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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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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그의 치유는 이제 시작이다

24년 만에 대법원에서 ‘자살 방조’ 혐의 무죄판결 받았지만, 간암 등 여전히 고통스러운 삶 진실 규명과 책임자들의 사죄가 트라우마 씻어내는 유일한 방법
등록 2015-05-28 08:58 수정 2020-05-02 19:28
강기훈씨가 24년 만에 ‘유서 대필’의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지난 5월14일 대법원은 1991년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분신했던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구속된 강씨가 ‘유죄’가 아니라 ‘무죄’라고 바로잡는 판결을 내렸다. 24년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강씨는 대법원 재판정에 나오지 않았다. 변호사를 통해 ‘책임자들의 사과’를 촉구하는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최근 그와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과 만나고, 강씨 어머니가 1994년 펴낸 수기집 와 1994~2015년 와 에 실린 강기훈씨 인터뷰 기사 등을 통해 그의 지난 24년을 되짚어봤다. 편집자
2014년 2월 서울고법이 ‘유서 대필’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직후 강기훈씨의 모습. 대법원은 1년 여 뒤에야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기까지 24년이 걸렸다. 박승화 기자

2014년 2월 서울고법이 ‘유서 대필’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직후 강기훈씨의 모습. 대법원은 1년 여 뒤에야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기까지 24년이 걸렸다. 박승화 기자

#1991년 5월

“기훈아, 일어나봐! 누가 또 분신을 했단다.”

어머니는 아들을 깨웠다. 어버이날인 5월8일 아침 9시45분. 전날 밤, 어머니 머리맡에 부스럭대며 카네이션을 갖다놓은 아들은 늦잠을 자고 있었다. 아들은 눈을 비비며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때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아들이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밥은 먹고 나가야지.” “우리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죽었대요!” 그는 숟가락을 놓고는 뛰쳐나갔다.

억울한 누명, 지옥의 시작

해끔한 얼굴의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 그의 잔인한 5월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뒤 무려 24년 동안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분노 속에” 살아야 했고, 견뎌내야 했다.

1991년 봄, 붉은 꽃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시위 도중에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4월26일 숨진 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등 대학생들의 분신이 며칠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강기훈씨와 함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일했던 김기설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김씨는 5월8일 새벽 서강대 옥상에서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불붙은 몸을 던졌다. 그의 양복 주머니에서 유서 2장이 발견됐다.

돌연 ‘분신 정국’의 화살이 정부가 아닌 민주화운동 세력을 향했다.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며,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선동했다. 검찰은 “김기설씨 유서와 원래 필적이 다르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불똥이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씨에게 튀었다. 검찰은 그에게 유서를 대신 써주고 김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자살 방조. 강씨에게는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소한,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다.

그를 믿어주는 이는 드물었다.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강씨는 한 달 가까이 명동성당에서 숨어 지냈다. 심지어 ‘동지’라고 여겼던 이들까지 “혹시, 했니?”라고 물어왔다. 진실게임으로 몰아가는 언론 보도보다, 바로 옆사람의 불신이 더 큰 상처로 남았다. 하물며 낯모를 이들은 더했다. 명동성당에 산책을 와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인간인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꼭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해 6월24일, 강씨는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신상규 주임검사(2009년 광주고검장으로 퇴임)는 맥주를 창틀에 깔아놓고 취조를 했다. 취기가 오르면 주먹으로 때렸다. 입이 거칠었던 남기춘 검사(2011년 서울서부지검장으로 퇴임)는 “이 빨갱이 새끼야, 내가 거꾸로 매달아 취조하면 3시간이면 끝난다”고 협박했다. 신참 수사검사였던 곽상도(2013년 청와대 민정수석)는 잠을 못 자게 했다. 밤샘 조사가 사흘을 넘어가면 거의 반실성한 상태가 됐다. 어느 날인가는 검사가 책상에 불탄 주검 사진을 쫙 깔았다. “네가 죽인 김기설 사진이야. 똑바로 봐”라고 다그쳤다. 그러고선 20여 일 동안 내내 내장탕을 시켜줬다. 강씨는 그 뒤 내장탕을 입에 대지 않는다.

당시 수사검사들은 승승장구

법원도 검찰과 다를 바 없었다. “유서 필적은 강기훈의 것”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의 증언이 유죄로 판단한 유일한 근거였다. 김형영씨는 훗날 다른 사건에서 뇌물을 받고 허위로 감정해준 혐의로 수차례 형사처벌된다. 언제, 어디서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것인지 기본 사실관계조차 흐릿한 검찰의 공소장이 그대로 법원 판결문으로 둔갑했다. 교도소에서 받아본 판결문은 “거대한 거짓과 모략, 허구, 비상식에 바탕을 둔 괴물” 같았다. 그가 선택한 유일한 생존 방법은 “유죄의 굴레를 씌운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꼬박 3년2개월을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보냈다.

강기훈의 시간들

강기훈의 시간들

#2012년 5월

정작 ‘굴레’에 갇힌 건 그였다. 유서 대필 사건이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길에서도 쌍욕을 퍼부었다. “형법상 죄는 ‘자살 방조’였지만, 여론재판에선 ‘살인죄’를 받은 셈”이었다.

