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라.” 지난 4월30일 마스크로 입을 가린 한 무더기의 청년들이 서울 명동·홍대입구·서울시청 앞 거리를 메웠다. 한 손에 국화를, 다른 한 손에 손팻말을 든 앳된 얼굴들이다. “가만히 있으라”던 어른들의 말 때문에 아이들이 스러졌다. 작은 체구의 여대생이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 있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던 세월호 선장과 선원의 말처럼, 학교와 사회에서 배운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세월호 추모 침묵시위를 처음 제안한 대학생 용혜인(24)씨다(제1010호 참조).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476명의 승객을 태운 세월호가 가라앉기 전까지 용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 졸업반 학생이었다. 4월16일,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숱한 어린 생명들이 스러진 것에 분노했다. 경기도 안산에서 자란 그여서 슬픔은 더 컸다. 희생자 가운데 가족과 알고 지낸 이웃도 많았다. “먹고살 길을 찾으려고 했는데 함께 살 길을 찾는 게 더 급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난 12월16일 서울 신촌에서 만난 용씨가 말했다.
침묵시위 이후에도 용씨는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왔다. 세월호 관련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9월 이후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세월호 유가족들의 간담회를 맡아 진행했다. 9월 한 달에만 30차례 이상 간담회를 열었다. 이쯤 되면 ‘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검찰은 용혜인씨를 세월호 추모집회 도중 청와대로 향한 혐의(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로 정식 기소했다. ‘세월호 3법’(세월호특별법·정부조직법·유병언법)에 대한 여야 합의가 타결된 10월31일이었다. 용씨를 제외한 집회 참가자들은 50만원의 벌금형으로 일괄 약식 기소됐다. 수사기관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모여든 청년들에게 ‘세월호 추모 청년모임’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용씨는 지난 11월26일 첫 재판에 참석했다. “본격적으로 청년들에 대한 벌금 폭탄이 쏟아지는 중이에요. 세월호 특별법이 처리되자 곧바로 집회 사범 재판을 시작한 겁니다. 세월호 진상 규명과 관련된 시민들의 의혹을 특별법 처리로 모두 일소하려는 의도, 명백히 그런 의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2014년 한 해 정신없이 세월호에만 매달렸다. 졸업을 앞두고 학교도 휴학했다. 미래도 바뀌었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도, 희생자 가족도 아닌데 그처럼 한결같이 집회 현장을 지킨 사람은 드물다. “세월호 참사 전과 후는 저에게는 매우 달라요.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이 사회를 계속 이렇게 끌어갈 때 언제든 내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내가 세월호 사고를 있게 한 장본인일 수 있고 방관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마음 편히 공무원이나 하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제 공무원이 되는 건 어렵겠지요. 범죄 전력도 있고…. (웃음)”
세월호 특별법 처리와 함께 ‘세월호 국면’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면서 용씨도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보이지 않아서요. 다음 학기에는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어요. 내년에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이 시작되면 시민들이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할 텐데, 다시 힘을 모아야지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답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 청년. 그래서 용혜인은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가 확인한 작은 희망이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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