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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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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삼부자를 마음대로 가두었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병역거부자 처벌을 자의적 구금으로 규정…
1975년 아버지, 2000년 형, 현재는 동생이 징역을 사는 가족
등록 2015-03-10 14:35 수정 2020-05-03 04:27

“한국은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합법적 자유를 ‘자의적으로’ 박탈하고 있다.”
올해 초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용어 설명 참조)는 2012년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징역형을 선고받은 한국인 50명이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낸 개인청원을 검토해 이러한 결론을 통보했다. 2013년 9월 유엔인권이사회는 구금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석방할 것 등을 결의했다. 2011년 유럽인권재판소는 유럽인권조약에 규정돼 있지 않은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천부적 인권’임을 인정해, 병역거부자를 처벌한 아르메니아·터키 정부에 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인권침해로 인식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구금 문제는 한국 사회에선 지난 7년간 유기됐다. 헌정 수립 이래 군 항명죄 혹은 병역법 위반으로 처벌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2만 명’에 육박한다는 끔찍함도 무뎌지고 있다. 비명조차 새나오지 않는 고통은 지금 이 순간에도 대물림된다.

“남들에겐 어리석어 보여도”
공소장에 적힌 이용훈(24)의 범죄 사실은 단 넉 줄이다. 현역입영통지서를 받고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아니한 죄. 병역법 제88조 1항 위반이다. 입영통지서를 받아든 용훈은 병무청에 미리 군 입대를 하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고 병역을 이행할 방도가 없으니 감옥행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입영날로부터 두 달도 지나지 않은 2013년 8월, 그는 불구속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은 한 차례 심리를 거쳐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법원은 지난 10여 년간 종교나 개인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재징집을 면할 수 있는 최저형인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해왔다.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열 줄 정도로 짤막하다. “헌법재판소 결정, 대법원 선고에 따라 유죄이며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권고는 법률적 구속력이 없다.”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는 이완찬(62)씨와 두 아들은 대를 이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모두 형사처벌을 받았다. 류우종〈한겨레21〉기자 wjryu@hani.co.kr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는 이완찬(62)씨와 두 아들은 대를 이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모두 형사처벌을 받았다. 류우종〈한겨레21〉기자 wjryu@hani.co.kr

용훈은 항소했다. “세월호 승무원 고 박지영씨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의로운 죽음을 선택했다. 남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선택일지 모른다. 지금 내 결정도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종교적 신념에 따른 정당한 선택이다.” 이듬해 5월22일 수원지방법원 형사6부는 항소를 기각했다. 항소심 판결문 역시 1심 판단과 대동소이하다. 최후 변론을 남기고 그는 법정 구속됐다.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됐다. 2015년 3월 현재 여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아버지 이완찬(62), 형 이용호(36) 역시 ‘병역거부’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부모와 4남매, 여섯 식구는 모두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2007년 9월 국방부는 대체복무 허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가족은 기대에 부풀었다. 당시 16살이던 용훈이 여호와의 증인 침례(세례)를 받더라도 감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2008년 국방부는 ‘여론조사’를 근거로 국민적 합의가 되지 않았다며 계획을 번복했다. 인권 문제에 다수결 원칙을 들이민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정치 문제에 중립을 지키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투표하지 않는다. 병역을 거부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도 거부한다. 그렇다고 국가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법을 존중하고 세금을 납부한다. 그러나 병영국가를 지향해온 한국 현대사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국민’으로 온전히 살기 어려웠다. ‘이단’이라는 꼬리표가 덧붙여지면서 더욱 고립됐다.

1973~79년, 한 해 평균 목숨을 잃은 1403명

반세기 전, 어린 완찬의 꿈은 군인이었다. 제복을 입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군인이 멋져 보였다. 1967년 무렵 아버지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됐다. 고등학생이 된 그는 어떤 삶을 살지 고민 끝에 침례를 받는다.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토박이라, 종교 문제로 동네 사람들과 갈등을 겪은 적은 없다. 그 시절 개인의 삶은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모든 고등학교에서 총검술을 가르치는 교련 교육을 하도록 했다. 완찬이 목총을 들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선생님들은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교련 수업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학생들에겐 퇴학이라는 가혹한 철퇴가 내려지던 시절이었다. “나 때문에 선생님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걱정됐다.” 결국 자퇴를 택한 뒤 학교 밖에서 가업인 가구 만드는 일을 배웠다. 1972년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입영률 100%’를 부르짖었다. 1974년 작성된 문서 ‘병무청 집중 단속 결과 보고’를 보면, 여호와의 증인 등 병역기피 우려자는 ‘집중 관리’한다는 문구가 있다. 실적을 채우기 위한 강제 연행도 서슴지 않았다. 1975년 봄, 완찬은 집회(예배)를 보는 도중에 훈련소로 끌려간다. 총을 들지 않겠다고 하자, 헌병대로 보내져 석 달가량 마구잡이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 잠을 재우지 않을 때도 있었다. 단 한 명의 열외를 허락하지 않으려뎐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군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는 연평균 1403명에 달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 숫자에 포함된다. 군 형법상 항명죄 위반으로 법정 최고형인 징역 2년이 선고됐다.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폭력이 두려워 무죄를 주장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으로 불리던 국군교도소엔 그를 포함해 여호와의 증인 13명이 한 공간에 수용됐다. ‘빨갱이보다 더 죄질이 나쁘다’며 이들에게 가해진 구타와 기합은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입이 거칠던 중사가 한마디를 던졌다 “너희한테 죄가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거다.” 두두둑 두두둑. 적막한 교도소에 울려퍼진 건 13명이 마룻바닥에 떨어뜨린 눈물 소리였다. 원망도 미움도 없다던 주름진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새나왔다.


