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HIV와 함께 20년 살아낸 당신, 축하해요

에이즈 감염되고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PL들은 이제 ‘노후’를 걱정하지만…

혐오에서 비롯된 여전한 차별은 사회적 죽음 불러와
등록 2014-06-11 15:38 수정 2020-05-03 04:27
동호씨는 ‘HIV와 함께 살아온 20년’을 축하하는 자리에 친구들은 물론 직장 동료들도 함께해서 더욱 행복했다. 이날 파티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축복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동호씨는 ‘HIV와 함께 살아온 20년’을 축하하는 자리에 친구들은 물론 직장 동료들도 함께해서 더욱 행복했다. 이날 파티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축복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별나다”는 얘기를 들은 별난 파티가 시작됐다. 축사도 별나다.

그의 동갑내기 친구는 말했다. “우리 팔순 잔치 같이 하자.” 파티의 사회를 보던 ‘언니’는 웃으며 덧붙였다. “동호인지, 동순인지, 이 사람이 종로에서 제일 오래 살 거라고 우리가 농담하거든요.” 점잖은 한마디도 있었다. “바이러스 생일이 아니라 사람의 생일이죠.” 김태형 순천향대학교병원 감염내과 교수(전문의)는 그렇게 축복했다. 이어서 동병상련의 형은 웃으며 말했다. “살다 살다 이런 파티는 처음 보는데, 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건강하게 오래 삽시다!”

“팔순 잔치 같이 하자”

광고

미처 눈물의 편지를 준비하지 못한 주인공 동호씨의 답사도 있었다. “이런 파티를 한다니까 ‘너, 참 별나다’ 얘기도 들었죠. 사실 저는 몇 년 전부터 파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숫자 ‘영’(0)을 되게 좋아하는데요. 20년을 잘 버텨온 스스로를 격려하고 축하해주고 싶었어요.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도 하고 싶었고요.” 촛불을 켠 케이크가 들어오고 사회자가 축사를 했다. “동호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그는 마흔이 갓 넘었다. 사실 생일도 아니다. “8월23일날 사고 나서 26일날 들었어.” 20년 전 그날에 대해 동호씨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게이(남성동성애자)잖아. 나도 속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퀴어문화축제 기간에 하는 거야.” 사실 이날 누구의 파티인지 모르고 갔다. ‘20주년 파티’라고만 들었다. 막상 가보니 그가 있었다. 동호씨와 10여 년 전부터 아는 사이다. 오래 만나지 못한 사이에 그가 후천성면역결핍증(HIV/AIDS)과 함께 살아온 지(Living with HIV/AIDS) 20년이 되었다. “살려고 몸부림쳤던 기억밖에 없는 20대”를 통과한 동호씨가 말이다. 지난 6월3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파티의 이름은 ‘Bravo! Positive Life’. 여기서 ‘Positive’는 HIV 양성을 뜻하는 말만이 아니다.

이날 파티엔 초대 가수가 있었다. “2004년 퀴어문화축제 준비를 하면서 동호씨를 알게 됐다”는 초대 손님 지현은 “선물 대신 동호씨의 신청곡을 부른다”며 초대 가수가 되었다. 그의 신청곡은 만국의 게이 애국가 (Over the Rainbow).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의 노래는 무지개 너머 20년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앙코르, 앙코르”를 외치자 지현은 를 구성지게 불렀다. 살짝 취기가 오른 동호씨가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했다. “이날을 언제나 기다려왔어요~.”

가사는 “감히 꿈꾸었던 꿈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고 말한다. 아니, 꿈꾸지 못한 꿈도 현실이 되었다. 1994년 그날 이후 동호씨는 “오늘은 어디서 자지”를 고민하며 20대의 청춘을 보냈다. 그는 감염 초기를 이렇게 돌이켰다. “옛날엔 ‘언제 죽나’ 그랬지. 다들 그때는 ‘10년 안에 죽는다’는 얘기가 많았어.” 그래서 지금 여기에 없는 이가 많다. “에이즈로 돌아가신 분들 기일에 가는 게 너무 싫었다. 갔다 오면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니까.” 동호씨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그렇게 말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 나는.”

