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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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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함께 걷는 든든한 여전사

세월호 참사·밀양·강정 등 사회적 약자 있는 현장에 참여해 끈질기게 연대하는 성가소비녀회 조진선 예수의 소피아 수녀
등록 2014-09-26 06:22 수정 2020-05-02 19:27
김명진 기자

김명진 기자

“어렸을 때 뒷동산에 올라가서 내가 사는 마을을 한눈에 딱 본 느낌이에요.” 자기 마을의 동네촛불과 동네 공부방을 열정적으로 드러냈던 경기도 안산 일동 주민 김영은씨가 자신의 인터뷰를 읽고 그렇게 말했다. 어떤 느낌인지 감이 딱 왔다. 성찰 기능까지 합세했으니 더 좋은 마을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혼자 흐뭇했다.

이번엔 그런 성찰 기능은 기본이고 전투력까지 막강한 이를 만났다.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조진선 예수의 소피아 수녀’다. ‘이름이 왜 그렇게 복잡해요?’ 웃으며 물었더니 ‘예수님의 소피아라는 의미예요. 제가 예수님을 너무 좋아해서’라고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렇다. 조소피아 수녀는 수도자다. 듣기로 우리나라에 수도회만 130개가 넘고 수녀님은 1만 명에 가깝단다.

현장성 넘버 원, 투에 꼽히는 수녀

‘성가소비녀회’는 그중에서 특별히 눈물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현장성을 중시하는 수도회다. ‘성가소비녀회’의 소비녀(小婢女)는 ‘작은 여종’이란 뜻으로 빈자, 병자, 장애인, 무의탁자 등 세상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봉사하겠다는 다짐의 이름이다. 거기에 속한 조소피아 수녀도 당연히 그런 지향점이 뚜렷한 수도자다. 성가소비녀회 수녀 중에서도 현장성이 넘버 원, 투에 꼽힐 만하다고 추천받은 수도자니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적 체험이나 성가소비녀회의 철학은 이번 인터뷰의 주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조소피아 수녀의 현장 경험과 신념을 통해 각종 사회적 현안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수녀님들이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힘을 주는지 알고 싶었다. 끔찍한 세월호 막말이 창궐하는 참사의 시간들에서 그 의문은 매우 절실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내 경우엔 주저 없이 ‘수녀님들’이다. 어떤 현장에 수녀님들이 합류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눈물 흘리는 이들의 고통이 극한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수녀님들이 편들어주는 일이나 사람이 곧 정의라고 생각할 정도다. 오랜 세월 그 믿음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세월호 참사 뒤 전국의 수녀님들은 초지일관 세월호 유가족들 편에 서 있었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팽목의 바다에서, 철야농성장에서, 거리 미사에서, 도보행진의 현장에서, 유가족의 집에서, 성당에서.

조소피아 수녀에게 인터뷰를 안산 와동에 있는 ‘치유공간 이웃’에서 하자고 제안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미 그가 그곳에 다녀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개소식도 하기 전이었는데 몇 명의 수녀님들과 함께 와서 청소 봉사도 하고 밑반찬도 가져다놓은 것이다. ‘이웃’의 밀접한 관련자인 나도 미처 몰랐을 정도로 세월호의 고통과 함께하는 조소피아 수녀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했다. 비가 바람에게 말했다는 ‘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 테니’라는 프로스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절대자와 수녀님들이, 수녀와 수녀님들이 조응하며 밀어붙이고 퍼붓는 느낌이었다. 조소피아 수녀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수녀님들에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분으로 묻고 들었다.

현장에 가면 자라는 내면의 힘 -‘치유공간 이웃’에 다녀가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빠르세요.

=네. 우리 수도회 수녀들은 현장은 다 가야 되는 걸로 알고 계세요. 제가 하는 일은 주로 수녀님들을 몰고 다니는 건데 제가 좀 빨빨거리고 다니긴 하죠. 무식하게 힘이 세서. (웃음) 수녀답지 않다는 소릴 많이 들어요. 2000년대 초반 새만금 때문에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온갖 이슈 현장엔 다 갔죠. 용산 참사 현장에 오래 있었고요. 강정엔 안산처럼 공동체가 하나 있어요. 밀양에도 지금 생태학습관이라고 해서 파견을 했는데 지속적으로 확장할 생각이에요. 삼척에선 오래전부터 핵발전소 건립 반대운동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다니세요.

=제가 입회한 지 만 30년 됐어요. 중견이죠. 우리 수도회의 설립 취지가 ‘찾아가시오’일 만큼 현장을 중시하는 곳이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저더러 미쳤다고 했어요. 빈번하게 새만금을 오가면서 매향리 등 어지간한 현장엔 다 갔으니까요. 성매매 피해 여성, 노숙자를 만나는 일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 문제는 한 부분만 깊이 들어가도 다 연결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다보니 반미운동,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 이런 데 계속 나가게 되는 거예요. 수녀원에서 고유하게 생각하는 일과표는 지키지도 못하고 매일처럼 한밤중에야 들어오는 문제 수녀였죠. 저는 저대로 너무 힘들었어요. 나가면 피 흘리는 세상인데 수녀님들은 이 울타리 안에서 개인 기도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요즘은 외부에서 저희 수녀님들 보고 여전사 같다고 그런대요. 제가 그 얘길 듣고 ‘내가 바라던 말이다’ 그랬죠.

