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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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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능동적인 유대인 살해의 가담자로 드러난,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넘어 가해자 집단의 사회화 통한 과격화에 주목해야
등록 2015-01-28 16:14 수정 2020-05-03 04:27

학자가 선과 악에 대해 ‘크고 센 얘기’로 세상을 미혹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기괴한 개념이나 선별적 지식에 의해 구원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사와 인간 삶의 근원을 해명하는 데 그럭저럭 유용하다. 하지만 그것이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에 속은 결과라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유대인 출신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수백만 명을 죽음의 학살 수용소로 이송시킨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법정에서였다. 아렌트는 라는 미국 잡지의 요청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그 재판을 참관하고 보도를 한 뒤 1963년 이란 저작을 통해 ‘악의 평범성’ 테제를 제시했다. 테제의 핵심은 나치의 유대인 수송을 책임지며 홀로코스트의 인종학살에 가담했던 아이히만은 악마적 본성을 지닌 흉포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관료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충직한 관료’였을 뿐?

아렌트와 아이히만은 1906년 독일에서 출생한 동갑내기였다. 아렌트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의 제자로 철학자로의 길을 걷다 나치즘의 광포한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51년 이란 저작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하의 범죄행위자를 직접 대면하고자 재판을 관찰하고 싶어 했고 결국 기회를 얻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지만, 그가 능동적으로 목적의식을 갖고 유대인 살해에 앞장섰다는 증거와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한길사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지만, 그가 능동적으로 목적의식을 갖고 유대인 살해에 앞장섰다는 증거와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한길사

반면 아이히만은 나치 관료로 출세 가도를 달리다 전후 아르헨티나에 안착했다. 그의 소재는 1957년 나치 추적자로 유명한 서독 검사 프리츠 바우어에 의해 밝혀졌다. 이스라엘은 바우어 검사로부터 아이히만의 소재 정보와 체포 요청을 받고 미적거리다 뒤늦게 모사드 요원들을 보내 아이히만을 납치했다.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전쟁범죄’와 ‘인류에 대한 범죄’ 및 ‘유대민족에 대한 범죄’ 등의 혐의로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웠다. 아이히만 재판은 국제적 관심 속에 7개월간 열렸고, 결국 1962년 5월31일 밤 아이히만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나치즘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든 신념에 찬 나치가 아니었다. 그는 파괴적 이념과 반인간적 정치에 물든 악마적 인간이 아니라 다만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모르며 관료제적 타성과 인습적 관례를 따른 ‘명령수행자’ 내지 ‘거대한 기계의 한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주인공들, 즉 자신의 악행을 의식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맥베스나 이아고와는 달랐다.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전체주의에 길들여진, 판단력이 마비된 충직한 관료에 불과했다.

국내 인문학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 얘기를 다시 끄집어올리는 이유는 아렌트의 아이히만 분석이 틀렸다는 연구 결과를 알림과 동시에, 이제 ‘악의 평범성’ 너머를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먼저,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관찰했던 것과는 반대로 나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반유대주의였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료와 자료에 기초한 새로운 연구들에 따르면,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항상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유대인 절멸을 지지했던 신념에 찬 나치였다.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자란 아이히만은 학교를 중퇴한 뒤 그곳 정유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1932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했다. 애초 친척의 권유에 따른 입당이었으나, 그는 곧 동료 나치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33년 당이 불법화되자 그는 독일로 들어와 독일 나치당의 친위대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1934년 베를린에 자리잡고 친위대의 보안국에서 경력을 쌓았다. 주목할 점은 그가 린츠에서 독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보다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친위대 보안국의 유대인 추방을 떠맡았던 아이히만은 당시 이미 권력 지향적이며 냉혹한 나치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텔아비브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라 히브리어에 능통하며 유대인 문화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졌다. 잘못된 정보였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오히려 그 소문을 자신의 출세에 활용할 정도로 기민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소문을 계속 확산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한편으로는 유대인 사회에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에서 전문가로서의 지위와 인정을 강화했다.

“유대인 모두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

그 뒤 그는 친위대 소속 대대장으로 진급하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제국안전중앙부에서 유대인 수송 책임을 떠맡았다. 그는 유대인 추방과 수송의 전문가로서 단순히 ‘책상물림 가해자’만이 아니었다. 1941년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절멸을 결정했을 때 그는 그 집행을 위임받았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절멸 수용소와 학살 현장을 답사하고 지도하며 도처에 출몰했다. 다시 말해, 그는 ‘최종 해결’의 발의자나 고안자에 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니저’이자 ‘조직가’로서 ‘유대인 적’을 살해하는 과업을 누구보다 더 능동적이고 효과적이며 목적의식적으로 수행했다.

나치 독일의 패망 뒤, 잠시 미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아이히만은 신분을 숨겨 재판을 피했고 1946년 그곳을 탈출했다. 그는 옛 친위대 동료들과 가톨릭교회 및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도움을 받아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1950년 아르헨티나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망명지 아르헨티나에서도 계속 나치 잔당과 모임을 가졌고 독일의 청년 세대에게 새로운 반유대주의 독일인의 사명을 부과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그는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로 활약하던 빌렘 사센과 인터뷰를 하며 자신의 신념을 드러냈다. 아이히만은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어요. 우리가 1천만 명의 유대인을 모두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이고 우리가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일반적인 명령수행자가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얼간이에 불과한 거죠. 난 함께 생각했으며 이상주의자였어요”라고 고백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재판도 유대주의에 대한 마지막 투쟁으로 간주했다. 아이히만의 상관이던 하인리히 뮐러는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말로 아이히만의 ‘실체’를 요약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서 자신이 수행했던 능동적인 역할과 반유대주의 신념을 숨기고 단순히 국법과 체제에 따른 선량한 시민이자 공무원으로 행세했다. 결국 이와 같은 아이히만의 생애사와 내적 신념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법정 앞 자기변호와 거짓 진술에 의거해 잘못된 인상을 받고 ‘신념형 나치’를 ‘순진한 명령집행자’로 그렸던 것이다.