광고

‘괜찮다’들 하지만 에이즈는 에이즈

“무심히 버려진 날 위해 울어주던 단 한 사람.” 의 한 줄처럼,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감염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 시절이 지나고, 그래도 손을 잡아준 친구들이 있었다. “사실 이 사람이 이럴 거야 하고 일부러 만들어갔던 것도 있어. 그렇게 해야 나를 지키니까.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면 그 범주에 넣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왔나” 묻는 대신에 “어떤 집에서 살았냐”를 물었다. “2000년 감염인 쉼터에서 독립할 때 30만원 가지고 나왔어. 택시 트렁크에 짐이 다 들어가더라. 그래도 작은 방에 아는 동생들이 와서 밥도 해먹고 그랬지. 다음엔 50만원, 200만원… 지금은 1천만원. 보증금이 늘어났지.” 가족이 없는 그에게 가족이 된 사람도 있다. 에이즈운동을 하면서 만난 한 간호사와 어머니다. “뭐하러 혼자 사느냐, 방세 내는 대로 내고 같이 살자고 그래서 10개월을 같이 살았어. 진짜 가족이 됐지. 명절이면 전은 내 차지라고 남겨두셔. 알아서 부치라고.”

그렇게 동호씨는 ‘HIV와 함께 사는 사람’(PL·People Living with HIV/AIDS)이 되었다. 어감이 이상한 HIV 감염인 대신에 요즘은 ‘피엘’(PL)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이제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건강하지만 내가 피엘인 건 변하지 않아. 그것과 싸워 이기든지 무시하고 지내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돼. 나는 후자를 하다가 전자까지 하게 된 거야.”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고, 잘못된 정보도 고쳐졌으니 인식이 변했을까. “바뀌었지만 피부에 와닿진 않아. 에이즈를 아무리 예쁘게 포장하고 ‘괜찮아 괜찮아’ 해도 에이즈는 에이즈인 거야. 머리 속으로는 위험하지 않다는 거 알지만 내 주변에는 없었으면 좋겠어, 다들 그러지.”

사실 동호씨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끝마다 “예쁘니까”를 달고 사는 그는 아픈 과거보다는 노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기억에 없는 20대를 다시 살듯이 요즘은 클럽도 자주 간다. 비트가 터지면 심장이 “쿵쿵” 하고 뛴단다. ‘사랑밖엔 난 몰라’ 타입인 그에게 물었다. “애인은 많았어?” “기억에 남는 사람은 두셋 정도.” “생각보다 적었네.” “만나는 애 주변에서 (피엘인) 나를 알아보고 걔한테 얘기하는 경우가 있었지. 그렇게 되면 미안하다, 고맙다, 그러고 말았어.” 그렇게 상처를 받았지만 그는 뼛속까지 게이다. “다시 태어나면 안 아픈 게이로 태어나고 싶어. 그게 과한 욕심이라서 안 된다면, 아프더라도 안 알려진 게이로 태어나고 싶어.” 드물게 피엘로 얼굴이 알려진 그는 편견 탓에 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성소수자에게 개방적인 타이 방콕은 해방구였다. “거기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잖아. 클럽에서 시선 의식 안 해도 되고.”

“이거 예쁘지?” 동호씨는 신고 있던 운동화를 가리켰다. 16만원짜리 운동화 한 켤레, 그가 20년을 살아낸 그에게 선물한 것이다. “운동화 비싼 거 안 사거든. 근데 쇼핑하러 가서 봤는데 정말 예쁜 거야. 같이 간 사람이 ‘선물하겠다’고 하는데 ‘괜찮다’고 했어. 그런데 자꾸 눈에 밟혀. 결국 나한테 선물했어.” 일하고 배우면서 30대를 달려온 동호씨는 1999년 만든 감염인 인터넷 커뮤니티를 여전히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상담 내용도 변했다. “예전엔 ‘죽어요’ 하는 내용이 많았지. 요즘은 해외 출장이나 유학을 가는데 가능하냐, 이런 실생활 관련 내용이 많아. 나도 몰랐는데, 예전에 상담받았던 사람들이 다른 피엘한테 위안을 주고 있더라.”

