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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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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 인용의 사회?

“시 한 연 인용에 3만8120원” 꼼꼼하게 매겨진 시의 가격
시인의 권리가 역설적으로 시의 몰락을 가져오진 않을까
등록 2013-11-21 05:31 수정 2020-05-02 19:27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팔려가기 전날 소의 눈망울”, “비오는 날 공중변소에 적힌 낙서들”(이성복, ),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같은 것들.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형용하며, 보이지 않는 사물의 배후를 꿰뚫는 ‘견자’(見者), ‘시인’의 다른 이름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시인의 노동에 값을 매길 수 있을까. 시를 사고파는 데 적정가격이 있다면, 시를 빌려 쓰는 데 알맞은 값은 도대체 얼마일까. 시집의 가격이 그 온전한 대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가치를 따질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에 매몰찬 시장의 가격표가 붙는 순간에도, 시는 여전히 비의로 남을 수 있을까.

“지식은 공유하기에 소중한 것”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다시는 저서에 시를 인용하지 않으리라.” 그는 얼마 전 결심했다. 발단은 지난 11월 초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출간 준비 중인 책에 인용된 시의 저작료를 내야 한다”는 출판사 편집자의 연락이었다. 1편에 6만원씩 값을 매겨, 인용된 시 8편의 저작료가 세금까지 52만8천원이라고 했다. 30여 권의 책을 출간한 ‘전문저자’이지만 인용의 대가는 처음 듣는 일이었다. 인용한 시들은 모두 2줄 남짓한 분량이었다. 이 교수는 시를 모두 삭제했다. 그리고 개탄했다. “이젠 시가 미시적 인용마저 색출하는 저작권의 첨병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문제는 사용료의 높고 낮음이 아니다. 시인들이 쌓은 권리의 장벽이, 시를 고립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지식은 공유하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시 전문을 인용한 해설서라면 상업적 이익을 취한 것이겠지만, 출처를 밝히고 두어 줄 인용한 것을 두고 사용료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지요. 어설픈 계산이 시와 시인들을 저주와 절망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이진경 교수)

당장 시에 배반당한 독자들의 원성이 들린다. “출판사는 죽은 시의 시체나 보관하고 있는 겁니다. 시의 진정한 소유권은 출판사나 저자가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관용(50)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남선경(41)씨는 “저작권 보호라는 개념이 ‘무단 전재·복제’를 금하고 공유를 허한 저작물도 출처를 밝히라는 예의 차원일 텐데 이걸 무한정 확장해서 이익과 손해로만 접근하다보니 세상이 너무 팍팍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저작권’과 ‘홍보 효과’의 경중

저작권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에 대한 배타적 권리다. 시인의 저작권을 부정할 이는 없다. 사반세기 전인 1988년, 시인을 비롯한 문인들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저작권협회)가 생겨났다. “학자와 문인들이 선비적이고 소극적이며 쫓기는 생활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권익을 주장하기보다는 체념하는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이 설립의 변이었다. 저작권협회는 가입한 회원들의 위탁을 받은 저작물의 사용을 감시하고, 사용료를 징수해 문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시·소설·사진·미술 등의 분야에서 36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저작권이 ‘집중 관리’되면서 시의 사용료도 연과 행에 따라 촘촘하게 책정됐다. 저작권협회의 올해 ‘저작권 사용료 징수 규정’을 보면, 일반 단행본에 시 한 편을 전부 인용할 경우 사용료는 6만3530원이다. 1연이 넘지 않게 인용해도 3만8120원, 2연은 넘지만 절반이 넘지 않게 인용하면 5만820원을 내야 한다. 학습 참고서에서의 인용은 3분의 1 정도로 싸다. 한 편 전부 인용할 땐 2만1600원, 1연을 인용할 땐 1만2710원이 적용된다. 출판사들도 대개 저작권협회의 가격 기준을 따르고 있다.

“시를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1980년대 후반에 등단한 중견 시인 ㄱ씨는 저작권협회의 취지에 일부 공감한다. 대형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그이지만, 사는 일은 여전히 궁색하다. “저작권이 인정되면 시를 쓰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쓸 수 있겠지요. 저는 사는 일이 힘들어서, 시인의 권리를 지켜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ㄱ씨는 아직 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애바르게 돈 구할 일을 찾아나서는 것은 시인의 천질이 아니었다.

시인에게 가난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시인 천상병은 “가난은 나의 직업”(‘나의 가난은’)이라고 적었고, 김광균은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노신’)고 한숨 쉬었다. 그보다 오래전 박목월도 “(시는) 나만 쳐다보는 어린 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모일’)이라고 자조했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시란 결국 벗지 못할 멍에였고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온 생활의 노래”(김광균)였다.

10여 년 전 ‘창비’ ‘문지’ 같은 대형 출판사가 저작권 규정을 마련할 때 염려한 것도 다만 저자의 처지였다. 창비 저작권 담당자는 “시가 널리 사랑받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 놓칠 수 없는 문제이나 저작권 제도는 저자들의 창의성, 시인의 저작권을 보호하려 생각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지 저작권 담당자 역시 “‘저작권자의 이익’과 ‘홍보 효과’의 경중을 가늠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가 팔리지 않는 시대에, 시인이 취할 얼마의 이익보다 중요한 것은 시의 생존이라고 믿는 시인들은 굳건하다. 1980년대 후반에 등단한 ㄴ 시인은 국어 교과서에 자신의 시가 실린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작품 재수록 계약을 대행하는 유일한 단체인 협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도서로 출판되지 않은 시의 저작권료를 받을 수 없다. “아직 망설이고 있어요. 거기 가입하면 혹시 내 시를 인용해 쓰고 싶은 사람들이 저어하지 않을까 해서.”

