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열여덟에 아버지를 여의고 상경했다. “속옷 한 벌, 신문 하나, 책 한 권 들고 서울에 갔다.” 서정민씨는 아내에게 무용담처럼 말하곤 했다. 공부를 작정한 뒤 ‘고학’은 그의 운명이었다. 스무 살, 재수학원에서 마룻바닥을 닦으며 수업을 들었다. 대학 입학 뒤 새벽엔 신문을 나르고 낮엔 공사장에서 벽돌을 날랐다. 학비를 벌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돈이 있으면 학교에 다니고 돈이 떨어지면 휴학했다.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 좋았다. 박사가 되고도 8년을 경주했다. 언젠가 자신의 자리가 생기리라 믿었다. 그 믿음조차 깨졌을 때, 그는 펜을 꺾었다. “한국의 대학 사회가 증오스럽습니다.” 2010년 5월25일 저녁, 광주 조선대 영어영문과 시간강사였던 서정민(당시 45살) 박사는 마지막으로 펜을 들어 그렇게 썼다. 비분강개를 견디지 못해 그날 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전례 없는 천문학적 수치’의 대필</font></font>“교수 한 마리(자리)가 1억5천만원, 3억원이라는군요. 저는 두 번 제의받았습니다.” 시간강사의 유서에 적힌 적나라한 폭로는 대학사회를 들쑤시기에 충분했다. “조아무개 교수와 쓴 모든 논문은 제가 쓴 논문으로 (조 교수는) 이름만 들어갔습니다. 저는 스트레스성 자살입니다. 조 교수를 처벌해주세요.” 숨진 서씨는 유서에 또박또박 적었다. 자신의 석사 논문을 지도한 인연으로 15년 가까이 함께 연구했던 영문과의 조아무개 교수 명의의 논문들은 물론이고 그 제자들의 학위 논문에도 서씨가 관여했다는 주장이었다. “교수님과 함께 쓴 논문이 대략 25편, 함께 발표한 논문이 20편, 교수님 제자를 위해 쓴 논문이 박사 1편, 학진(학술진흥원) 논문 1편, 석사 4편, 학진 발표 논문이 4편입니다. 한국의 대학이 존재한 이래로 전례 없는 천문학적인 수치입니다.”
구체적인 인물과 내용을 적시한 유서는 파급력이 컸다. 유서가 공개되고 파문이 확산되자 조선대는 곧 보도자료를 내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정확한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했다. 경찰도 철저한 수사를 약속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고등교육법’을 개정해 시간강사의 지위와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서울대 백준희 박사(2003년), 건국대 한경선 박사(2008년) 등 숱한 연구자들의 죽음 이후에도 지지부진했던 시간강사 문제의 출구가 곧 열릴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대중의 관심이 멀어지자 떠들썩한 맹세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조선대가 학내에 꾸린 ‘서정민 시간강사 관련 진상조사위원회’는 2010년 9월28일 “지도교수가 아이디어를 제공했는데도 서정민 시간강사가 (논문을) 전부 쓰고 대필을 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며 대필 의혹을 부인하는 결론을 냈다. 곧이어 경찰도 “논문 대필도, 채용 비리도 사실이 아니다”라며 ‘혐의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충격적 유서에 전율했던 세상은 그 후일담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난 5월 서씨의 아내 박경자(48)씨가 남편의 지도교수와 대학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퇴직금 청구 및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꼭 3년 만이었다. 12월4일 첫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끔찍이도 아이들을 생각하던 사람이 어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천 번을 생각했어요.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아무리 힘들더라도 진실을 밝혀주고 싶었어요. 아이들도 ‘아빠가 고생해 쓴 논문을 아빠 이름으로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요.” 지난 11월20일 광주에서 만난 박씨는 2시간여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눈물을 떨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반론은 ‘증언’으로, 유서는 ‘주장’으로</font></font>서씨가 떠나고 가족은 무너졌다. 2000년 3월 첫 임용 뒤 10년 넘게 몸담았던 조선대로부터는 어떤 위로나 보상도 없었다. 기습 같은 상실에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박씨는 식당 일을 나갔다.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던 아들과 재수생인 딸을 돌보는 것이 박씨의 몫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였다. 조선대에서 남편의 유서 내용을 부정하는 보고서가 나와도, 경찰이 불러 “유서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돌이켜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때는 경찰이 말하는 뜻을 잘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대에서 나온 조사 결과를 토대로 경찰도 수사의 결론을 내렸더라고요.”
서씨가 주장한 50여 편의 대필 의혹 논문에 대한 조선대의 진상조사는 그해 6월1일부터 9월28일까지 4개월여 동안 단 6차례 회의를 거쳐 마무리됐다. 유족이 “논문의 방대한 양에 견줘 부실한 조사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이유다.
