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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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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등록 2015-06-20 21:10 수정 2020-05-03 04:28
*이 글은 사상 처음으로 매거진 발행 이전에 인터넷과 SNS에 공개되는 ‘만리재에서’ 칼럼이다. 20일부터 판매될 제1067호 ‘만리재에서’는 이를 압축해 실을 것이다._편집자

지난 6월14일 일요일, 활엽수가 찬란하던 날, 한겨레신문사 공채 2차 시험이 있었다. 나는 감독관이었다. 기자 지망생들은 머리를 시험지에 박고 반나절을 보냈다. 그들은 ‘음모론’을 논하라는 논술과 ‘나무’를 제시어 삼으라는 작문을 써냈다.

그들 앞에서 마음이 아팠다. 가난한 이들의 거친 노동을 취재할 때보다 숨죽여 시험 치르는 기자 지망생들의 섬세한 고역을 목도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 역시 노동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인생의 단계를 밟았다. 수험생들에게 감정이입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입사 시험은 결국 흉기다. 열 가운데 하나를 뽑는 경쟁에서 시험은 아홉을 쳐내는 칼이다. 아무리 잘 치러도 나보다 잘 치른 사람이 있으면 패배한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기자 지망생들은 쉼없이 흔들린다.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심한다. 이런 상황을 주조한 기성을 증오한다. 증오하면서도 동경한다. 기성에 진입하고 싶지만, 지뢰를 둘러쳐놓은 기성을 저주한다.

 

기자 지망생의 발목을 붙든 악순환의 고리

그런 기자 지망생들을 떠올리며 은 제1064호에서 저널리즘 없는 저널리스트의 탄생 기사를 21쪽에 걸쳐 보도했다. 시민·기자·학자 등으로부터 격려와 응원과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일부 기자 지망생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특히 기사의 마지막 대목, ‘저널리즘스쿨 추천을 받아 교육연수생(옛 인턴)을 뽑겠다’는 대목에 많이 실망한 듯했다. 이미 많은 것을 준비했는데, 더 무엇을 준비하란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널리즘 없는 저널리스트의 탄생’에서 우리는 한국 언론의 문제를 짚었고, 한국 (기성) 기자들의 자질을 문제 삼았고, 그 집단의 충원 과정을 분석했고, 여기에 맞춘 소모적이고 무용한 언론사 입사 준비 과정을 살폈고, 이런 사태를 방관하는 언론학계의 교육 체제를 짚었고, 이를 돕겠다는 언론사 인턴 제도의 변질을 비판했고, 그렇게 입사한 뒤 벌어지는 언론사별 도제식 교육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른바 ‘기레기’를 낳는 악순환 구조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 고리가 기자 지망생들의 목을 조이고 발목을 붙들고 있다. 이제 누가 이 고리의 어느 대목에 칼을 밀어넣어 싹둑 잘라버릴 것인가. 각자 뛰어봐야 결국 극소수만 살아남을 것이니, 기자를 꿈꿀 정도로 지혜로운 이들이라면 이 체제 자체를 뒤엎는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왕에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낼 작정이라면, ‘핵심 고리’를 집중 공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노역’이 아닌 ‘교육’에 초점을 둔 교육연수생 제도를 제시했고, 일반 공모에 더해 저널리즘스쿨 추천자도 여기에 포함시키겠다고 했다. 이것이 왜 악순환을 끊어낼 ‘핵심 고리’인지 이 글의 뒤에서 설명하겠다.

누군가 지적했다. 채용 과정이 아니라 채용 뒤 언론사별 교육 문제가 더 근본적인 것 아닌가. 이른바 ‘사스마와리’ 체제가 더 문제 아닌가. 그것을 개혁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 아닌가.

단기간에 사건 취재를 집중 경험시키는 현행 ‘수습기자 교육’이 이렇듯 오랫동안 유지된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1997년 11월3일, 기자가 됐다. ‘바이라인’이 달린 첫 기사는 1998년 2월13일에 썼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철회했다는, 780자짜리 기사였다. 출근 석 달 만에 수만 대중 앞에 내놓는 기사를 쓴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기사 대부분은 내가 쓰지 않았다. 수습기자의 보고를 받은 선배 기자가 작성한 기사였다.

