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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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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쓴 10쪽짜리 판결문 “불법체류자도 노조 설립 가능”

6월25일 대법원 ‘최장기 미제 사건’ 해결, 외국에 준하는 판결 내리면서 “주로 정치운동을 하면” ‘한국적’ 단서 달아… 노동계 “당연한 판결 너무 늦었다”
등록 2015-07-01 08:10 수정 2020-05-02 19:28
6월2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이날 나온 ‘불법체류 근로자도 노조 설립 가능하다’는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6월2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이날 나온 ‘불법체류 근로자도 노조 설립 가능하다’는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 근로자도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가입할 수 있다.”

대법원이 6월25일 ‘최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했다. 심리를 개시한 지 8년 만이다. 판결문은 고작 10쪽짜리였다. 원고·피고의 이름과 주소, 대법관 13명의 이름과 서명을 제외하면 판결 내용은 7쪽도 안 된다. A4용지 1쪽을 쓰는 데 1년이 더 걸린 셈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대법원이 8년 동안 고심한 흔적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며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소송이 시작된 10년 전으로 되돌아가보자.

2005년 조합원 등록번호 요구한 노동청

2005년 4월24일 서울·경기·인천에 살던 외국인 노동자 91명은 지역별 노동조합인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조(이주노조) 창립총회를 열고 서울지방노동청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서울노동청은 외국인등록번호 또는 여권번호가 기재된 조합원 명부를 요구했다. 노조원 중 일부가 불법체류자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말이다. 체류 자격이 없는 외국인은 근로자가 아니며, 따라서 노조도 설립할 수 없다는 해석이 깔려 있었다.

이주노조는 조합원 명부 제출이 노조법상 설립 신고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노동청은 같은 해 6월3일 보완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주노조의 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이주노조는 이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다. ‘10년 법정싸움’의 출발점이었다.

1심은 8개월 만에 노동청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이태종)는 2006년 2월7일 “불법체류 외국인은 출입국관리법상 취업이 엄격히 금지돼 있어 노조 가입이 허용되는 근로자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주노조가 불법체류 외국인을 주된 구성원으로 하고 있는지 노동청이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조합원 명부 제출을 거부한 이주노조의 설립신고서를 반려한 처분은 정당하다”고 했다.

1년이 지난 2007년 2월1일 항소심은 이를 뒤집었다. 서울고법 특별11부(재판장 김수형)는 헌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근로기준법 등을 판단의 근거로 내세웠다. 첫째, 노조법 제2조 1항은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급료 등 수입에 의해 생활하는 자’로 규정한다. 둘째, 헌법 제33조 1항은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노동3권)을 규정하며 이는 법률로 제한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한다고 명시한다. 셋째, 헌법 제6조는 ‘외국인 지위를 보장한다’고, 근로기준법 제5조는 ‘국적에 따른 근로조건의 차별대우를 금지한다’고, 노조법 제9조는 ‘조합원에 대해 인종 등에 의한 차별대우를 금지한다’고 돼 있다. 항소심은 “불법체류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현실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면서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해 생활하는 이상 노조를 설립할 수 있는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양창수 대법관 체제 아래 6년간 묵혀

엇갈린 판결을 대법원이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8년간 대법원은 변론을 열지도 않고 선고를 미뤘다. 그사이 주심 대법관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김황식 전 대법관은 감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양창수 전 대법관은 6년간 내팽개쳐놓았다. 서울대 교수 출신인 양 전 대법관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론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에는 그렇게 ‘지연 전술’을 펴왔다.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도 그랬다. 강씨의 암투병 사실이 알려져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3년 만에 마지못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주노조 사건은 끝까지 심리하지 않고 2014년 9월 퇴임했다. 그는 현재 한양대 석좌교수다. 양 전 대법관의 후임인 권순일 대법관이 세 번째 주심을 맞으며 본격 심리가 시작됐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이 사건을 심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6월25일 최종 판결이 나왔다.

결론은 항소심과 같았다. 대법원은 “근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 등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은 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 외국인이나 취업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근로자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도 노조를 결성하거나 가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피고 노동청은 ‘취업 자격 없이 취업한 외국인은 강제 퇴거 및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출입국관리법 등을 근거로 “불법체류자에게는 근로자 자격과 노조 가입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법령은 취업 자격이 없는 외국인을 고용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려는 것일 뿐, 외국인의 노조법상 권리까지 금지하려는 취지가 아니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대법원은 보도자료를 내어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의 사례를 확인한 결과, 불법체류 외국인의 취업이나 고용을 제한하더라도 노조 활동 등 근로자의 권리는 최대한 보장하는 게 국제적 기준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은 항소심에 없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노조 결성이 허용된다고 해서 취업 자격이 주어지거나 국내 체류가 합법화되는 게 아니다.” 불법체류 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과 고용 문제는 별개라는 점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게다가 불법체류 노동자의 노조 설립을 노동청이 허가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도 친절히 설명했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조직하려는 단체가 ‘주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로 볼 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행정관청은 실질적 심사를 거쳐 설립신고서를 반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조 설립 신고를 마치고 신고증을 교부받았더라도 이러한 단체는 적법한 노조로 인정받지 못함은 물론이다.” 이주노조가 근로조건 개선을 넘어 정부 정책 개선을 요구하면 가차 없이 칼날을 들이대라는 ‘지침’인 셈이다.

초대~6대 위원장 강제추방, 불법노조 탄압

노동계는 “당연한 판결이 너무 늦게 나왔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 대법정에서 선고를 지켜본 이주노동자 20여 명은 감격했다. “한국에서 그동안 쫓기면서 살아왔는데 오늘 판결이 이주노동자들의 어깨를 펼 수 있게 했다.” 실제로 대법원이 8년이나 사건을 뭉개는 동안 이주노조는 심한 고초를 겪었다. 처음 소송을 제기한 초대 이주노조 위원장부터 6대 위원장까지 모두 강제추방을 당하거나 사실상 추방당했다. 노조 설립을 허가해야 한다는 항소심 판결을 받아들고도 8년째 ‘불법노조’로 탄압받은 것이다. 지금은 합법체류자 신분인 우다야 라이(네팔)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출범 당시 91명이던 조합원 수는 1100명까지 늘었다.

대법원은 ‘직무유기’라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외국인의 체류나 고용을 둘러싼 분쟁의 증감, 외국인 근로자의 범죄율, 정부의 강제퇴거 조치 현황, 국민의 의식 변화 등에 주목했다. 다양한 의견 수렴을 거친 끝에 시대적 변화에 맞춰 판단했다.” 헌법이 보장한 ‘법관의 독립성’은 사라졌다는, 대법원이 정부 등 이해관계자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자기 고백과 다를 바 없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돼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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