당시 조사위원회가 학교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대필 의혹 혐의를 받고 있던 조 교수의 반론은 ‘사실에 가까운 증언’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미 세상에 없는 서씨의 유서는 ‘주장’으로 처리됐다. 서씨가 유서에서 ‘조 교수는 논문에 이름만 올렸을 뿐, 실제로는 내가 썼다’고 주장한 대목에 대해, 조 교수는 진상조사에서 “(본인이) 논문의 주제 선정, 논문 자료 제공, 관련 자료에 대한 공동 검토, 논문 방향 제시, 수정 및 교정 작업을 수행했다”고 답했다. 양쪽의 주장이 엇갈리는데도 조사위는 “유서와 조아무개 교수의 주장을 참조해볼 때, 서정민 시간강사는 논문의 내용을 정리해서 초안을 작성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인이 논문을 다 쓰고 대필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결론 내렸다.
[%%IMAGE2%%]유족의 법률대리를 맡은 이용우 변호사는 “고인의 경우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논문 대필을 중심으로 학사 업무를 강요하는 일이 누적적으로 반복돼온 과정에서 결국 자살에 이른 것”이라며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지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미 고인이 세상을 떠난 상황인 만큼 증거를 입증하는 일이 소송의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조사보고서에서 ‘관례’와 ‘추정’은 쉽게 ‘사실’의 자리를 대신했다. 서씨가 박사 학위를 받은 2002년 이후 2005년까지 쓴 9편의 논문을 보면 연구책임자는 조 교수로, 서씨는 공동연구자로 표기돼 있다. 2006년 이후 쓴 13편의 논문에서는 1편을 제외하면 모두 서씨가 제1저자로 표기돼 있다. 이에 대해 조사위원회는 “(서울대) 황우석 박사 사건이 있었던 2005년 이전에는 지도교수를 고맙게 생각하고 같이 이름을 올리고 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서 그 당시 관례상 먼저 지도교수 이름을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조 교수는 이미 1993년에 정년이 보장된 교수로 승진했기 때문에 자기가 기여하지 않은 논문 23편에 자기 이름을 올려 연구실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고도 적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학교 쪽은 조 교수가 제1저자로 이름을 올린 2009년 발표 논문 1편에 대해서만 “문제가 있다”며 조 교수에게 3년 이내 교내연구비 신청 제한 등의 경징계 조처를 내놨을 뿐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침묵 ‘이유’였던 아들은 뇌수막염으로 쓰러져</font></font>애초에 조사위원회 구성과 참고인 선정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동애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대학교육정상화투쟁본부장은 “사건 참고인들이 대부분 당사자인 조아무개 교수의 제자들이거나 동료였고, 조사위원들은 또 다른 사건 당사자인 ‘사용자’ 조선대에 고용된 교수들이므로 조사가 공정하게 이뤄질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조사위원회는 당시 조선대 교무처장을 중심으로 5명의 학내 교수들로 꾸려졌다. 진상조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8명은 조 교수의 지도를 받은 석·박사 학위자들이거나, 조 교수를 중심으로 운영된 교내 연구모임 회원들이었다. 김 본부장은 “교내에 이해 당사자가 있는 사건인데 학내에서만 조사위원과 참고인을 선택한 것은, ‘공동연구’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수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같은 논란에 대해 조선대 쪽은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그때 학교에서도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심쩍은 조사 결과를 받아들고도 서씨의 아내가 3년이나 침묵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송사에 얽히면 해사 생도로 장차 군인이 될 아들(25)의 발목을 잡을 것 같았다. 아들이 임관하고 나면 남편의 명예를 지켜주려 했다. 박씨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2011년 4월 아들 서씨마저 뇌수막염으로 쓰러졌다. 1년 가까이 병원에서 지냈다. 마지막 편지에서 서씨가 “깨질까 해서 내 딴엔 가슴에 안고 살았다. 우리 아들은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한 자식이었다. 아들 서씨는 퇴원 뒤에도 단기 기억상실과 간질 증세로 일상생활이 어렵다. 결국 지난 3월 강제 전역됐다. 기초생활급여와 박씨가 식당에서 받는 급여로 세 식구가 빠듯한 살림을 이어가고 있다.
무너진 삶 가운데서 박씨가 바라는 것은 다만 명백한 진실이다. “(조 교수가) 저한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10년 넘도록 애들 아빠가 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공부하다 몸이 만신창이가 됐어요. 그래도 오로지 교수님의 말씀만 무조건 복종, 순종하던 사람이에요. ‘내가 정년퇴임하면 그 자리는 서 박사 자리다.’ 그 한마디에 15년을 그렇게 산 거예요.”
광주=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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