나는 언론학을 전공하지도 혼자 공부하지도 않았다. 논술과 작문과 상식과 영어 시험을 치르고 신문사에 들어왔을 뿐이다. 언론이 세상을 흔들 수 있다면, 그것은 기사의 무게 때문이다. 작지만 예민하여 휘발성 높은 것을 무수히 촘촘히 잘 배열해야 기사의 무게가 형성된다. 좋은 기사는 좋은 (저널리스트라는 이름의) 장인만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엄청난 일을 입사 석 달 된 기자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 불가능을 실현시키려고 선배 기자들은 나의 취재와 보도 일체를 사실상 조종했다.

대외적으로는 독자적 판단 능력을 갖춘 엄연한 ‘기자’이지만, 실제로는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생’에 불과한 상황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 한국 언론은 인격과 인권을 유보시키는 수습기자 교육 체제를 여전히 운용하고 있다. 그 과정을 거쳐도 신입 기자가 취재·보도를 혼자 온전히 감당하기까지 대략 2~3년이 걸린다.

 

혁신이 누적된 끝에 등장할 ‘입사 후 교육’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은 신입 기자가 ‘공적 책임을 지는’ 취재와 보도를 하지 않고 그 훈련과 교육에만 매진하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전혀 배운 바 없는) 저널리즘의 기본과 이론과 실무를 착실히 익히는 데 집중하면 된다. 이것이 ‘입사 후 기자 교육’의 바람직한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용이 든다. 매년 5~8명의 신입 기자를 채용한다면, 1~3년차인 10~30명의 기자가 취재·보도에 기여하지 못한 상태로 정규 임금을 받으며 ‘공부만’ 해야 한다. 현재 중앙 언론사의 기자 인력은 200명 안팎이다. 전체 인력 규모의 10~15%를 뉴스 생산에 투입하지 않아도 좋은 언론사는 한국에 없다. 그 정도의 비용을 감당하려면 어지간한 수익을 내는 것으로는 부족한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 언론 시장은 과점·과열 상태에서 수익이 악화되고 있다.

수익이 개선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돈 주고 봐야 한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총체적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물론 기성 언론의 수준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돈까지 지불하며 기사를 보겠다는 사람이 희귀하다. 그래서 있는 기자를 내보내거나, 내보낼 기자가 없으니 새로 뽑지 않는다. 이런 판국에 신입 기자를 채용했다면 즉시 현장에 투입해 ‘산출’을 끌어내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안 그럴 도리가 없다. 따라서 최단기간에 관습적 기사 생산의 컨베이어 벨트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현행 수습기자 교육의 핵심이다.

그러니 이 대목은 악순환 고리 가운데 가장 완강하다. 좋은 언론사가 좋은 결단을 내린다 한들, 입사 후 저널리즘 교육을 체계화한들, 그 결심을 지탱할 자본이 없는 한 유지할 방법이 없다. 채용 과정보다 채용 이후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은 백번 옳지만, 그런 식으로 기자 집단의 자질 향상을 꾀하는 일은 여러 혁신이 누적된 끝에 등장하는 ‘결과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누군가 지적했다. 저널리즘스쿨을 확대하고 그 졸업자를 기자 채용과 연계하는 것은 오히려 비용을 높여 (로스쿨이 그런 것처럼) 부유층에게만 유리한 방식 아닌가.

한국연구재단에 등재된 ‘신문방송학’ 관련 학술지 가운데 (광고·홍보 등을 제외한) 저널리즘 관련성이 높은 학술지는 모두 12개다. 이들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 가운데 ‘기자 전문성 제고’ ‘언론학 교육 개편’ 등을 주제 삼은 논문은 7~8편 정도다. 이들 대부분이 영미식 저널리즘스쿨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학술지가 1990~2014년 게재한 총 논문은 5천여 편에 이른다. 지난 25년 동안 언론학자들이 발표한 논문 5천 편 가운데 언론학 교육 체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자의 자질을 높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전문가 모두가 저널리즘스쿨을 핵심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이를 담당할 언론학자의 대다수는 실제로는 여기에 큰 흥미가 없다. 사회학·심리학·정치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외국에서 익히고 돌아온 교수들이 사회과학적 가설 검증에 몰두하는 바람에 언론의 현실은 더 이상 언론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아니다. 법학을 공부하면 법전을 읽으며 판례를 익히고, 의학을 공부하면 의학서를 읽으며 치료를 실습하지만, 언론학 전공생은 신문을 보지 않아도 기사를 써보지 않아도 졸업장을 받는다.