-수녀님은 생각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짧으신가봐요.

=그런 편이에요. 옆에서 충동적이라고 해요. 저는 어떤 현장의 얘기를 들으면 ‘그래 오늘 거기 가야겠다’ 결정하고 바로 실행에 옮기거든요. 이제는 그걸 이상하다고 하지 않고 생동감 있게 받아들여주는 분위기가 됐어요. 현장을 가본 사람은 강화가 돼요. 새만금 때부터 느낀 게 몸이 피곤하거나 내 안의 크고 작은 문제들, 수도회 내의 문제들까지도 현장에 다녀오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현장에 가면 몸도 마음도 힘들 수 있는데 대신 어떤 내면의 힘이 생겨요. 그래서 현장 갔다 오신 분들은 다시 또 가요. 전 그 힘을 알아요. 그래서 일단 가게 하는 게 중요하단 생각에 젊은 수녀님들에게 차량도 마련해주고 시간도 정하고 적극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주죠. 이젠 수녀님들 스스로 찾아가세요.

김명진 기자

김명진 기자

-쉽지는 않으셨겠어요.

=그럼요. 새만금이 완성되는 걸 보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구나. 내가 죽을 힘을 다해 뛰어다닌 게 헛거였구나. 좌절했죠. 그래서 몇 년간 현장에 안 가고 조용히 있었는데 용산 참사가 터진 거예요. 저한테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죠. 거리에서 용산 미사를 하던 1월 어느 날이었는데 너무너무 추웠어요. 그날 용산 피해 가족들이 말하는 걸 듣다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음이 끓어올랐어요. 옆에 있는 수녀님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꺼이꺼이 울었어요. 그날 느낌이, 내가 매일 이렇게 현장에 와도 끝나고 돌아가면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는데 남겨진 이분들은 권력이 마음대로 짓밟겠구나. 그런데 나는 아무 힘이 없구나. 그걸 깨달은 거예요. 이건 제 신앙적 관점이라 싫으셔도 할 수 없는데, ‘그래 이젠 내가 뭘 할 수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파견하시는 거야. 내일 다시 파견하시면 그 역할만 하고 나는 돌아오는 거야. 나머지는 하느님이 하실 거야’. 그동안은 내가 뭔가 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됐잖아요. 결국 겸손해진 거죠. 이제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어요.

생명에 대한 예의라곤 찾을 수 없는

신앙적 고백이라서 거부감이 생기는 게 아니라 세상의 원리를 깨우쳐서 내공 지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고수의 성장기를 목격하는 느낌.

-수녀님들이 현장에 참여하면 그곳에서 눈물 흘리는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시나요.

=도움이 된다고 믿어요. 일단 가시적으로 저희는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거슬리겠죠. 중요한 건 이 옷의 메시지가 개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피해자들에게도 도움이 돼요. 나는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편들어주고 있다. 그럼 든든하죠. 솔직히 저희 개인으로는 힘이 별로 없어요. 우리가 입고 있는 의복이 상징하는 영적인 세계, 능력, 하느님의 빽으로 저희가 두려움 없이 하는 거죠. 그래서 수녀님들은 겁은 날지 몰라도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힘없는 사람들을 편드는 걸 정말 기뻐하고요. 얼마나 기쁜지 그렇게 편들 일이 있으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거죠. 게다가 가톨릭 교회나 수녀들은 끈질겨요. 끝까지 함께하는 거죠. 그게 저희 존재 소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10년 전 새만금에 갔을 때 ‘왜 수녀가 시위하러 다니냐’고 물으면 ‘저희 시위 안 합니다. 같이 있는 겁니다’ 그랬어요.

-진짜 험한 현장에 있어도 무섭지 않으세요.

