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문이 막혔다. 뜬금없는 ‘정화조 청소비’라니…. 원룸 계약이 끝난 뒤 보증금을 돌려받던 날, 대학생 이아름(23)씨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집주인은 여태 있는 줄도 몰랐던 정화조 청소비를 ‘관리비’라며 10여만원을 제했다. 고향집을 두 번이나 다녀오고도 남을 돈이었다. “청소비 영수증을 보여달래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말만 하더라고요.”
전기요금에 포함되는데 또 TV수신료애초 계약할 때 집주인은 “월세와는 별도로 관리비가 ‘조금’ 있을 수도 있다”고만 했다. 첫 자취여서 잘 챙기지 못했다. 관리비는 ‘조금’이 아니었다. 수도요금이며 건물 청소비 명목으로 매달 5만원가량 관리비를 따로 받아갔다. 관리비가 ‘관리’로 이어졌는지도 의문이었다. 천장에서 물이 새도, 문고리가 망가져도 집주인은 ‘나 몰라라’ 했다. 막무가내인 집주인 앞에서 이씨는 얄팍해진 보증금 봉투를 받아든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관리비가 언제부터 세입자 코 베어가는 칼날이 됐을까. 청년층 주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단체 ‘민달팽이 유니온’은 지난 8월1~10일 ‘표준 원룸 관리비 기준표 개발 프로젝트’의 하나로 수도권 원룸 관리비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은 조사에 응한 일부 청년 세입자(20~34살, 123명)의 사례를 살펴봤다. “내 돈 내고 사는 집인데 분해요.” “세 들어 사니까 서러운 일이 참 많네요.” “대한민국 임대인들의 민낯을 보는 듯해서 씁쓸합니다.” 불평했다간 쫓겨날까 삭이며 살아온 청년 세입자들은 관리비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부르는 게 값이다. 설문에 응답한 세입자들은 많게는 다달이 32만원이나 되는 돈을 원룸 관리비로 내고 있었다. 단순히 원룸마다 관리에 드는 비용이 다르기 때문일까. 이경현(가명)씨가 사는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한 원룸에선 세입자마다 관리비를 달리 내고 있었다. 많게는 월 5만원부터 적게는 안 내는 세입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관리비가 세입자마다 다르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미안하다며 다음달부터는 1만원을 덜 내라고 했다.” 계약기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씨는 임대인의 제안을 수락하고 이사 가기 전까지 그냥 살기로 했다. 임대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원룸 관리비가 정해진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다.
관리비에 포함되는 비용 내역도 제각각이다. 설문조사에서도 관리비에 들어가는 항목에 편차가 나타났다. 수도요금을 포함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원룸을 구하던 안경진(가명)씨는 “집을 알아볼 때 관리비로 포함되는 항목이 집집마다 달랐다”고 답했다. 서울 공덕동에 사는 김남은(22)씨가 내는 관리비에는 주차시설 유지비 6920원이 포함돼 있었다. 김씨는 차가 없어 주차장을 이용할 일이 없다. 서울 독산동에 사는 고은지(27)씨는 매달 2500원의 TV수신료가 포함된 관리비를 냈다. 관리비와 별도로 내고 있는 전기요금에 이미 TV수신료가 포함돼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1층에 사는 세입자 중에는 이용하지도 않는 승강기 이용료 및 점검비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용실 등 상가의 수도요금까지 분담관리비는 쾌적한 주거환경을 유지하고 입주민들의 편익을 증진하기 위해 드는 비용이다. ‘주택법시행령’ 제58조는 일반관리비·청소비·경비비·소독비·난방비·급탕비·승강기유지비·수선유지비(냉난방 시설 청소비 포함)·위탁관리수수료 등 9가지를 공동주택 관리비 항목으로 명시해놓고 있다. 그러나 모든 원룸이 주택법시행령을 적용받는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가 원룸이라고 부르는 주거 형태에는 법적 ‘공동주택’에 해당하지 않는 원룸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원룸 관리비만을 포괄적으로 규정할 법적 근거가 없다. 민달팽이 유니온 김성훈 프로젝트 연구원은 “기댈 수 있는 건, 민법 가운데 세입자 권리가 명시된 몇몇 조항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관리비와 직접 연관된 내용은 아니어서 관리비 징수의 명확한 근거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임대인 마음대로 원룸 관리비가 정해지고 세입자는 그에 따라 낼 수밖에 없다.
당장 관리비 사용내역을 임대인이 명확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세입자들은 명확한 사용내역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입을 모은다. 혼자 사는 박정인(가명)씨는 두 달치 수도요금으로 3만원 안팎의 돈을 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적은 1인가구치고 높은 수준이다. 건물 전체의 수도요금을 세대수로 나눠 분담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 박씨가 사는 건물에는 미용실, 치킨집, 노래방이 있다. 혼자 사는 그가 상가의 수도요금을 분담해온 것이다. 구은경(가명)씨는 청소비가 제대로 쓰이는지 의심스러웠다. 분리수거함도 없고 건물 입구엔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심한 상황이었다. 구씨는 “청소를 전혀 하지 않는 듯 엉망이다. 관리비를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용처를 알 수 없는 관리비가 세입자와 임대인 사이의 불신을 야기한다.
감시 사각지대에 놓인 원룸 관리비는 임대인의 월세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꼼수’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 월세를 깎고 관리비를 늘려 임대수입에 부과되는 세금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신림동에서 살고 있는 이상희(26)씨는 “매달 납부하는 관리비가 월세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설문조사에 응하기 전까지 상세히 살피지 않고 관리비 7만원을 내왔다”고 말했다. 관리비의 용처가 미심쩍어도 임대인에게 직접 문제제기를 하기는 껄끄럽다. 양수진(25)씨는 “아무래도 집주인이 갑의 입장에 있잖나. 문제제기를 했다가 어떻게 될지 걱정된다”고 털어놨다.
원룸 세입자가 부당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곳은 마땅치 않다. 서울 선릉동에 사는 조가영(26)씨는 혼자 힘으로 임대업체가 수도요금을 두 배가량 부풀린 사실을 알아냈다. 5월17일 서울시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어 강남수도사업소로부터 원룸 전체의 수도요금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강남구청 쪽은 누리집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조씨에게 “원룸주에게 부당이득의 반환청구를 요청”하거나 “분쟁이 지속될 시 민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답변만 내놨을 뿐이다.
수도요금 부풀린 것 알아내도 해결 방법 없어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답은 ‘연대’에 있을지 모른다. 개별 세입자가 임대인에게 대항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세입자가 요구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아직은 원룸 세입자들 사이에서도 관리비에 대한 관심이 낮은 수준이다. 8월11일 민달팽이 유니온은 원룸 관리비 오픈테이블을 열었다. 이날 프로젝트 연구원 김종하(25)씨는 “법과 제도 마련도 시급하지만 우선 세입자 카톡방 만들기부터 해보자”고 제안했다.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는 것이다. 관리비로 답답한 세입자들, 주인집 문을 두드리기 어렵다면 옆집 문부터 두드려보는 건 어떨까.
서지원 인턴기자 iddgee@gmail.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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