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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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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짜 시절 받은 경쟁 회사 사장의 질문 “유능한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까, 훌륭한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까”
재판에 유리하지 않은 진실은 확인할 필요 없는 질문일까
등록 2014-01-08 04:24 수정 2022-08-12 13:39
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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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게… 낫겠죠?”

재판을 진행하면서 의뢰인과 함께 변론을 준비하다보면 가끔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된다. 진실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진실’에도 약점이 있기 마련인데 변호사로서는 ‘재판에서 그 부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해 조언하고, 의뢰인도 이에 수긍한다. 또는 의뢰인이 먼저 그렇게 의논해오기도 한다. 상대방에게 공격의 빌미를 줘서 자칫 우리 주장 전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맞기보다는, 일부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공개된 기술을 혼합한 것” 주장

‘진실이 무엇인가’가 주된 직업적 고민이다보니 이같은 과정은 때론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그럴 때면 문득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10여 년 전 요즘같이 추웠던 날, 서울 천호동인가 기억도 아련한 동네로 재판부와 당사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현장검증을 하던 그 장면이 겹쳐 떠오르는 사건.

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 변호사였다. 물론 의욕만은 누구 못지않았다. 그 사건의 의뢰인은 은행 등에 현금지급기(ATM)를 공급하는 회사였는데, 경쟁 기업이 판매하는 현금지급기가 의뢰인 회사의 실용신안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용신안권이란 특허로 보호되는 발명보다는 기술적 수준이 낮지만, 나름대로 보호 가치가 있는 창조적인 고안에 관한 독점권을 말한다. 특허권 보호와 유사해서, 실용실안권자는 자신이 개발해 처음으로 등록한 고안을 일정 기간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의뢰인의 권리는 현금지급기 회전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은행 직원이 현금지급기에 돈을 채워넣으려면 기기를 끄집어내 돌린 뒤 뒤쪽 시정 장치를 열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의뢰인 회사가 개발한 고안은 현금지급기를 빼지 않고도 좁은 공간에서 지급기의 일부를 회전시켜 돈을 넣고 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편리한 기기였다.

은행들은 기존 현금지급기를 이 편리한 현금지급기로 점차 바꿔가는 중이었고. 의뢰인 회사의 매출은 점점 늘어났다. 그 와중에 경쟁 회사가 이 고안을 모방해 판매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뢰인은 경쟁 회사의 판매를 금지하는 내용의 가처분을 의뢰해온 것이다. 법원의 가처분 결정만으로 바로 판매를 금지하게 되므로, 법원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단기간에 가처분 심문 기일을 두세 번 열어 사건을 심리했다. 경쟁 회사가 항변하는 주된 내용은 ‘현금지급기에 사용된 기술은 국내외에 공개돼 있던 기술을 혼합한 것인데다, 출원 전에 이미 그 기술을 적용한 제품이 시중에 유통됐으니 그 기술에 독점권을 보장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경쟁 회사는 ‘출원 전에 제품을 생산·유통한 회사 중 하나가 바로 의뢰인 회사’라는 주장도 곁들였다. 나는 선배 변호사와 함께 거의 밤을 새워가며 상대방이 제출한 외국 문헌 자료상의 기술적인 내용을 분석하고, 이 기술을 적용한 현금지급기가 출원 전부터 거래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법원은 우리 손을 들어줘 가처분 결정을 내렸고, 결국 경쟁 회사의 현금지급기 제작·판매는 중단됐다. 가처분 결정을 받았을 때는 그간 고생한 만큼 뿌듯함을 느꼈다. 의뢰인 회사로부터도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그 결정에 대해 경쟁 회사가 이의를 신청해 다시 재판을 준비하던 어느 날, 난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놀랍게도 경쟁 회사의 사장이 보낸 편지였다. 지금 기억하기로, 흰 종이에 손으로 꼼꼼히 정성 들여 썼던 그 편지의 대강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변호사님 보세요. 그 기술은 출원 전에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겁니다. 그쪽 회사도 기술을 조합해 제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러다 혼자만 독점하려고 실용신안을 낸 것인데 왜 진실을 외면하나요. 이번 가처분으로 판매금지가 길어지면 영세한 우리 회사는 금방 문을 닫게 될 겁니다. 변호사님은 소송만을 이기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진실을 밝히는 훌륭한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까.’

“영세한 우리 회사는 금방 문을 닫게 됩니다”

난 다소 당황했다. 소송 상대방의 편지를 받은 것이 처음인데다(요즘도 그런 일은 거의 없다) 그 내용이 마음에 많이 걸렸다. 절절함 못지않게 진실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주장하는 ‘진실’에 관한 증거는 없었다. 난 의뢰인의 말을 ‘진실’로 믿고 최선을 다해 변론해야 하는 처지였다.

가처분 이의 절차가 법원에서 진행될 때, 경쟁 회사는 서울의 한 은행 지점에 현장검증을 신청했다. 그곳에 오래된 현금지급기 한 대가 있는데 실용신안 출원 전에 문제가 된 그 기술을 적용해 제작·판매한 제품이라는 것이다. 무던히도 춥던 그날 재판부 판사와 직원들, 그리고 양쪽 당사자들과 변호사들이 모두 그 은행을 찾아갔다. 은행의 양해를 얻어 현금지급기를 끄집어내 내부를 살폈다. 의뢰인의 실용신안권 대상이 된 고안과 구조가 같았다. 납품 일자를 보니 출원 전의 시점이었다. 결국 법원은 가처분을 취소했다. 경쟁 회사가 이긴 것이다. 하지만 의뢰인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은행들과 대부분 공급계약을 마쳐서 큰 영향은 없을 것 같아요.” 경쟁 회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장의 말대로 가처분 이의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벌써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 재판 초기 상대방이 ‘가처분 신청인 회사(의뢰인)도 출원 전에 해당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고 주장했을 때, 그 사실을 부인하는 의뢰인에게 난 딱히 더 묻지 않았다. ‘재판에 유리하지 않은 진실’은 ‘확인할 가치가 없는 진실’이었을까.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사건 뒤로 지금까지도 내가 그때 받았던 편지에 쓰인 문구를 잊지 못하는 건 여전히 내가 ‘유능한 변호사’도 ‘훌륭한 변호사’도 아니고 갈팡질팡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영화 <변호인>이 인기이지만 ‘오직 진실의 편에서 정의를 외치는’ 변호사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기회를 만나는 것도, 그럴 때 용기를 내는 것도 항상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법원에도, 그리고 변호사에게도 말이다.

류신환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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