예비군 거부자 반복 처벌 문제


제발, 예비군 처벌 중단만이라도

신동혁(32)씨는 예비군 훈련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난 8년간 무려 49차례나 기소됐다.
현역이나 보충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은 8년간 예비군 훈련 대상자가 된다. 신씨의 경우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육군으로 복무하다 병장으로 전역한 뒤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됐다. 이에 따라 그는 2006년부터 예비군 훈련을 거부했다. 문제는 예비군 훈련에 불응할 경우 한 번 처벌받은 뒤에도 계속 훈련이 소집되고, 이를 또 거부하면 반복 처벌받게 된다는 것이다. 누범이 되면 벌금 액수가 높아지고, 때로는 실형이 선고되기도 한다. 또 훈련을 거부할 때마다 경찰 조사, 검찰 기소, 재판 출석이 끊임없이 이어져 일상생활도 불가능해진다.
2007년 울산지방법원 형사5단독 송승용 판사는 예비군 훈련 거부의 처벌 근거인 옛 향토예비군 설치법 제15조 8항(현 제15조 9항 1호 “예비군 훈련을 정당한 사유 없이 받지 아니한 자 등은 1년 이하 징역, 2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에 대해 “헌법상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다. 그러나 2011년 헌법재판소는 7 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예비군 훈련 거부 탓에 줄을 이었던 신씨의 재판은 지난해 말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됐다. 지금까지 모두 450만원의 벌금을 냈다. 위헌법률심판 제청으로 인해 미뤄지거나 병합된 사건이 많아 그나마 다른 예비군 훈련 거부자들에게 부과된 벌금 액수보다 적은 편이다. 2013년 수원지방법원 형사12단독 임혜원 판사는 또다시 향토예비군 설치법 제15조 9항 1호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임 판사는 결정문에서 “예비군 훈련이 옳지 않다는 확신을 가진 국민은 이 사건 법률 조항에 의해 스스로 양심을 꺾고 병역 의무를 이행하거나 형사처벌을 감수하는 선택만 가능한데, 어떤 선택을 해도 인간으로서 가지는 존엄과 가치는 치유될 수 없는 손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신상공개, 이중처벌 위험

아버지가 겪은 기막힌 이야기를 큰아들 용호는 알고 있었다. 스물한 살이 된 2000년, 그는 다른 입영 대상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남 논산훈련소로 향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거쳐갔기 때문일까. 훈련소 관계자들은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용호 역시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항명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건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다. 재판 전 기합을 받았다. 한 명이 잘못하면 다른 이들도 함께 힘들어질 수 있다는 압박이 따랐다. 아버지와 형이 그렇게도 꺼내놓고 싶었던 속내는 지난해 용훈의 입을 통해서야 재판부에 전달됐다. 민간 법원에서 재판을 받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병역거부로 인한 전과는, 직업 선택에도 제약을 가져온다. 용호는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자영업이 가능한 안경을 다시 공부했다.

여주교도소와 완찬의 집 사이엔 국군교도소가 있다. 경기도 성남에 있던 국군교도소는 1985년 이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총을 거부한 죄로 여전히 이곳에서 복역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여호와의 증인의 길을 택하지 않더라도, 총을 들지 못하는 젊은이들이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신념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폐쇄적이고 낙후된 군이 나와 맞을지를 고민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국외 난민의 삶을 택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들을 모두 군 안으로 몰아넣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아니면 공동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선택지를 늘려야 할까. 이미 우리 사회엔 전문연구·산업기능요원 등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돼 있다. 이러한 제도를 기반으로 군사훈련을 덜어내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숨구멍이 트인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시기상조론을 설파한다. 19대 국회 국방위는 대체복무제 도입에 전혀 관심이 없다. 유엔 자유권규약위 통보 등 국제인권에 대한 인식도 낮다. 반면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에선 병역기피자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병역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병역기피’ 사유로 처벌받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역시 신상공개 대상자에 포함될 수 있다. 이중처벌 등 ‘위헌적 요소’가 있다고 평가받는 이 법은 오는 7월 시행될 예정이다. ‘인권의 최후 보루’ 사법부의 사정은 어떨까. 헌재는 2004년과 2011년 병역법 제88조 1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2011년 이후 같은 조항에 대해 제기된 위헌법률심판 제청 및 헌법소원은 28건에 달한다.

병역거부자들을 제 손으로 감옥에 넣어야 하는 일선 법관들은 ‘양심’을 침해받는 또 다른 당사자다. 한 법관은 고백한다. “많은 경우 얼굴을 들지 못하고 선고한다. 처음엔 군에 가지 못하겠다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건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신념과 양심에 따라서 군대엔 갈 수 없다. 감옥에 가더라도 재판부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하니…. 더구나 징역 1년6개월은 죄질이 나쁜 사기사건 피고인들이 선고받는 형량이다.”

법관의 양심마저 침해한다

세 부자가 걸어온 지난 40년 세월은 ‘범죄자’ 낙인을 지워주진 못했다. 얼마나 더 버텨야 그 낙인을 떨칠 수 있을까. 2015년 2월2일 기준, 대체복무를 할 수 없어 감옥에 갇힌 이들은 여호와의 증인 628명을 포함해 모두 636명이다.

■ 참고문헌: (한홍구·2014), (한인섭, 이재승·2013), ‘대한변협 인권위·법원 국제인권법연구회 공동학술대회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점과 대체복무제도의 필요성” 자료집’(2014)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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