시인인 정끝별 명지대 국문학과 교수는 “독자의 사랑을 받는 시의 편중이 심하다. 시가 위기를 겪는 이런 때에, 오히려 시를 인용해주면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에 등단한 ㅂ 시인의 의견도 비슷하다. “내가 쓴 시의 저작권료를 받아야 한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 그런 (인용의) 형태로라도 내 시를 읽어준다면 시인에게도 좋은 일이고 출판사에도 좋은 일이죠.”

저작권자 시인의 통제 벗어나기도

모든 인용에 ‘사용료’가 징수되는 것은 아니다. ‘공짜 인용’이 가능한 영역도 있다. 보도·비평·교육·연구 등을 위해서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인용할 수 있다(저작권법 제28조). 보도나 비평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는 시의 전문을 인용해도 된다는 뜻이다. 신문·잡지 등에 시를 인용할 때는 시를 ‘소개’하는 경우에만 사용료를 받지 않는다. 다만 ‘정당한 범위’와 ‘공정한 관행’의 기준이 없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원작과 평론 부분의 비율, 인용 대상 저작물의 판매량 및 유통에 미치는 영향 등이 그 인용의 공정성이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역시 애매하다. “결국 저작권을 실제로 집행하는 출판사 마음이 되고 말 게 뻔하다. 마음에 드는 글은 돈 안 받고, 마음에 안 드는 글은 돈 받고.”(이진경 교수)

가격 기준 또한 모호하다. 대부분의 대형 출판사는 저작권협회의 금액을 기준 삼아 내부 규정을 두고 있다. 대개 시 한 편 전문을 인용하면 출판사에 돌아가는 수수료 3만원을 포함해 9만원 정도의 재수록료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의 출판사에서 시의 사용료는 대체로 일괄 적용된다. ㄹ 시인은 “출판사가 수수료를 3만원이나 취하는 것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별도의 저작권 부서가 없는 군소 출판사는 저작권 관리에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인문 서적을 주로 내는 출판사의 한 편집자는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시집을 인용하고 싶다고 허락을 구해올 경우 저자와 협의해 결정하곤 하는데 사용료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시인 스스로 인용 범위 대가 논할 필요

저작권의 이익을 보는 것이 진정 시인인지도 톺아볼 문제다. 때로 저작권이 저작권자인 시인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한다. 한 대형 출판사는 “저자와의 협의를 통해 다른 사용자들의 자유로운 인용의 범위를 정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론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다. “개인적으로 직접 인용 허락을 구하는 지인들도 있거든요. 제가 흔쾌히 동의해도 일부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된 시의 경우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어요.”(ㄴ 시인) 2011년 2월에는 저작권협회가 회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저작권을 행사해 도종환 시인 등 17명의 작가가 규탄 성명을 내기도 했다. 작가들은 당시 성명에서 “협회가 해당 작가와 협의도 없이 제3의 출판사에 창작동화전집 출간을 허락함으로써 다른 출판사에서 판매 중인 작품 41권이 중복 출간됐다. 협회는 작가가 원하지 않는 계약을 종용하거나 협의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작가에게는 탈퇴서를 보내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양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병일 진보넷 활동가는 “창작자의 의사에 반해 저작물이 사용되거나 또는 사용이 불허된다면, 창작자의 권리가 오히려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모아 저작권법을 좀더 세밀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제라도 시인들 스스로 다시 적절한 인용의 범위와 대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에 대한 시인의 ‘자기결정권’을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에 대한 의견이 다른 만큼, 그 권리에 대한 기대도 저마다 다르다. “하나의 문장도, 저자 고유의 권리로 지켜줘야 한다. 띄어쓰기 하나까지 깊이 고민하니까.”(ㄱ 시인) “연구나 비평 목적의 인용은 오히려 활성화했으면 싶다. 시 선집같이 시 전문에 주석을 붙여 소개하는 경우처럼 상업적인 목적일 때만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이 맞다.”(ㅂ 시인) 출판사도 대안을 모색 중이다. “시인의 저작권을 보호하려 출판사들이 생각해낸 방안이 편협하고 일차원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도 좀더 현명한 방안을 생각해봄직하다.” (창비 저작권 담당자)

다만 무엇보다 앞서 고려돼야 할 것은 시의 본질이다. “그들의 흔들리는 비참과 울분을 굳건한 저작권의 계기로 상상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눈물겨운 현장을 저작권의 마르지 않는 우물로 들여다보지는 않는가”(송경동, ‘저작권’)라고 회의한 어느 시인의 결벽을 굳이 돌아보지 않더라도, “시는 지상의 모든 버림받은 것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주는 거룩한 손”(이성복, )이므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쓸쓸함을 포기할 때 예술은 다만 세속의 장식품이 될 뿐”(이성복, 같은 책)이므로.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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