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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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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면 쉬었다 가고, 외로우면 함께 울어요”

<한겨레21>·아름다운재단 공동캠페인 ‘기억 0416’ 모금액으로 ‘치유공간 이웃’ 문 열어…

시민 대상 치유 프로그램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도 10월 중순 시작
등록 2014-09-17 15:04 수정 2020-05-03 04:27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로 253로 홍원빌딩 3층에 ‘치유공간 이웃’이 문을 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쪽벽을 꽉 채운 <봄소풍>(가운데)과 따뜻한 밥과 반찬을 차릴 부엌(왼쪽). 치유공간 이웃 제공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로 253로 홍원빌딩 3층에 ‘치유공간 이웃’이 문을 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쪽벽을 꽉 채운 <봄소풍>(가운데)과 따뜻한 밥과 반찬을 차릴 부엌(왼쪽). 치유공간 이웃 제공

짙은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에 꿈을 담은 별들이 수놓아져 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환한 별들이 소풍에 나선 아이들과 선생님을 비춘다. 아이들은 꽃이 만발한 언덕에서 아홉 개의 바위를 오가며 뛰어다닌다. 오른쪽에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홍조 띤 얼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집밥을 짓고,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치유공간 이웃’이 9월11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로 253 홍원빌딩 3층에 문을 열었다. 과 아름다운재단의 공동 캠페인 ‘기억 0416’의 결실이다. ‘기억 0416’ 기부금으로 이 공간을 마련했다. ‘이웃’ 대표인 심리기획자 이명수씨는 이곳을 ‘친정집’이라고 불렀다. “세월호 유가족이 지쳐서 돌아오면 같이 밥을 먹으며 따뜻하게 보듬을 곳이다. 그래야만 세상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으니까. 상처 난 것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 그것이 치유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는 “치유적 공기를 품은 곳”이라고 했다. “가다 넘어지면 약 바르고, 허기지면 함께 밥술 뜨고, 지치면 쉬었다 가고, 외로우면 함께 울고, 아이들 얘기하다 웃을 수 있는 곳이다.”

‘이웃’을 향한 연대의 손길은 이미 쏟아지고 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쪽 벽을 꽉 채운 동양화 이 그렇다. 동양화가 김선두 화백(중앙대 교수)이 제자 5~6명과 함께 7겹 한지에 서른 번 이상 덧칠해 완성한 작품이다. 김 교수는 “밝고 따뜻하게 그려 (단원고) 아이들의 영혼을 차가운 바다에서 건져주고 싶었다”고 했다. 짧은 삶을 살다 간 아이들이 또 다른 세상에서는 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아홉 개의 바위를 배경으로 담았다. 아홉은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바위는 장수를 의미한다.

건축가 정현아씨는 공간 디자인을 맡아 큼직한 거실과 부엌, 아늑한 상담실과 사무실을 꾸몄다. 살림예술가 이효재씨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개다리소반, 프라이팬, 냄비 등 부엌 식기를 직접 사날랐다. 특히 그는 후배 도예가를 불러모아 ‘이웃’에서 쓸 밥그릇, 국그릇, 반찬 종지 등을 가마에서 따로 구워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흙을 빚고 불을 지폈다. 건물 옥상에 펼쳐지는 너른 텃밭은 안산시민 김상엽씨가 가꾼다. 한방치료를 위해 한의사 100여 명이 참여하고 수많은 이웃치유자가 활동한다. 이명수씨는 “세월호 가족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웃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웃치유자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집밥을 짓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대부분 밥을 제대로 못 넘긴다. 안 넘어가기도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미안해서 포기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도시락을 배달하지만 단체급식용이라 한계가 있다.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람도 넘길 수 있는 밥은 바로 집밥이다.”(정혜신씨) 전국에서 모여드는 식재료를 이웃치유자가 따뜻한 밥과 정갈한 반찬으로 요리해 1인용 이웃소반에 정성껏 내놓을 예정이다. 둘째, 부드럽고 따뜻한 마사지를 한다. 잠을 못 자서 유가족들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스킨십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고 정혜신씨가 말한다.