 

공채 시험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따라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과 이화여대 부설 프런티어저널리즘스쿨 등은 학계에서도 사실상 극소수의 비주류, 마이너리티에 불과하다. 만일 어느 대학이 인문사회과학적 소양 교육과 더불어 저널리즘의 이론과 실무를 가르치는 교육과정을 개설한다면(그것이 대학원이 아니라 학부 과정이라 해도), 여기에 언론사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그 교육과정을 지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오직 이 방식을 통해서만 더 많은 대학이 저널리즘 교육에 신경을 쓰고, 그 교육을 받은 이들이 늘어나서 더 많은 좋은 기자가 탄생할 수 있다. 이런 스쿨이 (로스쿨처럼) 교육 비용을 높일 것이라는 우려는 타당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무정형하며 비효율적인 동시에 몰가치적인 언론사 공채 시험 준비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저널리즘스쿨의 입학 경쟁과 등록금이 오히려 덜 소모적일 것이다.

더 중요한 대목이 있다. 그런 길을 따라 밟는 대학이 늘어난다 해도, 저널리즘스쿨이 ‘필수 코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로스쿨과 저널리즘스쿨의 결정적 차이는 ‘자격증’에 있다. 저널리즘스쿨을 졸업한다 해도 기자 자격증이 발급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언론 역시 저널리즘스쿨 졸업생만 기자로 선발하는 게 아니다.  

상당수 서구 국가에서 기자가 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진입 장벽이 낮아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는) 작은 언론사에서 일하며 좋은 기사를 쓰고 이를 발판 삼아 점차 큰 언론사로 옮겨간다. (따라서 대형 언론사가 초년 기자를 바로 채용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둘째, 저널리즘스쿨에서 이론과 실무를 겸한 교육을 받아 이를 보증 삼아 중견 이상의 언론사에 취업한다. 여기에는 군소 언론사 출신 기자들의 재교육도 포함된다.

셋째, 그런 비용을 치르기 싫으므로 그냥 혼자 프리랜서로 일하며 여러 언론사에 기사를 보내다가, 그 경력을 바탕으로 중견 이상의 언론사에 취업한다. (아니면 평생 프리랜서로 지내며 자유롭게 좋은 기사를 보도한다.)

최근에는 네 번째 경로가 생겼다. 그냥 스스로 언론사를 차린다. 공학 전공자들이 ‘스타트업’을 만들듯이, 1970년대 해직기자들이 를 만들고, 2000년대 해직기자들이 를 만들었듯이, 작은 자본 또는 후원을 유치해 자신이 꿈꾸는 대안 언론을 차린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졸업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취재·보도 실력’이다. 민주사회에선 말 그대로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좋은 기자’가 되려면 준비와 단련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각자 형편에 맞게 치러내기만 한다면, 그 실력을 보고 채용하는 것이 서구 언론사의 기자 선발 방식이다.

여기서 저널리즘스쿨은 일종의 ‘규준’ 역할을 한다. 기자라면 응당 갖춰야 할 기본이 무엇인지를 기자 지망생, 경력 기자, 언론사 등에 확산시키는 진앙지 구실을 한다. 한국에 저널리즘스쿨이 필요한 이유는 어느 언론사도 언론의 규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대학 역시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저널리즘의 근본과 현실을 깊이 고민하고 탐색하며 실천에 옮길 ‘중추 기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규준이 있어야 뭘 준비할지, 무엇을 보고 채용할지 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높일 수 있다. 그래야 기자 지망생들의 불안과 초조도 다독일 수 있다.

 

기자의 완전한 자유노동 시장에서만? 

명확하게 지적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머리 좋은 기자 지망생들은 알아차렸겠지만, 공무원 시험 방식을 흉내 내는 언론사 공채 제도의 진정한 대안은 연중 상시 개별 채용이다. 그런데 이 역시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연중 상시 개별 채용이 가능하려면 채용 시장의 개방성과 탄력성이 높아야 한다. 즉, 채용은 물론 퇴출이 자유로워야 한다. (나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영미 언론 모델의 좋은 점을 국내에 소개하지만, 그것은 주로 그들의 산출인 기사에 대한 것이다. 그런 기사가 등장하는 배경에는 거의 완전한 (기자직군의) 자유노동 시장이 있다.

