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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아무리 막아도, 우리가 대세다

“맞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나선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농성단’의

서울시청 점거 6일… 지금 베어문 것이 ‘독사과’일지라도 후회하지 않아
등록 2014-12-16 16:50 수정 2020-05-03 04:27
서울시청을 점거한 ‘무지개농성단’은 면담을 거부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사과를 받고 농성을 마쳤다. 그리고 지난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시장이 아닌 시민에 의해 선포됐다. 박승화 기자

서울시청을 점거한 ‘무지개농성단’은 면담을 거부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사과를 받고 농성을 마쳤다. 그리고 지난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시장이 아닌 시민에 의해 선포됐다. 박승화 기자

“한번 선악과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거죠.”

12월11일 저녁, 서울 종로에서 열린 뒤풀이에서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한 회원이 말했다. 여기저기서 “역시 목사님 아들이야”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농성단’의 서울시청 점거가 끝난 밤이었다. 며칠 밤을 새우며 농성장을 지킨 친구사이 상근자 ‘낙타’가 말을 이었다. “시청 천장이 높아요. 누워서 보는데 직원들이 빼꼼히 내려다보는 거예요. 안 울려고 했는데 옆에서 사람이 울어요. 저도 눈물이 났죠. 그 순간 생각했죠. 아,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금속노조 형님들’도 지지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이 시청을 점거했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문장이 현실이 되었다. 거기서 한 무리의 사람들은 금기의 선악과를 따먹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돌부처처럼 돌아앉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과인 듯 사과 아닌 사과 같은 사과’를 받고 승리를 선언한 다음에 농성은 끝났다. 비록 그것이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상임이사의 말처럼 “독사과”라 할지라도, 누구도 6일의 농성을 후회하지 않았다.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준 거죠.”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는 웃으며 농성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폭력의 한가운데 있었다. 불과 보름 전,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수백 명의 혐오세력에 둘러싸여 ‘이지메’를 당했던 그는 “희망을 보았다”고 말했다. “계속 저들만 보였잖아요. 우리는 당하기만 하고. 이렇게 모여서 보여준 거예요. 저들도 아마 놀랐을걸요. 누구도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들이 시청을 점거할 줄은 몰랐을 거예요. 저들이 아무리 막아도, 우리가 대세다. 그걸 확인한 거죠.” 그렇게 밤이면 밤마다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로 시청은 후끈했다.

날마다 폭력에 시달리던 아이가 날아오는 주먹을 움켜잡고 눈을 치켜뜨고 이제는 “맞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성소수자와 그 인권을 지지하는 이들은 시청에서 서울시민인권헌장 선포를 거부한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를 압박한 세력에 맞섰다. 그것은 차별 금지를 일부의 일로 여기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동성애 차별 금지 앞에서 망설이는 시민사회, 동성애자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를 향해 벌인 인정투쟁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의 구호를 함께 외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진보신당에서 활동했던 나영정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활동가의 이야기다. 여성단체연합이 적극적인 지지에 나서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연대하는 그가 그렇게 원했던 순간이 왔다. 오랫동안 무지개 깃발을 들고 노동자대회에 함께하고, 복직투쟁에 연대한 결과로 ‘금속노조 형님들’도 지지에 나섰다. 쌍용차 ‘형님들’이 농성장을 찾았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담요를 보내줬다. 광화문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씨앤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첫날 점거에 함께했다.

축복의 말 “이렇게 젊은 사람 많은 데 없어요”

한가람 ‘희망을 만드는 법’ 소속 변호사는 청원경찰이 농성단이 붙인 벽보를 찢은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마음이 찢어지는 거예요. 어려서부터 우리가 동성애자로 당해온 존재부정이 있어요. 벽보가 찢기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심리적 환기가 됐나봐요.” 그렇게 그는 울면서 경찰을 막았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이자 에이즈운동가인 ‘가브리엘’은 지팡이를 짚고 지하철을 타고 농성장을 찾았다. 시력을 많이 잃어서 오는 길이 고돼도 그는 힘이 닿는 한 그곳에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40대 게이는 말했다. “저는 여기에 혼자 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말하지 못할 슬픔을 안고 살았던 열다섯의 제가 여기에 있다고 느껴요. 에이즈로 죽은 형과 고통 속에서 자살한 친구들과 함께 여기에 있어요.” 그렇게 농성장에 모인 이들은 각자의 이야기와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놓고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또한 그곳은 인권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농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시청 한켠에서 찬송가를 켜놓고 농성을 방해하는 개신교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기 전에는 몰라요. 여기에 와서 저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살갗으로 느끼게 되는 거죠. 이곳에 걸린 이토록 절절하고 저토록 창의적인 벽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훌륭한 인권교육 현장이 됐어요.” 그는 농성의 마지막 인사로 “역사적인 현장에 저를 초대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초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웠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농성장에서 들었던 가장 축복의 말은 “요즘 이렇게 젊은 사람 많은 데가 없어요”였다. 오랫동안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일했던 송소연 ‘진실의 힘’ 이사는 농성장에 가득한 청춘들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성소수자운동은 많은 사회운동이 다음 세대가 없어서 고민하는 시대에 빠르게 성장하는 운동이다. 인권단체, 여성단체는 물론 시민단체 곳곳에서 일하는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암약’이 없었다면 연대의 확산은 더욱 더뎠을 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지금 여기서 고통에 예민한 자들이 누군지를 방증한다.

흩어져 있던 이들이 모였고, 서로를 몰랐던 이들이 만났다. 성소수자인권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멀어진 철민씨는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희로애락을 나누던 사람들을 오래 만나지 않았다”며 “여기서 그런 형, 동생을 모조리 만났으니 유엔 용어로 말하자면 여기는 가족 재결합의 장소”라고 웃었다. 농성장을 지켰던 이들은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대부분 이렇게 답했다. “묵묵히 청소를 하는 분들이 있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청주에서 왔다, 대구에서 왔다’고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멀리서 온 분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아우팅당한 경험을 말했는데, 성소수자 변호사와 만남으로 이어졌다.”

철회 결정적 이유 “반대편이 너무 없어서”?

농성장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불렸다. 성소수자의 부모가 사온 핫팩이 있었고, 광화문 장애인 농성단이 보내온 물품 등이 넘쳤다. 그리고 상상 밖의 성금이 답지했다. 이송희일 감독 트위터가 전하는 소식이다. “이번 서울시청 농성단에 수백 명이 후원금을 입금했다고 한다. 입금자명 ‘박원순’은 7명, 입금자명 ‘오세훈’은 2명. 하지만 총액은 오세훈명이 더 많았다. 연예인 입금자명으로는 도경수가 3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영화 에도 출연한 엑소 멤버 디오(도경수)의 이름은 엑소 팬들의 트위터 망을 타고 전파됐다.

새정치민주연합 관계자는 차별금지법 발의를 철회한 이유가 “개신교 압력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결정적 이유는 “(개신교의) 반대편이 너무 없어서”라고 말했다.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제도화하려면 개신교 세력에 비길 ‘표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울시청 농성 이후에 그것은 불가능한 상상만이 아니게 됐다.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라는 현수막을 펼치며 농성을 시작한 이들은 “당신의 인권이 여기에 있다”는 깃발을 들고 시청을 나섰다. “성소수자들이 수도의 시청을 6일간 점령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만든 자긍심을 품은 이들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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