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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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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여야 해요

개인돈 쓰며 가정 방문하고, 다니던 직장 버리고 안산으로 향한 사회복지사들…
‘기억 0416’ 기부금으로 활동 지원키로
등록 2014-09-25 08:28 수정 2020-05-02 19:27
경기도 안산 지역 10개 복지관은 지난 7월1일 안산 지역공동체 회복을 위한 복지관 네트워크 ‘우리함께’를 만들어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고 있다. ‘기억 0416’캠페인이 그 실천의 밑거름이 됐다. ‘우리함께’ 소속 사회복지사들이 워크숍을 하는 모습. 우리함께 제공

경기도 안산 지역 10개 복지관은 지난 7월1일 안산 지역공동체 회복을 위한 복지관 네트워크 ‘우리함께’를 만들어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고 있다. ‘기억 0416’캠페인이 그 실천의 밑거름이 됐다. ‘우리함께’ 소속 사회복지사들이 워크숍을 하는 모습. 우리함께 제공

그들은 ‘우리 함께’ ‘우리 이웃’ ‘우리 지역’이라는 단어를 반복해 썼다.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학부모들을 지난 5개월간 만나온 안산 지역 사회복지사들이 그랬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이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우리 지역(안산)”에서 “우리 이웃들(유가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가족과 “함께” 살아갈 “우리 이웃들(지역주민)”을 보듬어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회복하고 싶다고 바랐다.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우리(사회복지사)”가 무너진 “우리 지역”을 스스로 복구할 책무가 있다고 다짐했다.

복지관에 자원봉사 왔던 그 아이들

안산 지역 10개 복지관이 지난 7월1일 안산 지역공동체 회복을 위한 복지관 네트워크 ‘우리함께’를 만들어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고 있었다. 과 아름다운재단이 함께하는 ‘기억 0416’ 캠페인이 그 실천의 밑거름이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9월5일 안산 단원고 옆 카페에서 ‘우리함께’ 문미정(36) 센터장, 박성현(35) 사무국장, 최주영(44) 사회복지사, 이자연(27) 사회복지사, 성혜경(33) 아름다운재단 캠페인팀장이 ‘우리함께’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이야기했다.

사회: 안산 사회복지사가 처음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문미정 센터장(이하 문): 4월16일 사건이 터지고 닷새쯤 지나 사회복지사 30여 명이 모였다. 유가족을 만나는 일에 동참해야겠다고.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당연했다. 갑자기 위기에 부닥친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았고 이웃이 함께 위로하고 공동체를 형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소명의식과 이웃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우리를 움직였다.

박성현 사무국장(이하 박): 지난해 복지관에 자원봉사를 하러 왔던 아이들이 단원고 1학년생이었다. 그 아이들이 올해 2학년이 됐고 사고를 당했다. 복지관에서 함께 일한 동료는 아이를 잃었다가 40일 만에 주검으로 찾았다. 안산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렵다. 아이들이 왔다갔다 했던 슈퍼마켓·문방구 주인, 엄마·아빠의 동료, 친·인척 이런 식으로 따지면 다 연결된다.

최주영 사회복지사(이하 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었구나’ 놀라면서, 생각해보니 그냥 모른 척했던 사건이 너무 많았다. 200여 명의 대학생이 죽거나 다친 붕괴 사고(경북 경주 코오롱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사고)가 지난 1월에 있었고,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도 있었는데, 항상 ‘사건이 터졌어. 많은 사람이 죽었네’라고 넘어갔다. 더는 지역의 일을, 사회복지사로서 묵인하거나 넘어가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안산 10개 지역 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 38명이 지난 4월과 5월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집을 찾아다녔다. 밤낮없이 문을 두드렸다. 복지관에서 해야 할 원래 일들은 쌓여갔다. 야근을 하거나 주말에 유가족을 만났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를 위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성혜경 아름다운재단 캠페인팀장은 “활동비조차 없었다”고 했다. “가정방문을 할 때 과일을 사가는데 개인 돈을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러면 소진돼 오래갈 수 없다. 안산 사회복지사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노인이 될 때까지 트라우마를 함께 치유할 동반자, 이웃인데 말이다.” 그래서 ‘기억 0416’ 캠페인 기부금으로 안산 사회복지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서명·단식 동참은 사회적 치유 과정

사회: 처음 유가족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나나.

: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재난을 겪고 청각이 예민할 때니까. 만나야 한다는 당위는 있는데 막상 문이 열리는 게 무서웠다. 거부당하는 것도 속상하지만, 일단 문이 열리면 서로 그 막막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보다 떠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게 힘들었다. 미안해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여기가~”라고 입을 떼고 그렁그렁한 눈을 마주하며 인사했다. 방은 대개 어둡고 이불이 펴져 있다. 그걸 치울 여력이 없으니까. “식사하셨어요”라고 물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사람을 만나는 데 가장 중요한 인사가 끼니 걱정이라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어제 잠은 주무셨어요”와 함께.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부모들의 일상생활이 무너져버렸으니까. 아무 말 없이 손만 잡고 오기도 했다.