기자 지망자들은 자신의 이력과 실력을 바탕으로 개별적으로 구직 활동을 벌인다. 언론사는 이들의 능력을 검토해 채용하되, 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므로 낮은 수준의 연봉계약직으로 채용한다. 이후 검증을 거쳐 해고하거나 임금을 동결해 낮은 연봉으로 계약을 연장하거나, 높은 연봉의 ‘스타 기자’로 대접한다. 그래서 영미권 국가의 기자들 대다수는 돈을 그다지 잘 벌지 못한다.

그런 방식이 비교적 무난하게 작동하는 이유가 있다. 영미권 기자들은 언론사에 목숨 걸지 않는다. 프리랜서를 하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기사를 써서 대중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비록 낮은 연봉의 무명 기자이지만, 심층 탐사취재를 통해 실력을 입증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유명 언론사에서 ‘스타 기자’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설혹 언론사에 채용되지 않더라도 출판과 강연 등을 통해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다).

‘기자들의 자유 경쟁’은 좋은 언론을 낳는 바탕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자가 경쟁하면 사회의 공적 토대가 높아진다. 좋은 기사를 향한 자유로운 기자들의 경쟁은 시민의 관점으로 권력을 감시하고 구조적 모순을 폭로해 민주주의 사회의 체질을 개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만 나는 언론사의 자유 경쟁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시장논리에만 언론기업을 내맡기면 극소수의 거대언론사만 살아남고, 이는 언론 다양성을 결정적으로 제한한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뜻있는 대안 언론을 각종 재단이 부조하는 ‘사회적 후원 모델’이 각광받고 있다. 기자들의 자유경쟁이 가능해지려면, 그들의 다양한 둥지가 더 많아져야 하고, 이를 지킬 수 있는 공적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영미 언론의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업 언론, 선정 언론의 폐해가 한국보다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론과 관련해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미 국가에 있다. 전세계 방송인의 규준은 여전히 영국의 〈BBC〉이고, 전세계 언론인의 이상향은 언제나 미국의 또는 영국의 이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입사 직후 상당 기간 동안 신분이 불안정한 비정규 계약직으로 지내고, 기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고, 그래도 큰 상관 없이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기회가 된다면 이 언론사에서 저 언론사로 옮겨다니는 일이 가능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선 좋은 취재 결과를 책으로 내어 살아갈 만한 출판 시장이 없다. 언론사 간 이직이 자유로워지기엔 매체 간 (이념적·관습적) 장벽이 너무도 높고 두껍다. 비정규직 기자 또는 프리랜서 신분을 무작정 인내하기에는, 그렇게 살면서 좋은 기자로 활약한 전례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좋은 기자를 가려 뽑고 무능한 기자(무능한 기자는 사회의 암적 존재다)를 내치는 일관되고 합리적이며 엄정하여 존중받을 수 있는 잣대를 가진 언론사 최고 간부가 부족하다.

 

채용 규모 늘리기 위해서도 자질 해결해야

이런 대목을 파고드는 기자 지망생들의 비판은 듣지 못했다. 그랬던 이유가 있다고 짐작한다. 기자 지망생들의 마음속에는 지금 ‘저널리즘의 규준’이 아니라 ‘채용 규모’의 문제가 더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사의 채용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기자 집단의 자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영미 언론의 진정한 핵심은 실력을 갖춘 이를 검증해 선발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좋은 언론’을 만들어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수익 구조를 만들고, 뒤이어 더 많은 인재를 채용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궤도를 만들지 못하면, 한국 언론사들의 채용 규모는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고, 기자가 되는 길은 더욱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불가해한 방식으로 퇴행할 것이다.

지금 갈급한 문제는 ‘기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실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언론의 규준이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규준에 입각해 이론과 실무를 겸한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자 이력 20년차가 되어도 써볼까 말까 한 사설(논술 시험)과 칼럼(작문 시험)을 시험문제로 내고, 현직 기자들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 난해한 상식 시험을 출제하며, 어차피 꾸며내고 지어낸 것을 서로가 알고 있는 자기소개서 등으로 걸러내, ‘명민하고 끈질긴 대학생’을 선발하는 데서 그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처럼 딱 정해진 과목별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니 기자 지망생으로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데, 그마저도 채용 규모가 줄어들고 있으니 분통만 터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당신, 기자를 꿈꾸며 노심초사하며 기성을 동경하지만 또한 저주하는 기자 지망생이 바로 핵심 고리다. 완강한 악순환 고리 가운데 가장 여리고 약한 매듭이자, 좋은 언론의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가장 질기고 강한 매듭이다. 기성 체제의 혁신은 그 내부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새로운 체제의 출발은 관습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언론의 위기 역시 신문·방송의 내부가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라는 외부 환경에서 기인했다. 이제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유형의 기자 집단이 등장해 구 체제를 혁신해야 한다. 그 적임자는 바로 당신이다.