공개 상담으로 치유의 효과 극대화

안산의 치유공간 ‘이웃’처럼, 세월호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자리를 서울시에서도 마련한다. 과 서울시 치유활동가 집단 ‘공감인’이 10월 중순부터 서울시민 힐링 프로젝트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을 통해 세월호 트라우마를 겪는 시민들을 보듬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전문가가 일반인을 치유하는 수직적 프로그램이 아니다. 치유를 경험한 시민이 치유활동가가 돼 다른 이들에게 치유를 경험하게 하는 치유 도미노 방식으로 진행된다.

누군가 내게 ‘엄마성’을 깊숙이 느끼게 해주면, 내가 치유활동가로 거듭나서 또 다른 이에게 엄마성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엄마성이란 “내 결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도 조건 없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던 태곳적 느낌, 치유적 인간의 원형”을 뜻한다. 이 치유 프로그램을 이끄는 정혜신 서울시 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에게 세월호 트라우마에 대해 물었다.

-참여자는 누구인가.

“(세월호 참사에) 감정이입을 많이 하고 전방위적으로 영향받은 그룹으로 정했다. 엄마와 16~18살 청소년, 그리고 선생님이다. 요즘 고등학생을 만나보면 세상과 기성세대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하다. 세월호 희생 학생에게 깊숙이 이입돼 있어서 그렇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로 받아들이며 깊이 슬퍼한다. 아이들을 날마다 만나는 선생님들도 자기 상황으로 대입해 아파한다.”

그리고 문패를 만드는 전용성 화백의 뒷모습(오른쪽). 치유공간 이웃 제공

그리고 문패를 만드는 전용성 화백의 뒷모습(오른쪽). 치유공간 이웃 제공

-왜 집단 공개상담 방식을 선택했나.

“일반적인 정신과 상담은 비공개 개인상담이 보편적이다. 내적 갈등이니까,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다. 하지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외상, 다시 말해 외부적 요인으로 생긴 상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한 외적 고통을 다른 사람들이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때 치유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밀폐된 공간으로 밀어넣어 환자로 취급하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세월호 참사로 아팠던 엄마와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유가족이나 다른 시민들이 지켜보며 ‘내가 아픈 게 이상한 것이 아니구나’ 하며 위로받을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 그 보편성은 치유적 효과를 낳는다고 한다.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나만이 유일하게 외롭고, 누구에게도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 문제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사회적 고립이 자꾸 깊어진다. 이 아픔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 강한 안도감을 느낀다.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자기 통제력을 얻을 수 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집단끼리 이야기(상담)할 때 이러한 보편성이 확인된다.

세월호 트라우마 상담 신청은 9월 하순부터 -트라우마가 가장 깊은 유가족부터 상담해야 하지 않나. 왜 시민이 먼저인가.

“유가족을 먼저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유가족은 심리적 치유를 시작할 수 있는 단계에 오지 못했다. 오늘도 외상이 계속되니까. PTSD란 예를 들어 쓰나미가 몰려와 모두 쓸려가고 나만 혼자 살아남은 상태에서 찾아온다. 폐허 더미에서 홀로 서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재앙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과정을 돕는 게 PTSD 치료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은 폐허 더미 위에서 공격을 계속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하루하루 피해다니기에 바쁘다. 새로운 상처가 생겨나니까 정신적 애도는 물론 치유가 현재 불가능한 상황이다.”

-안산이 아니라 서울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안산도 할 것이다. 전국에서 해야 한다. 서울시민 힐링 프로젝트가 있으니까 먼저 시작할 뿐이다. 하지만 서울시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서울시민 힐링 프로젝트 세월호 트라우마 상담 신청은 과 서울시민 힐링 프로젝트 홈페이지에서 9월 하순부터 받는다.

안산=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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