 자식 내가 잘 아니까 당신들은 당신 자식한테나 그러세요!’라고 울부짖던 엄마를 보면서, 턱과 경찰들 앞에서 휠체어를 번쩍 들어 옮겨주던 아빠를 보면서 참 자꾸만 미안하고 속상하고 화가 났다. 몇 년 전인가 퀴어 퍼레이드에 같이 가자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지만, 그런 날이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번에 나는 집에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았고, 엄마·아빠가 먼저 알고 내게 연락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엄마·아빠가 지지하는 동성애’

지난 5월 결혼한 여기동(왼쪽), 찰스 까야사 부부는 “혐오에 침묵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부부는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싶다는 희망도 품는다. 여기동 제공

지난 5월 결혼한 여기동(왼쪽), 찰스 까야사 부부는 “혐오에 침묵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부부는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싶다는 희망도 품는다. 여기동 제공

휠체어를 이용하는 퀴어 장애여성 강한새(24)씨의 이날의 경험이다. 그는 2008년부터 해마다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그녀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들에게’ 말했다. “야, 너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엄마·아빠가 지지하는 동성애’ ‘엄마·아빠가 지지하는 페미니즘’ 하는 녀자야.” 반대세력을 피해서 가라는 경찰의 제지에 퍼레이드 당일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힘들었던 그는 이날 “이래저래 마음이 뒤척이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날아온 아빠의 응원 메시지. “널 욕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거지, 네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엄마·아빠는 더 많이 못 지켜줘서 미안하지. 그런데도 넌 용감하게 잘 싸우고 있잖아. 난 네가 참 대견하더라.” 이날 퍼레이드에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엄마·아빠들이 혐오 반대 피켓을 들고 함께 걸었다.

강씨는 성소수자이자 장애인으로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다가올 세상을 먼저 경험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길거리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낫는다’ 같은 말을 하거나 악담을 하는 사람들을 제재할 방법이 없었어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생기고 이런 일이 줄었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바뀔 거예요.”

부부(夫夫)가 손잡고 참석한 커플도 있었다. 남성동성애자 여기동(53)씨는 “신랑”이라고 부르는 찰스 까야사(45)씨와 함께 “우리 결혼했어요. 신혼부부(夫夫) 53세, 동안 게이로 잘 살고 있는 중”이라는 몸자보를 붙이고 광장을 누볐다. 전날 경남 창원에서 서울까지 5시간 동안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온 부부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시청광장으로 나갔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이어진 ‘신랑’에 대한 감사다. “한국에 와서 10년간 노동을 해왔지만 퀴어 퍼레이드엔 처음 참가하는데다, 호모포비아들이 괴상한 십자가를 들고 저주를 퍼붓는 상황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평화의 인간띠 잇기에 몸자보를 가슴에 붙이고 저랑 함께 레인보우 끈을 잡았는데 퀴어 대오를 지켜야 하는 라인에서 잘 버텨주었습니다.”

이제 동화 같은 이야기다. 간호학을 전공한 교수인 여씨는 창원의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지난해 12월8일, 발을 다친 이주노동자를 소개받았다. 병원에서 통역할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경남 밀양의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찰스 까야사를 그렇게 만났다. 처음엔 서로의 성정체성도 몰랐다. 밀양에서 창원까지 통원치료가 어려운 찰스는 여씨의 집에 머물렀다. 그렇게 “눈이 맞았고”, “이 사람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고백했다. 지난 5월23일 올린 결혼식에 아흔 살 찰스의 아버지와 누나들이 필리핀에서 날아와 축복했다. 그러나 국가는 부부에게 아무런 권리도 주지 않았다.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찰스는 영주권도 시민권도 없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남아 있다.

목숨보다 소중한 ‘레인보우’

“가장 압권은 역시 호모포비아와 피켓 들이밀기였지요. 둘이 함께 몸자보를 벗어 (자꾸 밀고 들어오는 그들을 향해) 높이 들이밀었습니다. ‘우리 결혼했다. 게이로 잘 살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인권운동 경험이 없었지만, 찰스는 이날 누구보다 당당했다. 누군가 나이를 트집 잡으면 그는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답했다. 창원 집으로 돌아와 여씨가 남긴 글의 제목은 ‘목숨보다 소중한 레인보우’다.

