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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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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별건가요

지금까지 누렸던 것을 다 움켜쥔 채 마을을 이루겠다는 건 욕망이 아니라 욕심…
마을 얘기가 무성하지만 장소 없는 공간이 더 빠르게 늘어나는 한국에서 ‘마을’이란
등록 2014-11-05 06:28 수정 2020-05-02 19:27

첫 글이니 내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우리 가족은 올해 2월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이사를 왔다. 강하고 중심에 서려는 것들을 싫어하고 마을과 공동체를 좋아하지만 사는 곳을 옮기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연애도 생활공간도, 중요한 건 ‘운때’

수도권을 떠나겠다고 처음 생각한 건 2006년에 ‘지리산권 공동학습프로그램’에 기록자로 참여하면서였다. 지리산 권역의 대안적인 발전을 위해 전문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공부하는 자리였다. 한 주에 한 번, 오전에 내려가 프로그램을 기록하고 구례역 앞 슈퍼에서 맥주 한 캔 마신 뒤 막차 타고 올라오는 생활을 2개월 정도 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나눌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외부인’이었다. 그때 나부터 지역에 내려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처음 했다. 귀농도 귀촌도 아닌 탈수도권을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밥벌이를 할 때라 생활공간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충북 옥천으로 이주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지역 언론 〈옥천신문〉의 매력을 들어왔지만 이사할 생각을 못하다가, ‘운때’에 맞춰 과감하게 이주했다. 하승우

충북 옥천으로 이주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지역 언론 〈옥천신문〉의 매력을 들어왔지만 이사할 생각을 못하다가, ‘운때’에 맞춰 과감하게 이주했다. 하승우

그러다 결혼을 하고, 우리 각시 친구인 인권활동가들도 이주를 고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 중심의 활동에 지치기도 했고 활동 이후 노년을 걱정하는 처지라 같이 고민하기로 했고 곗돈도 매달 붓기 시작했다. 이미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귀농한 친구들도 있고 전주 쪽에 인권단체가 있어 처음에는 그쪽을 염두에 뒀다. 옮겨갈 곳을 보러 다녔고, 마치 복부인처럼 전주·익산·완주 쪽을 돌며 마을을 둘러보고 주민들도 만났다. 하지만 돌아다닐수록 이주는 만만치 않은 일로 느껴졌다.

그러다 옥천으로 이주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26년 동안 지역의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해온 의 매력과 농촌에서 주민자치운동을 벌이는 안남면 이야기를 들어온지라 낯설지 않았지만 이사 올 생각은 못했다. 옥천에서도 비슷하게 땅과 집을 보러 다니다 어느 순간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만들어진 곳에서 단물만 빨아먹으려고 이주하는 건가, 아름다운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이주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 덜컥 옥천에 집을 구했다.

연애도 그렇고 생활공간도 그렇고 중요한 건 ‘운때’이다. 옮기고 싶을 때 과감하게 옮기지 않으면 운때가 지나가버린다. 이것저것 고려하고 따지다보면 갈 곳을 찾기 어렵거나 지친다. 사귀다 헤어질 수 있듯이, 일단 이주하고 마을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우리는 옥천으로 왔다.

다행히 홀로 이주하지도 않았다. 옥천으로 이주할 때 세 가족이 함께했다. 그들과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한 가족은 아이를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기에 아이들도 번갈아 본다. 그래서 고립감도 거의 없다. 마을이 별거인가. 이러다보면 또 다른 마을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거지.

어쨌거나 우리 가족은 비슷한 면적에 1천만 명이 사는 곳에서 100만 명이 사는 곳으로, 이제 5만 명이 사는 곳으로 옮겨왔다. 집도 아파트에서 단독으로 바뀌었다. 이사한 첫날 아이는 “이제 뛰어도 돼?” “소리 질러도 돼?”라고 물으며 뛰기 시작했고, 그 뒤론 조용히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이 아이는 아파트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이주를 하니 수도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떠냐고 묻는다. 그러면 좋다, 사람 사는 것 같다, 라고 답한다. 아파트가 아니라 산이 보이는 곳에 살고 당연히 공기도 좋다. 차로 20분만 나가면 대청호와 금강, 산들이 반긴다. 옥천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 분들이 보내주는 꾸러미도 고맙게 먹는다. 아직은 밥벌이 때문에 외지로 쏘다니느라 동네 분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조금씩 활동 범위를 좁히고 있다.

조용히 걷는 것을 잊어버린 아들

외지로 다니다보면 버스나 기차를 타는 것이 피곤하긴 해도, 더 힘든 건 사람들이다. 이제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머리가 아프고 몸이 힘들다. 옥천의 거리는 왜 이리 한산할까 중얼거리다 그동안 내가 참 빽빽하고 바쁜 곳에 살았구나 생각한다. 교통이 불편하다 투덜거리다가 그동안 참 편리한 곳에 살았구나 깨닫는다. 단독주택으로 온 뒤 손볼 곳이 많다고 걱정하다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리며 살았구나 반성한다. 내려오니 마음과 생각이 바뀐다.

이렇게 마을에 살다보면 감수성이 바뀐다. 속도가 느려지고 시야가 넓어진다. 감수성이 바뀌면서 생각도 바뀌고 몸도 바뀐다. 이런 변화 없이 마을을 이루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지금까지 누렸던 것을 다 움켜쥔 채 마을을 이루겠다는 건 욕망이 아니라 욕심이다. 놓아야 새로 쥘 것도 생긴다.

돌이켜보면 아파트는 장소를 잃어버린 공간 같다. 그 공간에는 만든 사람의 손길이나 주위 공간과의 조화가 없다. 층층이 쌓인 공간의 무게에 사람들은 민감해지고, 쌓아올린 높이만큼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손길을 요구한다. 장소를 잃어버리면서 공간에서는 사람 냄새가 사라지고 그곳은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으로 변한다. 더구나 요즘은 부산 해운대 신도시와 인천 송도 신도시처럼 통째로 장소를 파괴하는 공간도 생긴다. 마을은 반대로 그 장소를 지키려 하는데, 마을 얘기가 무성하지만 실제로는 장소 없는 공간이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장소 없는 공간은 마을의 감수성을 파괴한다.

옥천으로 내려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월호 참사가 터졌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참사 뒤 많은 사람들이 컨트롤타워를 이야기했지만 마을의 감수성은 중앙에 만들어진 컨트롤타워를 거부한다. 누가 재난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누가 마을을 더 잘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실을 너무 자주 망각한다.

소박한 마을과 돈잔치 올림픽

그래서 소박한 마을을 얘기하면서도 돈잔치 올림픽에 열광하고, 생태적인 마을을 논하면서도 동계올림픽 3일을 위해 가리왕산 500년 보호림을 베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지역 발전을 내세운 개발과 예산 확보를 가장한 사업들에, 수도권에 고혈을 빨리면서 지방의 마을들은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 내가 마을에 빗대서 할 이야기들은 이 위태로운 마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높은 철탑에 사람이 올라가 있어도 “저기 사람이 있어요”라는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 송전탑 대신 “지금 이대로 살고 싶다”는 호소에 냉담한 사회에서 마을은 어떤 대안일 수 있을까?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땡초*‘마을’의 의미를 다시 한번 더 깊게 들여다보는 칼럼 ‘하승우의 오, 마을!’은 ‘하승수의 오, 녹색!’과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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