그저 취업을 꿈꾸는 이에게 은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 기성 언론 스스로 좋은 제도를 만들어 좋은 기자를 체계적으로 선발하는 일은 당분간 요원하다. 운 좋게 언론사에 입사한다 해도, 당신은 그런 기성 체제로부터 조종당하고 훈련되어 진영으로 갈린 기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만일 ‘좋은 기자’가 되는 꿈을 꾼다면, 그 길 걷는 일을 미력이나마 우리가 도울 수 있다. 저널리즘을 깊이 공부하고 고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면 조금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런 기자 지망생이 많아지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첫째, 채용 규모의 확대가 아니라 채용 과정의 일관되고 합리적인 잣대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전개될 수 있다. 기왕의 입사 노하우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기자 지망생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언론 개혁 운동’이 벌어질 수 있다. 기성의 완강한 체제는 오직 ‘운동’을 통해서만 혁파할 수 있는데, 그 운동의 중심에는 바로 당신이 있다.

둘째, 기자가 되고 난 다음에도 기성 체제에 조종당하지 않고, 이를 내부에서 혁신하는 주역이 될 수 있다. 기성은 기득권과 연결돼 있다. 현직 기자의 대부분은, 분명 고뇌하고 있긴 하지만, 관성적 취재 방식에 더 익숙하다.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바로 그들의 턱밑에서 이제 막 기자가 된 신참인 당신은 새로운 방식의 언론을 선보이는 ‘내부 혁신자’가 될 수 있다. 입사 전부터 미리 준비하고 각오해야 가능한 일이다.

셋째, 기성 언론을 언론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제1064호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중심으로 등장한 프리랜서 기자들을 집중 소개한 것은 바로 그들이 기성 언론의 기자보다 더 열정적인 언론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당신의 길이 아니겠는가.

넷째, 이 모든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해도, 저널리즘의 규준과 원칙을 깊이 고민하는 공부는 현행 공채 제도의 주요 과목을 대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당신의 가장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라도 저널리즘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문제는 1~2년 안에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기자들을 비롯해, 한겨레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최근 공동성명을 통해 공채 과정의 실습 평가 문제를 지적해 이를 일부 변경시켰다. 한국 어느 언론사 기자들이 최고 경영진이 판단해 공표한 기자 채용 절차에 개입할 수 있겠는가. 오직 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하다. 이 문제는 1~2년 안에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사의 채용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민주주의 방식으로 대표이사와 편집 책임자를 뽑는 이 조직 안에서 상당한 논란과 시간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 일부인 이 독자적으로 결정내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엉뚱하게도 우리는 문제를 더 넓게 보았다. 한겨레신문사가 아니라 한국 언론계 전체를 감히 고민하고 싶었다. 저널리즘 교육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우리도 거들고 싶었다.

그래서 여름·겨울 방학에만 운용했던 교육연수생 제도를 연중 상시 제도로 바꾼 것이다.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을 과거보다 3~4배 늘린 것이다. 그 가운데 저널리즘스쿨 추천자가 절반 정도이니 그 구분까지 없애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것은 과도할뿐더러 위험한 지적이다.

