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서 조카가 좋아하는 장난감 ‘타요버스’가 옵니다. 아 래는 형광색 점퍼를 입은 ‘경찰 인형들’이 빨간색 점퍼의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 동료들과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보라돌이들’(보라색 점퍼)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한 길 낭떠러지 광고판 위에선 모든 것이 작은 장난감 세상처럼 보입니다.
안녕하세요. 2층에 새로 입주한 장연의입니다. SK브로드밴드 인천계양센터에서 일했습니다. 지난해 씨앤앰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강성덕 동지가 서울파이낸스센터(서울 광화문) 앞 광고탑(12월31일 교섭 타결)에 있을 때 자신과 임정균 동지를 ‘2층 주민’이라고 표현했었지요.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 농성장(경기 과천 코오롱 본사 앞)을 1층, 씨앤앰 광고탑(25m)을 2층, 경북 구미 스타케미칼(45m)은 3층,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굴뚝(70m)은 4층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와 강세웅 동지(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조직부장·전남 서광주고객센터)는 2층(20m)에 입주한 기분이네요.
대학을 졸업하고 통신 쪽 일을 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 K사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네트워크로 하나된 세상’이란 회사 광고 문구처럼 제가 연결해드린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세상과 소통한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SK로 직장을 옮길 땐 SK 직원이 된다는 생각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신분은 ‘SK간접고용 불법 하도급업체 비정규직 근로자영업자’라고 합니다.
지난해 8월1일부터는 해고자 신분이었습니다. 지난 1월31일자로 새로운 도급계약서를 작성했지만, 그것도 불과 한 달 뒤 계약이 종료(2월28일)되는 것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SK에 입사한 지 4년입니다. 일주일에 7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했습니다. 한 달 평균 휴일은 2~3일에 불과했습니다. 휴일이어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어두운 한밤중에도, 목숨을 걸고 전신주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고객의 전화는 밤, 낮, 새벽, 휴일, 명절에도 걸려옵니다. 그렇게 일하고도 받는 평균 급여가 월 250만원 내외입니다. 이 돈이라도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직업 특성상 자동차는 필수적입니다. 차량 유지비와 기름값, 밥값, 심지어 개통할 때 사용되는 모든 자재비와 일하다가 실수로 파손된 가입자 물품 비용까지 다 저희의 몫입니다.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손에 쥔 급여는 150만원 정도입니다. 당연히 4대보험과 퇴직금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아,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았고,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난해 4월 SK브로드밴드에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 뭔가를 바꾸려면 노조가 필요해.’ 그래서 찾아간 노조 설명회(업체에선 설명회에 가는 길을 미행했고 직원들의 참석을 막기도 했습니다)였습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지난해 5월1일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업체는 다른 이유를 대지만)로 조합원을 일방적으로 해고했습니다. 8월엔 업체 변경 과정에서 조합원 11명을 ‘표적 해고’했습니다.
봄부터 뜨거웠던 여름, 가을과 차디찬 겨울을 지나며 때론 오체투지로, 십보일배로, 땅을 기었습니다. 남산 SK그린빌딩과 을지로 SKT타워, 종로 SK그룹 서린빌딩 앞에서 100일이 넘는 밤샘 노숙도 했습니다. 교섭에 나와달라고, 사용자로서 책임 있는 SK브로드밴드가 나와서 교섭에 임하라고, 요청도 하고 요구도 했지만 ‘진짜 사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임·단협에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내세워 교섭을 회피하고만 있습니다. 경총도 불성실 교섭과 시간 끌기 등을 하면서 2014년부터 교섭엔 진전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월6일 SK와 직접 면담하자며 SK서린빌딩에 올라간 조합원 222명이 연행됐습니다. 2월5일 국회 앞에서 진행하던 ‘정리해고·비정규법제도 전면폐기를 위한 3차 오체투지’ 기자회견 과정에서도 SK·LG·기륭전자 조합원 6명이 연행됐습니다.
우리의 어떤 말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땅도 기어보고 면담하자고 건물에도 들어가봤지만 어떠한 방법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라가자, 저 광고탑에라도 올라가면 우리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살기 위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광고탑 위로 올라왔습니다.
우리의 요구는 그렇게 크지 않다고 봅니다. 업체 변경 때 고용안정 보장하라, 불법 다단계 하도급 없애라, 노동시간은 최소한 근로기준법 수준이라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해고자였던 저로서는 절실한 요구였습니다.
2월6일 불빛 하나 없는 새벽 강세웅 동지와 하늘에 올랐습니다. 더듬더듬 광고탑 내부로 들어와 대충 짐을 풀고 앉아 있으니 막막함에 한숨만 나왔습니다. 한두 시간이 지나니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면서 잠이 왔습니다. 잠시 눈을 감으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면 좋겠다, 눈을 뜨면 따뜻한 내 방 안이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때 심정은 정말 그랬습니다.
6일이 지난 지금(2월11일 기준) 광고탑 안을 ‘냉장고’라고 우리끼리 부릅니다. 냉장고에도 살림은 늘었고 밥도 밑에 있는 조합원들이 올려줘서 잘 먹고 있습니다. 불편한 건 생리적 문제와 바람이 불 때면 냉장고가 흔들거려 가끔 어지러운 정도입니다. 지난 2월7일 저녁부터 10일 낮까지 기온이 떨어지면서 냉장고 역시 냉동고로 변하더군요. 그래도 냉동고 안은 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습니다. 광고탑 아래 있는 동생들, 친구들, 형들은 칼바람 부는 차디찬 맨바닥에서 긴 밤을 버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눈물이 납니다. 하늘아 너라도 내 편이 돼주렴. 우리 형, 친구들, 동생들이 너무나 고생이다.
주위에서 묻더군요. “너는 왜 노조를 하냐”고요. 그럼 전 “저녁에 편하게 야구 보고 싶어서”라고 말합니다. 저희도 남들처럼 가족과 함께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카 윤성이와의 약속을 또 못 지키겠네요. 2월15일(일요일)에 같이 놀아주기로 오래전부터 약속했었거든요.
윤성아. 이번 겨울에는 한 번도 못 놀아줬네. 나중에 삼촌이 많이 놀아줄게.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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