광고

[%%IMAGE2%%]

손문수씨도 동호씨처럼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다. 그는 한국 HIV/AIDS 감염인연합회 KNP+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이런 파티는 처음”이라고 축하했던 사람이다. 한국의 피엘 당사자 운동의 시작은 늦었다. 그만큼 사회적 편견이 심하단 방증도 된다. 2011년 부산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ICAAP)’를 계기로 만들어진 KNP+는 올해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손 대표를 비롯한 이들이 당사자 모임을 만든 이유는 이렇다. “당장 (감염) 통고를 받았는데 돈도 없고 가족도 멀어진 경우가 많아요. 혼자 다 알아서 해야 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원스톱으로 그런 정보를 주고, 차별도 막으려고요.” KNP+는 다양한 당사자 모임이 모여서 결성됐다. 당사자들의 자조 모임으로 시작한 인터넷 카페, 대구·경북 지역 감염인 모임, ‘청소년·청년 감염인 커뮤니티 알’ 등이 함께 KNP+를 만들었다.

일상 속 HIV, 어느새 ‘내가 감염인’?

손문수 대표도 내년에 감염 20년을 맞는다. 그는 “초기엔 무덤덤했는데 2~3년이 지나면서 방황하기 시작했다”고 돌이켰다. “당시엔 병원에 가야 다른 감염인을 만났어요. 그런데 저처럼 건강한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다들 말기야. 그걸 보면서 우울해졌어요. 어차피 죽을 거, 봉사나 하자 해서 차를 끌고 전국 복지관마다 다녔죠.” 서너 해가 지나자 방황도 잦아들었다. “4~5년 지나면 피엘이란 사실이 일상으로 들어와버려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느끼니까. 내가 누구였지, 피엘이었는지도 잊을 정도로.” 그렇게 안정을 찾으며 결심했다. “이까짓 바이러스가 내 육체를 쥐고 흔들고 나를 장악하게 하지 말자.” 2003년 동료 간병 상담교육을 받으며 건강한 피엘들을 만나고 세상과도 만났다. 정보에서 소외된 피엘을 위한 인터넷 카페 ‘건강 나누리’를 만든 것이다.

그는 HIV/AIDS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죽고 사는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왜곡된 정보로 자포자기해서 병을 방치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인터넷도 잘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정보가 절실하죠. 우리 목표 중 하나는 지역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예요. 보건소와 연계해서요.” 이제는 관리 가능한 병이 됐지만, 초기에 왜곡된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잘못된 정보를 광고 등을 통해 전파한 정부는 바뀐 현실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 동호씨는 “예전에 빨간 글씨로 ‘에이즈 걸리면 죽는다’고 쓴 포스터가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혐오로 감염인을 가두지 마세요

건강 나누리 카페의 피엘들은 야외 모임을 갖고 같이 여행도 다닌다. 손 대표는 “마음의 병을 키우는 사회”를 비판했다. “병은 자랑하라고 했는데, 남들 앞에서 아픈 얘기를 못해요. 말 못할 병을 마음에 품고 있으니 병을 키우게 되죠. 모여서 얘기를 하면 많이 치유돼요.” 그렇게 생물학적 죽음보다 사회적 죽음이 남은 문제가 됐다. 여전히 문제는 차별을 부르는 혐오다. 혐오는 혐오를 당하는 사람조차 혐오를 내면화하게 한다. 혐오에 포위당한 감염인은 치료를 방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HIV/AIDS와 함께 살기’는 어렵다. 이런 현실이 있어서, 올해의 퀴어문화축제 슬로건은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로 정해졌다.

손문수 KNP+ 대표는 “노후에는 시골에서 피엘들이 함께 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도 막연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올해로 52살인 그에게 노후는 먼 얘기가 아니다. 이처럼 ‘감염인의 노후’라는 형용모순처럼 들렸던 말이 중요한 현실이 되었다. ‘HIV/AIDS와 함께 살기’는 더 이상 선언적 문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회다. 이미 감염인은 HIV/AIDS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한국 사회는 과연 이들과 함께 살 준비가 돼 있는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