물론 아렌트도 아이히만이 유죄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고 사형 선고에 공감을 표했다. 다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잘못된 법과 정치에 복종한 죄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나치 국가와 히틀러 총통의 명령과 법에 충실한 결과 아이히만은 자신의 고유한 사유 능력을 상실했지만 그것으로 반인간적 대량학살과 정책을 수행했다는 범죄적 행위가 유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히만의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해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생각이었다.

독재는 명령으로만 유지될 수 없어

어쨌든 아이히만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연극에 속았다고 해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가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테제는 전체주의와 독재 체제하의 순응과 억압의 동참 과정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적 관점을 제공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 체제의 악은 근대적 개인의 자유를 압도했으며 인류의 일원 내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판단 능력을 앗아갔다. 그 결과 전체주의 체제에서 악은 비범한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다만 인류에 대한 불법에 대해 인식과 사유 능력을 박탈했다. 전체주의 체제는 인류 보편적 선과 악의 경계를 무화해 극도의 체제 순응성과 평범성 내지 진부성을 낳고 폭력 발현과 인종학살의 실천에 대한 동참과 무관심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분명 폭력은 사랑처럼 인간 삶의 상수로 도처에 편재하고 악은 선택 가능성으로 일상에 늘 붙어다닌다. 또 심대한 배경이나 비장한 동기가 없어도 억압 체제하에서 우리는 손쉽게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해진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의 주인공인 수용소 감시원 한나의 경우처럼 더러 상부의 명령에 따르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지’ 정말 모르기도 한다. 덧붙여, 악이 그렇게 평범한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전체주의하의 ‘정상적’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에도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거대한 구조하에서 언제든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위를 생각할 줄 모르는 사유 부재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

그럼에도 최근 폭력 가해자 연구는 ‘악의 평범성’을 넘어 새로운 인식 지평을 열고 있다. 전체주의 체제든 아니든 독재와 억압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나 관료제 또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인식 전제다. 그것에는 지배 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의 능동적인 집단적 자기 형성의 과정이 항시 존재한다. 억압과 폭력의 가해자들 또는 가해 가담자들은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관료제적 구조하에서 ‘선이냐 악이냐’ 식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지배는 익명의 체제나 관료제적 기제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지배는 항상 집단적 실천을 전제하고 폭력은 항상 구체적 가해자를 필요로 한다. 그 실천과 가해 행위는 대개 명령과 지시를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넘어 점차 자신의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 관료제나 위로부터의 명령을 초월하고 경계를 뛰어넘는 행위자들에 의해 더욱 광폭하게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나치 시기 유대인 추방과 수송 및 절멸에 가담했던 외무부 관료들에 대한 최근 연구 또한 그들이 단지 관료제의 틀에서 ‘생각할 능력도 없이’ 수동적으로 상황에 순응한 명령집행자가 아니었음을 확인해준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지시나 관료제적 강제가 없었음에도 나치의 비밀경찰에 적극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유대인의 수송과 살해에서 자신들의 조직 입지를 강화하고 주도권을 발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가 아직 유대인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전에 외무부 직원들은 유럽 점령지 유대인을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로 실어나르는 내용의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입안하기도 했다. 상부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스스로 상황을 해석하고 정책 입안을 했던 것이다.

수용소 감시원들에 대한 최근 연구도 슐링크가 한나에 대해 묘사한 것과 달리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명확히 인지했으며 상당히 능동적으로 행동했음을 알려준다. 게다가 동유럽에서 나치의 인종학살은 많은 경우 수용소에서의 관료제적 처리가 아니라 현장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와 같은 ‘킬링필드’에서 발현된 가해 행위자들의 주체적 능동성은 계속 상승했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뿐만 아니라 출세 이기주의와 조직 보신주의, 충성 경쟁과 과시욕 및 경제적 이익 등 다양한 동기와 요인은 그와 같은 고유한 동력과 자율성을 발휘하도록 자극했다.

청와대 바깥 담화가 더 무서운 이유

그런데 능동적 가해자로서의 자기 형성은 대부분 직위를 맡은 뒤 갖게 된 동료들과의 상호작용과 경쟁 및 집단적 학습 과정을 통한 결과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이히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배 체제의 억압과 폭력의 행위자들은 수동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가해자들로 형성되고 재형성되며 집단적인 정치적 사회화를 통해 파괴력을 증대한다.

그렇기에 근대 관료제의 문제나 ‘악의 평범성’보다 지배와 폭력 기구의 다양한 행위자들이 능동적으로 펼치는 네트워크와 상호작용을 통한 과격화 과정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이유로 난 요즘 ‘푸른 기와집’에서 수첩을 통해 내려오는 ‘검은’ 지시보다 각종 권력 기구의 매끈한 신사들이 모여 앉아 나누는 술자리 담화가 더 무섭다. 더구나 요즘 그 ‘창조정치’에 참여하는 이들이 ‘마흔아홉’(!) 명쯤 돼 보인다면….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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