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6월. 그런데도 햇볕이 따갑다. 팔에 손을 갖다 대보니 뜨듯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다. 하아, 그런데 아직 6월이다. 여름은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석 달 넘게 남았다. 혹서가 더 두려운 사람들이 있다. 옥탑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옥탑방에 터 잡은 지 1년6개월을 넘긴 주영민씨는 해가 길어지는 만큼 여름을 걱정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 5월 중순부터 “이 여름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푸념하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트느라 들어갔던 전기세가 눈앞을 스쳤다. 주씨의 옥탑방 생활에 낭만이 넘치기는커녕 지옥과도 같은 열만 들끓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참으로 간단하고 지혜롭게 혹서를 이겨낼 방법이 있었다. 왜 이 생각을 이제까지 못했던 걸까? 그 답은 바로 옥탑방 위를 ‘흰색’으로 칠하기다. 초등학교 ‘자연’ 시간에 배웠던 경험들 있을 거다. 흰색은 빛을 대부분 반사해, 그만큼 열을 덜 흡수한다는 간단한 원리. 우리는 이 원리가 시험에 나올 것만 생각하고 달달 외웠을 뿐 어디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던 거다.
아! 그 간단한 원리를 옥상에옥탑방 생활자의 여름철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이 유용한 아이디어를 접목한 캠페인 ‘화이트루프 프로젝트’가 시작된 곳은 2010년 미국 뉴욕이다. 화려한 도시의 뒤편, 아니 꼭대기에는 처참한 현실이 있었다. 오래된 벽돌 건물의 맨 꼭대기층에 사는 저소득층 노인들이 폭염에 사망하는 일이 늘자,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나온 게 ‘화이트루프 프로젝트’다. 이 캠페인이 시작된 뒤 뉴욕에서만 80여 개 빌딩의 옥상이 하얗게 변했다. 전세계 40여 개 도시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국내에선 2014년 여름 첫걸음을 내디뎠다.
국내에 화이트루프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는 곳은 ‘십년후연구소’. 말 그대로 10년 후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곳이다. 화이트루프 프로젝트는 주거 빈곤층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도시의 열섬 현상과 냉방에 쓰이는 에너지와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는 십년후연구소와 궁합이 딱 맞는 프로젝트인 셈이다.
다만, 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몇몇만 공유해서는 도시의 열섬 현상 감소와 에너지 절약에 큰 도움이 될 리 없다. 그래서 6월21일 오후 5시 서울 동대문 신발도매상가 6층 동대문 옥상 파라다이스에서 화이트루프 프로젝트를 알리고, 경험할 수 있는 자리 ‘굿바이, 나의 더위-하지파티’가 열렸다.
한쪽엔 초록색·회색·흰색의 타일이 나란히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손을 대본다. 오후 5시, 중천에 뜬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지만 타일의 온도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초록색 타일은 미지근한 열이 남아 있고, 흰색 타일은 차가웠다. 참가자들이 화이트루프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게 주최 쪽이 마련한 것이다.
십년후연구소 프로젝트 매니저와 서울에너지설계사로 일하는 하연선씨는 간단하게 화이트루프 프로젝트를 소개하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참가자들 앞에 늘어놓았다. 동대문 옥상 파라다이스의 옥탑방 ‘로보탑’(로봇 얼굴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의 옥상을 칠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당연히 페인트통도 등장했다. 그런데 이 페인트가 또 특별하다. 노루페인트가 4년 전에 개발한 페인트 ‘에너지 세이버’가 쓰인다. 이 페인트는 태양광선 중 50%를 차지하는 적외선을 효과적으로 반사해 건물 외벽의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에너지 절감형 페인트다. 개발은 한참 전에 됐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던 제품이 뒤늦게 빛을 발하는 중이다.
이날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은 실제 옥상을 흰색으로 칠해볼 수 있었다. 시너 등을 페인트에 섞어 써야 했기에 모두 방독 마스크를 착용했고, 몇몇은 방진복까지 갖춰 입었다. 로보탑의 머리 위 옥상으로 참가자들은 사다리를 타고 성큼성큼 올랐다. 옥상에 올라서자마자 잠시 ‘휘청’한다. 난간마저 없는 옥상이었기 때문이다. 7~8평 남짓한 옥상에 페인트칠을 하고자 의욕적으로 나선 참가자들이 네댓 명 오르자, 혹시 무너질까 잠시 걱정이 됐다. 참가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쓱싹쓱싹 용감하게 흰색 페인트칠을 했다. 여럿이 힘을 모으니 1시간 남짓의 시간에 칠을 모두 마쳤다.
동대문 문화·역사 등의 자료와 자원을 수집해 로보탑에서 파티나 경매,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는 동대문 옥상 파라다이스의 구성원인 이지연씨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기대를 품는다. “친환경적 생활을 추구하다보니 에어컨 없이 지난여름을 지냈다. 그나마 바람이 잘 통해서 2~3명 정도 모여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다. 페인트칠하기 전에 방수 작업도 해서 비가 오면 생기던 누전 문제도 해결될 것 같다.”
지붕 온도 43.9℃에서 28.8℃로 뚝
실제 효과는 어떨까? 지난 6월7일 서울 동교동 한 건물의 옥탑방. 이곳에 인디 음악계에서 최근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피해의식’의 기타리스트 손경호씨가 산다. 그가 옥탑방 생활을 한 지는 5년이 됐다. 그는 지인에게 화이트루프 캠페인을 소개받고 십년후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옥탑방의 옥상을 흰빛으로 칠했다.