“퀴어 퍼레이드 다녀와서 오늘은 연차휴가입니다. 신랑은 새벽에 밀양 공장 일터로 가고, 늦잠도 자고 쉬면서 퀴어 퍼레이드에서 사온 소품들을 걸고, 함에 넣었습니다. 외국 대사관의 리플릿도 정리합니다. 퍼레이드에 다녀오면 마음의 부자가 됩니다. 레인보우는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경남장애인권리네트워크 상근자이자,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운동가였고,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당원이었으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인 그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레인보우’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결혼식 하고 여의도 국회, 헌법재판소로 신혼여행을 갔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게 싸우고 싶지만, 부부의 행복을 위해 잠시 참는다. 부부는 내년에 필리핀으로 갈 생각이다. “나는 필리핀에서 일할 수 있지만, 신랑은 여기서 미등록 신분이잖아요.” 이렇게 가족구성권 문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 아니라 벌써 ‘벌어진 일’이다. 필리핀으로 가는 또 다른 이유는 “간호사 경험을 제3세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이렇게 애틋한 주말 부부의 주말 계획은 “이번처럼 신랑 손 꼭 잡고 대구 퀴어 퍼레이드에 갈 예정”이었다.

축제의 여운이 길었다.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기독인 등은 평화의 인간띠 잇기를 하면서 퍼레이드를 지켰다. 남자친구와 함께 퍼레이드에 처음 참여한 여성들은 “이것이 진짜 축제”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갈수록 항문에 집착하는 반대세력의 “항문섹스도 인권이냐? 정말 잘났어”라는 피켓에 “항문의 자유”라는 문구로 응수하는 퀴어들의 재기는 발견되고 회자됐다. 6월28일 이후로도 페이스북 얼굴들은 레인보우 색깔로 물들어 있다. 그렇게 성소수자 인권이 한국 시민사회의 주요 의제가 됐다.

이송희일 감독은 쾌유를 빌었던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퀴어 퍼레이드 지지 방문에 당황하고, 전통 북춤이 CBS 사진 설명에 의해 “퀴어 퍼레이드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성소수자 활동가들”로 오인받고, 게이 작곡가인지 모르고 차이콥스키의 곡에 맞춰 발레를 추었던 반대세력의 미래를 걱정하며 썼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처럼 LGBT 인권을 공공의제화하는데 혁혁한 공만 세우다 사라질까봐 심히 마음이 애잔하다.”

“벌써 내년 퀴어 퍼레이드가 걱정”

퍼레이드 여운이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간띠 잇기를 주도한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목사는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기독인 가운데 교단, 교회, 단체 등에서 힘들어진 분들이 있다”며 “연대하는 이들이 겪어야 하는 이 터널”을 걱정했다. 강한새씨는 퍼레이드에서 가슴을 노출하고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퀴어 장애여성의 몸을 보는 시선에 대한 질문을 담은 사진이었다. 페이스북 쪽은 ‘커뮤니티 표준’이라 통고하고, 글쓰기를 제한했다. 강한새씨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전라도 혐오 게시물, 이성애자 남성의 노출과 성적 판타지 콘텐츠에 대해서는 별 문제 삼지 않아온 페이스북의 차별적 처사”라고 항의했다. “중요한 것은 가슴(Chest, Breast)이 아니라, 가슴(Heart) 그리고 그 가슴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가 퀴어 퍼레이드에서 들었던 손팻말의 문구에는 노출의 이유가 담겨 있다. 지구촌의 퀴어들은 여전히 행진할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된 다음날, 터키 이스탄불의 퀴어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경찰의 물대포와 곤봉 세례를 당했다. 임보라 목사는 “벌써 내년 퀴어 퍼레이드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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