아름다운재단 제공

아름다운재단 제공

거절을 당한 경우가 더 많았다. 한 엄마는 웃으면서 “됐어요, 저 괜찮으니까 오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웃던 그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그걸 느끼며 더 아팠다. 불신이 아주 컸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유가족의)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어제는 살아왔던 이야기를 다 풀어놓았는데 오늘은 “오지 마세요, 왜 와요” 이렇게 말했다. 그 마음이 이해됐지만 나 역시 힘이 쑥 빠졌다. 그래서 출퇴근하다 맥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그랬다.

: 사회복지사들이 자기 일처럼 최선을 다했는데 (방문) 나갔다 오면 굉장히 아파했다. 나도 복지사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었다. 어땠는지 얘기를 들어주고.

사회: 사회복지사는 사회적 문제를 많이 경험했는데 왜 세월호 참사에 유독 힘들어했을까.

: 세월호 유가족처럼, 어제 입은 상처로 부풀어 있는 예민한 상태는 드물다. 예를 들어 몸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그 상처가 곪았다. 그 상태에서 누가 손을 대는 것이다. 자지러지게 소리치는 게 당연하다. 그걸 잘못 건드릴까봐 불안하고 염려할 수밖에 없다.

: 다른 일들은 대개 열심히 뛰어다니면 무언가 된다. 그분들이 살아갈 수 있게 되고, 선생님 덕분이라는 감사 인사도 받는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다.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얽혀 있으니까. 아이가 왜 죽었는지 모르는데, “아이를 잃어서 너무 슬프겠어요, 너무 힘들겠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게 어떻게 위로가 되겠나. 아무리 유명한 심리학자가 외국에서 와도 해결할 수 없다. 곁에 있겠다는 약속은 유가족의 가슴만 쓰다듬는 게 아니라 유가족이 하려는 것들, 지키려는 것들을 함께한다는 의미다. 유가족들이 사회적 치유를 통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사회복지사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고 동조단식에 나서는 이유다. 사회적 의식이 없던 20~30대 사회복지사들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그렇게 변했다.

“체육복 예뻐요”에 환하게 웃던 엄마들

이자연 사회복지사(이하 이): (참사 100일을 앞두고 유가족이 도보행진할 때) 광명체육관에 큰맘먹고 시민으로서 참여했다. 자식을 잃기 전에는 그 아픔을 알 수 없는데, 공감하겠다고 가도 되나 수없이 망설였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안산으로 향하면서도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러면 눈빛을 어떻게 바라보지’ 걱정했다. 가보니 엄마들이 아이들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명찰을 달고. (눈물) 할 수 있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대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든데도 아이들 체육복이 예쁘다고 하니 정말 좋아하시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너무 어렵게만 생각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겠구나 싶어졌다.

몇 시간 지지 방문을 왔던 이자연 사회복지사는 그날 광명체육관에서 잤다. 엄마들이 자연스럽게 칫솔과 치약, 담요를 챙겨주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벽 5시에 첫차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며 그는 생각했다. ‘단 하루는 도움도,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씩 작은 변화를 시작하면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이 사회복지사는 7월30일 다니던 서울 직장을 그만두고 안산으로 내려왔다. 8월1일부터 ‘우리함께’ 사무국에서 상근자로 일하기 위해서다. 월급은 20% 정도 줄었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몇 년이 지난 뒤 (유가족을) 만나서 ‘그때 괜찮으셨어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고. 오늘,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함께’에는 박성현 사무국장과 이자연 사회복지사 등 2명의 상근자를 포함해 사회복지사 33명이 일한다. 비상근자는 안산 지역 10개 복지관에서 파견했다. 사회복지사들은 가족지원팀과 공동체회복팀으로 나뉘어 유가족을 지원한다. 가족지원팀은 유가족을 만나 아이를 함께 추억한다. “꽃처럼 피어나던 때였어. 한창 어린아이 태를 벗고 곱게 숙녀로 자라고 있었는데”라고 말문을 연 엄마가 휴대전화에 담아둔 아이들 사진을 보여준다. YWCA에서 아이들 친구들이 아이들과의 추억을 기억하며 쓴 손편지도 부모들에게 전달하고 함께 공감한다. 공동체회복팀은 지난 8월 희생 학생들의 동생들과 함께 캠프(Memorial&Tomorrow)를 다녀왔다. 슬픔에 빠진 엄마·아빠를 대신해 사회복지사들이 “그냥 맘껏 놀고 싶다”는 중학생, 초등학생 37명의 손을 잡고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를 누볐다. 이러한 활동들은 지역 시민사회단체·정부기관(안산온마음센터·경기도교육청)과 손잡고 벌인다.

평생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

문미정 센터장은 ‘우리함께’가 걸어갈 길을 이렇게 제시했다. “유가족들이 우리 지역(안산)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될 것이다. 3년, 5년이 지나 유가족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자리가 잡히면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간다. ‘우리함께’가 해체되더라도 지역 공동체가 유가족들을 보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안산=사회·정리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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