“시공하고 난 다음에 느껴지는 차이가 엄청나다”라고 손경호씨는 말했다. “옥탑방에 사는 사람들은 날씨가 더워지면 천장을 만져본다. 한여름에는 해가 지고 나서도 천장이 뜨겁다. 그런데 지금은 해가 떠 있을 때도 뜨겁지 않다.” 십년후연구소가 실제 손씨의 집 온도를 측정해본 결과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확실하다. 화이트루프 시공 전 옥탑의 지붕 표면 온도는 43.9℃였는데 시공 뒤에는 28.8℃로 뚝 떨어졌다. 천장의 표면 온도는 35.4℃에서 27.8℃, 방 안 온도는 29.8℃에서 27.9℃로 떨어졌다. 손경호씨는 “여름이 되면 에어컨을 켜는 건 필수였는데, 이제는 예전보다 덜 튼다. 효과를 이렇게 느껴보니 정말 효율적인 방법이라 여겨져 주변 옥탑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이트루프 캠페인을 강력 추천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시공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있다. 무엇보다 집주인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전기세는 집주인이 내지 않는다. 세입자가 내면 그만이다. 그래서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옥탑방 지붕이나 옥상에 화이트루프 시공을 하려는 마음을 잘 먹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화이트루프 시공이 절실한 세입자가 제 돈을 들여 시공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결국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한 저소득층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특히 서울에서는 청년의 주거 빈곤이 심각한 실정이다. 서울시가 민달팽이유니온 등의 단체에 조사를 의뢰해 지난 4월 공개한 자료를 보면, 서울의 주거 빈곤 청년(만 19~34살)은 2010년 기준으로 52만3천여 명으로 전체 청년 인구의 22.9%를 차지한다. 5명 중 1명이 주택법이 규정한 최저 주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옥탑방이나 고시원 등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몰린 수많은 청년들 가운데 그나마 옥탑방 거주 청년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다.
서울시에선 시공 자금 저리에 빌려주기도십년후연구소와 서울시가 올가을 옥탑방 세입자 청년들을 대상으로 화이트루프 쿨시티 시공을 지원한다. 8월까지 신청을 받아 9월에 시공한다. 서울시가 정책적으로 펼치고 있는 화이트루프 프로젝트, 서울형 쿨루프 ‘옥상흰빛’ 사업도 눈여겨보자. 서울시 원전하나줄이기 정보센터와 십년후연구소에 연락하면 ‘찾아가는 에너지 컨설팅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이 서비스를 신청하면 서울에너지설계사가 에너지 절감 방법과 신재생에너지 정보, 정책자금 지원 등에 대해 상담해준다. 올해부터는 ‘옥상흰빛’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도 낮은 금리로 빌릴 수 있게 됐다. 지옥열 옥탑방이 아닌 낭만 옥탑방으로의 탈바꿈, 멀지 않은 데 답이 있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겨울에 더 춥지 않나?
겨울에 온도가 더 낮아지는 건 사실이다. 다만, 겨울은 여름보다 일조 시간이 짧고 태양의 고도가 낮아 비교적 열 손실이 크지 않다. 흰색 옥상은 여름철 검은색 옥상보다 온도가 19℃ 낮아지지만, 겨울에는 3~9℃가량 떨어진다. 따라서 흰색 옥상이 에너지 효율에는 더 이롭다고 볼 수 있다.
화이트루프 시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옥상 방수 공사를 함께 해야 한다면 시공업체에 마감 페인트의 색깔만 따로 ‘흰색’으로 정해주면 된다. 옥상 방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샌드위치 패널이나 슬레이트 지붕인 경우, 직접 페인트를 사서 바르기면 하면 된다. 시공은 비가 자주 오지 않는 봄이나 가을에 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직접 시공할 경우 안전과 부실 시공 문제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비용은 얼마나 드나?
페인트만 칠하면 되는 경우 3.3m²당 6천원 정도 든다. 에너지 절감을 위한 화이트루프용 페인트는 일반 제품에 견줘 다소 비싼 편이다. 그러나 에너지 절감으로 얻는 이득을 고려하면 효율 높은 투자라고 볼 수 있다.
전기세를 얼마나 아낄 수 있을까?
아직까지 국내에는 화이트루프를 시공한 곳이 많지 않아 절약한 전기세 규모를 추산하기는 어렵다. 다만 미국 뉴욕의 화이트루프 프로젝트 재단이 제공한 자료를 보면, 검정색 타르가 칠해진 옥상을 화이트루프로 바꾸면 전기세의 40%를 절감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건물의 에어컨 가동을 20%까지 줄일 수 있다는 결과도 있다.
왜 친환경적인가?
도시가 뜨거워져 발생하는 스모그를 감소시킬 수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분지에 있는 건물의 옥상과 도로를 밝은 색으로 칠하고 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었더니 스모그가 10%가량 감소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이는 길거리에서 300만~500만 대의 차량이 사라진 것과 같은 효과를 뜻한다고 한다.
자료: 십년후연구소의 화이트루프 프로젝트 블로그
미국 화이트루프 프로젝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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