5월이면 유난히 더 아팠다. 몸도 마음도. 출소한 강씨는 결혼을 하고, 인권운동사랑방에서 1년여간 일했다. 그 뒤 정보기술(IT) 회사에 들어가 평범한 직장인으로 눌러앉았다. 그러다 간경화가 발병했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체한 것 같아서 토했더니 피가 나왔다. 2012년은 유독 더 아팠다. 정밀 검사 결과, 간암이라고 했다. “왜 나한테 자꾸 이런 일이 오는지 억울했다.” 하필 5월이었다. 2012년 5월23일, 강씨는 간 한쪽의 절반가량을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강씨의 아버지는 2008년 12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1993년 무렵 발병한 간경화가 암으로 발전한 탓이다. “평생 아들 사건을 가슴에 안고,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하신” 어머니도 2010년 4월 눈을 감았다. 간암이 뼈로 전이되어서다. 강씨의 어머니 권태평씨는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1994년 수기집 를 펴낸 것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매주 자원봉사를 했던 것도, 2004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늦깎이 대학생으로 입학한 것도 모두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재심 권고 뒤 판결까지 7년여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과수 등에 다시 필적 감정을 맡겨 “유서의 필적은 김기설씨의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이끌어냈다. 법원에 강기훈씨 사건에 대한 재심도 권고했다. 하지만 당시 수사와 재판을 담당했던 검찰과 법원 인사들이 현직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서울고법은 2009년 9월에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그 뒤로도 3년의 시간을 질질 끌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우울증 등으로 강씨의 마음은 점점 너덜너덜해졌다. 부모님과의 이별은 그를 더 지옥으로 밀어넣었다.

“견뎠습니다. 그리고 재심의 기회가 열렸습니다. 감옥에서 보낸 3년2개월, 그리고 또다시 17년. 이제는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견디기 힘겹습니다. 인생을 망가뜨리고 거짓을 진실이라 주장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서 잠들 수 없습니다.” 2012년 10월에야 대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려, 그해 12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재심 첫 재판에서 강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견뎠다. 어느덧 대학생, 고등학생이 된 두 아이에게 말해주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이 자라면 모든 일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이랬으면 좋겠다. ‘참된 것이 결국 크게 이긴다’고”(1997년), “내 아이에게 아빠가 죄인이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었다”(2007년). “보통 사람이라면 미치거나 죽지 않고 기훈이처럼 24년을 살아내지 못했을 거다. 사회는 그에게 누명을 씌워 매도했지만, 기훈이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사회와 소통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강씨와 함께 1989년 전민련에서 활동했던 원일형씨의 말이다.

그를 위로해준 것은 음악이었다. 4살 때 그의 별명은 ‘북 치는 소년’이었다. 분유 깡통을 북 삼아 흥겹게 연주하고 다녀서다. 고등학교 때는 현악부에서 활동하며 음대 입학을 준비하기도 했다. 재심 재판 때문에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하고, 간암이라는 육체적 고통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클래식 기타 연습에 더욱 몰두했다.

2014년 4월, 재단법인 ‘진실의 힘’ 음악모임에서 강씨와 함께 연주를 준비했던 정현아씨는 “선율에 대한 섬세한 감성이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법원의 재심 판결을 앞두고 심리적으로 힘들 때 피아졸라 곡을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많이 느꼈던 것 같다”고도 했다. 강씨는 정씨와 함께 피아졸라의 , 알폰소 몬테스의 등을 연주했다. 그의 삶처럼 하나같이 서글프고 우수에 가득 찬 선율의 곡들이다. 그가 찍는 사진에서도 슬픔의 공명(共鳴)이 나타난다. “구름 뒤에 해가 가려져 있는 사진을 많이 찍더라. 전문 용어로는 ‘실버라이닝’인데, 피해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견뎌왔는지를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아프고 난 뒤로는 노을 사진도 많이 찍는 것 같다.” 2012~2015년 강기훈씨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권경원 감독의 이야기다.

#2015년 5월

지난 5월14일 대법원은 강씨의 재심 사건에 대해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2008년 재심 청구 뒤 7년여 만이다. 하지만 유서의 필적이 강씨의 것이 아니라는 것일 뿐, 사건의 실체나 검찰 수사의 조작 여부에 대한 판단은 없었다. 강씨는 변호인단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법적 판단은 끝났습니다. 이제 역사적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당시 수사했던 검사들과 검찰 조직, 법원은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여야 합니다.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대법원 재판정에 나오지 않았다. 지인들에 따르면,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지리산에 갔다가 어머니 묘소를 찾았다고 한다. 그의 입장글은 이렇게 끝난다. “꿋꿋이 버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

24년을 버티고도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걸까. 강씨의 병세를 잘 아는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의사)은 “지난 4월 말 잘라내지 않은 쪽의 간에서 암이 재발했다. 앞서도 혈관에 약물을 넣어 치료하는 색전술을 두어 번 시행했었는데 다시 재발했다. 색전술 시술 간격이 앞으로는 점점 짧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 센터장은 “무죄는 선고됐지만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강씨의 트라우마가 치유되려면 진실 규명과 책임자 사죄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대법원 판결 선고 이후의 후속 움직임들이 더 시급한 까닭이다.

“강기훈이라는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의무는 물론 있다. 가해자 처벌운동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지금부터 나머지 사람들의 몫이다. 강기훈이라는 사람이 24년 동안 떠안았던 마음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진실의 힘’ 송소연 상임이사) 고통스럽게 꿋꿋이 버텨온 그에게 이제는 사회가 “버티라”고 할 게 아니라, 든든한 버팀목이 돼줘야 할 때다. 인간 강기훈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막 예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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