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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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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부부, 한국에선 남남

캘리포니아주에서 결혼 서약했지만 한국에선 부부 자격 인정 못 받는 상욱·제이
슨 동성 부부…
미군·외교부 주재관 등 파견근무자에게서 형평성 문제 제기돼
등록 2014-07-02 06:33 수정 2020-05-02 19:27
동성부부인 상욱과 제이슨(모두 가명)의 손에는 직접 디자인해 만든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다. 상욱과 제이슨 제공

동성부부인 상욱과 제이슨(모두 가명)의 손에는 직접 디자인해 만든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다. 상욱과 제이슨 제공

국외에서 결혼한 부부는, 한국에서도 부부일까. 미국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가 헤어진 서태지·이지아의 관계는 한국에서 그대로 인정됐다. 그런데 결혼 당사자가 이성(異性)이 아닌 동성(同性)이었다면? 한국에서 이들은 부부인가 아닌가. 서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상욱, 미국인 제이슨의 이야기다. 신상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

2년의 꿈, 반나절 만에 현실로

2013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동성부부에 대한 결혼증명서 발급이 5년 만에 재개됐다. 캘리포니아주는 2008년 주 대법원 판결에 따라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반발은 거셌다. 같은 해 11월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발의 8호(Proposition 8)가 통과되면서 동성결혼은 다시 금지된다. 해당 법 조항이 위헌임을 주장하는 소송이 이어졌다.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주민발의 8호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법원 선고에 대해, 동성결혼 반대 단체가 상급법원에 항소할 수 없다고 결정한다. 주민발의 8호 효력이 정지된 것이다. 같은 날, 미국 연방대법원은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고 정의한 연방법인 ‘결혼보호법’(DOMA)이 평등 보호를 위반한다고 선고했다. 주정부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았지만 결혼보호법으로 인해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동성부부는 이성혼 가족과 마찬가지로 세금·주택·의료 등 사회보장 혜택과 의무를 적용받게 됐다. 미국에선 19개 주(2014년 6월 기준)에서 동성결혼이 가능하다. 연방대법원 판결 뒤, 결혼을 원하는 동성커플들이 캘리포니아로 속속 모여들었다. 상욱과 제이슨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한국에 사는 그들이 결혼을 위해 미국으로 향한 건 아니었다. 제이슨의 가족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 예정돼 있었다. 때마침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 금지가 해제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6월24일 만난 상욱과 제이슨은 같은 모양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직접 디자인했다는 반지 안쪽에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짜가 새겨져 있다. 결혼반지였다.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캘리포니아주 모노카운티에 위치한 법원을 찾았다. 결혼신청서를 쓰고 판사를 만났다. 그 앞에서 결혼서약서를 읽고 결혼반지를 교환했다. 2년 동안 함께했지만, 한국에선 꿈도 꾸지 못했던 결혼이 반나절 만에 현실이 된 것이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격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부부는 손을 맞잡고 한참을 울었다. 법원 직원들도 나와 두 사람을 축복했다. “생전 처음 보는 우리에게 ‘너희가 한 일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라며 축하해주던 사람들이 기억에 남아요.” 상욱에겐 생경한 경험이었다.

한국에는 동성커플의 법적 지위를 보호하는 법률이나 규정이 전혀 없다. 상욱과 제이슨이 결혼할 즈음, 한국에서는 김조광수 감독과 영화사 레인보우팩토리 김승환 대표가 공개적인 동성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서를 냈지만, 구청은 수리를 거부했다. 혼인은 양성 간의 결합임을 전제로 한 헌법 제36조 1항을 근거로,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부부의 날’인 5월21일,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는 서울서부지방법원에 혼인신고 불수리 처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복신청서를 제출했다. 국내에서 제기된 동성결혼 관련 첫 소송이다. 변호인단은 “민법 어디에도 동성 간 혼인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며 “혼인신고 불수리 처분은 위법하고 부당한 처사”라고 밝혔다.

프랑스, 인정 전 ‘이성커플과 같은 자격’ 운영

“안전(safety).” 제이슨이 결혼을 원한 이유다. 상욱은 결혼한 뒤, 낯선 미국땅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이 나라 시민의 배우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제이슨에 대한 미안함이 커졌다. 제이슨은 상욱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남남일 뿐이다. 한국인의 배우자로서 받을 수 있는 혜택에서 모두 배제된다. 한국은 가족 단위로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돼 있다. 제이슨이 아파도 상욱은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권리조차 가질 수 없다. 동성 배우자의 국적이 다른 경우 ‘생이별’의 위험도 덧붙여진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한가람 변호사는 “한국에서 거주하던 한 프랑스·한국인 동성커플의 경우, 프랑스인 쪽이 비자 문제로 한국을 떠나야 할 상황에 처했다. 프랑스가 동성결혼을 인정하기 전이었지만, 동거 중인 동성커플에게도 이성커플과 같은 자격을 주는 제도(PACS)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러한 관계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성결혼 인정국 (2014년 6월 기준 16개국)

동성결혼 인정국 (2014년 6월 기준 16개국)

상욱과 제이슨은 한국에서도 ‘부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삶의 기반이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국외에서 인정된 결혼이 한국에서도 같은 효력을 지니는지는 ‘국제사법’에 따라 결정된다. 김민중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제사법 제10조를 보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 그 밖의 사회질서에 명백히 위반되는 때에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돼 있다”며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조항에 따라 미국에서 인정한 동성부부 관계를 한국에서 똑같이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룩셈부르크 의회는 동성결혼과 동성부부의 자녀 입양을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승인했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는 룩셈부르크를 포함해 16개국으로 늘었다. 상욱·제이슨 같은 부부도 더 많아질 것이다. 한가람 변호사는 “해외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동성부부 중 한 사람이 한국에 일하러 온다고 생각해보자. 배우자를 한국에 데려오고 싶어도 그에 합당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경우, 각국의 자국민 보호 원칙과도 어긋나므로 외교적 마찰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10월27일 미군 소식지 (Stars and Stripes)는 주한미군 및 군무원들의 동성 배우자들이 미군 내 시설 이용이나 비자 발급 과정에서 차별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연방대법원 판결 이후, 미군의 동성 배우자에게도 다른 군인 가족에게 주는 복지 혜택을 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 등 주둔국에서도 이런 정책 적용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주재 국외 외교관 중에는 자신의 동성 배우자에 대해 이성 배우자에게 적용되는 법적 혜택을 요구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기문 총장의 메시지

제이슨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인권은 당신이 누구이든, 누구를 사랑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적용됩니다.’ 영어로 쓰인 메시지를 들고 있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모습이다. “한국은 반 총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이렇게 성소수자 인권 보호를 주장한다. 그런데 왜 한국은 변하지 않는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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