단순 산술 계산만 해봐도 일반 학생들의 기회가 2배 이상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몫은 장기적으로 더 많은 저널리즘 교육 기회를 확산시키려는 일종의 투자다.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소수의 저널리즘스쿨과 연계하면, 이런 일에 긴장하여 다른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저널리즘 교육기관을 개설하는 일이 생겨나길 꿈꾸고 있다. 그것이 여러 기자 지망생들에게도 더 유익할 것이다. 여러 대학에서 체계적인 저널리즘 교육이 진행된다면, 굳이 언론사를 찾아와 낯선 환경에서 인턴 경험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의 교육연수생 과정은 철저하게 ‘교육’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기성 언론사의 인턴 경험은 기자 채용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자사 인턴 경력에 가산점을 주는 소수의 언론사가 있긴 하지만, 그것을 원한다면 그 언론사에 가서 도모하거나 따질 일이다. 한겨레신문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언론사는 어떤 종류의 인턴 이력에도 가산점을 주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열정 착취’라는 비난이 일었던 것인데, 은 교육연수 과정의 본연의 뜻으로 돌아와, 우리가 현장에서 축적한 규준과 실무를 기자 지망생들과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지적처럼 ‘내 눈의 들보’를 들춰내 고백해야겠다. 기자 지망생들을 위한 여러 사설 교육기관 가운데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각종 강좌가 유명하다. 그 강좌 가운데 ‘작문 강의’를 맡고 있다. 혼란스러운 언론사 공채 제도에 편승해 돈을 벌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다만, 이 강좌 수강생들은 인정해줄 것이라 감히 믿는데, 지금까지 적은 내용을 바로 그 강좌에서 가르치고 있다. 공채 시험의 노하우가 아니라 저널리즘의 이론과 실무, 무엇보다 그 파토스를 전달하겠다는 마음으로 강의하고 있다. 그렇게 얻은 돈으로 기자들에게 술과 밥을 산다. 그렇게 해야 빠듯한 부서비를 아낄 수 있다. 그 부서비를 아껴야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교육연수생들에게 지급할 지원비가 마련된다. 우리는 부자 언론사가 아니고 부자 기자가 아니다. 그래도 좋은 뜻으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고자 한다. 부디 혜량해주길 바란다.

 

인간에겐 혁신의 능력이 있다

나는 몇 년 전, 사회부 24시팀장(사건팀장)을 맡은 바 있다. 당시 공채로 입사한 막내 기자 5명의 교육을 맡았다. 수습 생활 6개월이 끝난 직후, 그 가운데 1명이 사표를 썼다. 다른 부서로 옮겨간 또 다른 기자 1명이 두어 달 뒤, 다시 사표를 썼다. 1년여 뒤에는 또 다른 기자가 사표를 쓰고 다른 언론사로 옮겼다. 그해 입사한 기자 5명 가운데 2명이 지금 에서 일하고 있다.

비록 다른 부서에서 각자 다른 사정으로 다른 길을 떠난 것이겠지만, 그 일의 책임은 최초 교육 담당자인 나에게 있다. 관성적·관습적·반인권적 수습기자 교육을 혁파하지 못한 탓에 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기자의 길을 떠났다. 그와 관련해,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 부풀리는 뒷이야기를 감당하느라 오랫동안 마음이 흔들렸는데, 지금은 괜찮다. 결국 모두 나의 책임이다. 올해 한겨레신문사가 단계를 세분화하고 적성을 세밀히 들여다보는 내용을 뼈대로 공채 제도를 바꾸려 했던 배경의 일부는 나에게 귀책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현행 공채 방식에 대한 의 문제제기는 이율배반일 수 있겠다. 적어도 편집장인 나는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자성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좋은 기자가 되려는 기자 지망생들에게만 살짝 귀띔하자면, 그러나 인생은 흐르고 사람은 진화한다. 근본이 바뀌진 않지만, 세세한 것을 고쳐가는 혁신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 나도 그러한데, 여러분이라고 왜 그러지 못하겠는가. 혁신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통째로 뒤엎겠다는 혁명과 조금씩 계속 끈질기게 바꾸겠다는 혁신은 다르다. 나는 혁명의 신비로움을 불신하고, 혁신의 실제성을 믿는다. 기자와 기자 지망생이 지혜와 힘을 합해 혁신하면, 큰 나무를 기를 수 있다. 당장 열매를 구하기보다 더 큰 나무를 기르는 일을 함께 하고 싶다. 이 나무 아래서 힘들고 지친 자들이 쉬어갈 것이며, 이 나무의 열매를 섭취하여 그들이 다시 힘을 얻을 것다. 우리는 그늘 아래 쉬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그늘을 만드는 사람이다. 기자다. 진짜 기자를 꿈꾸는 이들과 함께 나무를 기르겠다.

추신. 조만간 선발될 의 교육연수생들은 배우고 익힌 바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게 될 것이다. 기자가 연수생에게 가르쳐준 것을 연수생이 독자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저널리즘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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