=그럼요. 사람들에게 제가 팜파탈이라고 그래요. (웃음) 그러면서 ‘우리나라 경찰들이 집단적으로 내게 빠져서 가는 데마다 차를 대고 나를 기다린다’고 말해주죠. (웃음) 한쪽 편을 드니까 저희에게 정치적이라고도 하지만 틀렸어요. 저희는 정치적이지 않아요. 대부분의 사회적 문제가 정치권력에 의해 파생된 거잖아요. 저희는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억압받고 눈물 흘리고 슬픈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 수도자들의 소명이에요. 수도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언적 소명’ 때문이거든요. 예언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성서 안에서 예언적 소명은 왕이나 권력자가 잘못할 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세월호는 예언적 소명이 정말 필요한 사건이죠.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애들이 죽은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한 거잖아요. (울먹임) 저는 한동안 고등학교 애들 교복을 보면 버스에서 내리고 그랬어요. (한참 울먹임) 국가가 국민을 위한 존재임에도 정권을 움켜쥔 권력자들이 자기들 사리사욕을 위해 국민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세월호죠.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안 져요. 생명에 대해 이토록 예의가 없고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니 생명의 하느님이 싫어하실 수밖에요. 지금 자본과 권력이 진행하는 모든 흐름은 생명을 파괴하는 거예요. 핵발전소를 둘러싼 음모도 그렇고 송전탑도 그 부산물이죠. 노동의 신성함도 그저 자본가들의 도구 정도로만 생각해요. 인간이 없어졌어요. 세월호는 생명에 대한 예의 없음이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불편하자, 잊어선 안 된다 -자식 잃은 부모를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한 줌 권력자들은 옛날처럼 이간질하고 회유하고 겁박하면 자기네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힘이 있으면 그게 될 거라고 보는 거죠. 상대를 잘못 골랐어요.

=어리석은 거죠. 저는 아이를 잃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요. 다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죄송하고. (목이 메어 말이 끊김) 누가 그걸 다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저희들은 신앙적 신념 때문에 끈질기게 갈 수 있죠. 끝까지 함께.

-구체적으론 무엇이 제일 안타까우세요.

=일단은 왜곡된 정보로 인해 그분들이 오해받는 게 제일 안타까워요. 자식이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던 분들이 지금 처한 상황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유민 아빠가 단식할 때 어떻게 그런 말들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막말하고 폭식농성하는 이들을 저는 지옥에서 보낸 세력,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특별법이 금방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특별법 제정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죠. 부모님들은 죽는 날까지 편히 잠드실 수 없을 거예요. 그럼에도 그분들을 위로하고 이해하려는 이웃이 많이 생기도록 그것만이라도 어떻게 좀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요. 하지만 지옥에 사로잡힌 세력들은 기도해줘야 할 대상이 아니에요. 막아줘야죠. 제가 광화문에서 연대할 때 몸 자보를 붙이고 화장실을 일부러 멀리 있는 교보문고로 가요. 사람 많은 곳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거죠. 지금은 많이 떨어졌는데 한동안 무당처럼 노란리본, 팔찌, 목걸이 등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어요. 사람들이 불편하라고,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지난번 방한한 교종께서 ‘고통 앞에 중립 없다’고 말씀하셨음에도 고통 앞에서도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말 같지 않은 논리를 펴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고위 성직자를 포함해서요.

=예전엔 전혀 못했는데 제가 어느 날부터 욕도 해요. 그런 말 같지 않은 이들에겐 혼자 욕해요. 그렇게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요.

-욕 한번 할까요 우리? (웃음)

=××. (웃음)

수녀님의 그 호쾌한 욕을 내가 한번 더 따라했다. 밀어붙이고 퍼붓는 막강 화력의 지원군이 내 편인 느낌.

-결국 부모님들이 이기는 거죠.

=그럼요. 제가 팽목항에 가 있을 때 만난 어떤 여성분은 제주도 사람인데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일부러 오셨다더라고요. 제가 너무 감사하다 했더니 ‘제가 엄만데 이걸 어떻게 못 느끼겠어요’ 그러더군요.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기지 못하겠어요. 더구나 끈질기게 끝까지 가는 건 저희 전공이라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쓰러져 죽어도 좋아요”

생물학적 여성이 엄마나 수녀라는 타이틀을 가지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엄마가 앞서고 수녀님이 뒷배가 되는데 안 될 게 무에 있을까.

-현장에 다니는 게 아직도 괜찮으세요.

=좋아요. 근데 50이 넘고 그러니까 뜨거운 뙤약볕에 오래 있으면 체력이 옛날처럼 회복이 안 돼요. 그러다가 쓰러져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도 좋아요. 만약 제가 병이 든다면 하느님이 ‘너 이제 충분히 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하는 인정이라 생각하려고요.

-그러면 하나도 안 무서울 거 같네요. 현장에서 ‘엽기 수녀’라고 불릴 만큼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지금도 그러시는데 아쉬움 같은 건 없으세요.

=제가 좀 무모하지만 후회 안 해요. 저는 저를 좋아해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저를 보고 좋아하셨잖아요. 저는 제가 좋아요

-저도 (수녀님이) 좋아요. (활짝 웃음)

=매일 새벽 눈뜨면 지구를 위해 기도한다는 조소피아 수녀의 얘기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나무에서 열매 떨어지는 소리는/ 어떤 악기로도 흉내 낼 수 없다/ 그 소리에 지구가 정숙해진다” -이기철

무엇으로도 흉내가 불가한 끈질긴 연대로 결국 세상을 정숙하게 만드는 수녀님들, 만세.

이명수 심리기획자, 녹취 이영하 시민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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