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법·제도에 매인 순간 인권은 죽는다”

최은아·박경석·한채윤·김덕진 인권운동 20년을 말하다…“공중전 그치고 지상으로 더 내려가야 한다”
등록 2013-10-23 02:19 수정 2020-05-02 19:27
1

1

끝자리까지 딱 맞춘 20년. 올해 2월 천주교인권위원회, 9~10월 노들장애인야학과 인권운동사랑방이 20주년을 맞았다. 여기에 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출발인 초동회도 생긴 지 20년이 지났다. 노들장애인야학 창립과 함께 인권운동을 시작한 박경석 대표가 20년, 1994년 인권운동사랑방에 왔지만 1993년 천주교인권위에서 활동을 시작한 최은아 활동가도 20년,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는 17년 인권운동을 해왔다. 10월3일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좌담회를 했던 날, 김덕진 천주교인권위 사무국장은 “개천절이라 기억이 나는데 오늘이 천주교인권위 시작한 지 딱 11년”이라고 말했다. 동종 업계 사람들이 모였으니, 급여 얘기가 나왔는데 이들 중 최고 연봉은 월 150만원이었다는 것만 밝힌다. 남들은 쉬는 개천절, 휴식을 빼앗은 무도한 좌담회, 경남 밀양에서 미류 사랑방 활동가가 연행됐다는 소식으로 시작했다.

인권운동 경력, 넷이 합쳐 68년
1

1

사회 당시에 시작된 이유가 뭘까.

최은아(이하 최) 한국 사회가 87년의 격변을 지나면서, 여성이나 환경 같은 다양한 부문 운동이 생기던 때였다. 인권운동도 감옥 가는 사람들 탄원서 써주는 운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색을 해보자는 시기였다. 서준식 선생이 전민련 인권위원회를 하면서 인권이 수단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다는 새로운 비전을 봤던 것 같다.

박경석(이하 박) 우리는 흐름이 좀 다른데. 장애인판에서도 시민사회류의 단체는 커지고 민중운동 지향은 위기였다. 우리도 그 기류에 있었다. 어떻게 안 망할까 하다가 현장에서 사람을 조직하자고 하면서 야학을 만들었다. 이전의 명망가·전문가 중심 운동에 반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들이다.

사회 퀴어운동이 이즈음에 시작된 것이 우연일까 필연일까.

한채윤(이하 한) 필연이 아닐까. 미국에 유학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종로의 게이바라든가 운동하려는 레즈비언이라든가 내부에 역량이 있었다. 처음엔 게이와 레즈비언이 초동회라는 이름으로 같이 활동하다가, 각각 단체를 만들어 게이모임 친구사이와 레즈비언 단체 끼리끼리가 생겼다.

사회 사실 인권이란 말 자체가 실체가 없지 않나. 인권 앞에 무슨 말을 붙여도 된다.

극단적으로는, 가해자 인권이란 말도 있다.

사회 뭘 하고 안 할지 결정하기도 힘들었겠다.

김덕진(이하 김) 요즘엔 교도관이나 경찰을 만나면 자기들 인권침해 당한다고 한다. 공권력 인권, 공무원 인권이란 말도 생길 수 있다.

사랑방이 진보적 인권이란 말을 한 이유도 그거다.

사회 인권운동가들은 시민사회 기준보다 급진적이란 말도 듣는다.

까칠하다고 한다. 다른 운동을 폄훼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타협할 수 없는 기본적 원칙이 있다. 다양한 의견이나 방식이 있을 수 있지만, 사형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인권운동 안에서 용납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이른바 인권대통령도 있었고, 국가인권위도 생기면서 인권이 경합적 가치가 됐다. 당시 인권운동이 진보적 인권운동이란 가치를 선명하게 내세우면서 인권이 법과 제도에 갇히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억압에 저항하는 힘이 인권이다. 반차별, 소수자 감수성도 더해지고. 그래서 다른 운동에도 쟤들은 조심해야 돼, 그런 정서도 생겼나보다.

우리가 가진 상처도 많다. 대중단체가 인권운동을 기능적으로 활용하거나 구색 맞추기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부자의 인권? 가해자 인권?
1

1

사회 요즘엔 싫어할 권리도 권리라고 주장한다. 퀴어인권운동은 특히 그런 벽에 부딪히겠다.

장애인·성소수자는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렇게 밀려난 소수자들이 우리도 인간이라고 주장하면 부정할 수 없다. 우리도 눈·코·입 다 있으니까, 인간인 거 맞잖나. 이렇게 부정할 수 없으니 요즘엔 어떻게 맞대응하냐면, 인권은 다 있는 걸로 하자고 한다. 부자도 강자도 인권이 있는 걸로. 여기에 민주주의 논리를 앞세워 ‘너희는 소수인데 다수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뭐가 문제냐? 배려 정도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 한다.

김조광수 커플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좀 조용히 하지, 배려를 넘어 요구가 너무 많다고 하더라.

묻고 싶다. 언제 혐오할 권리가 없어서 혐오 못했냐고.

사회 장애인에 대한 반발도 있잖나. 비장애인도 권리가 있다고 하는.

반발보다 아예 불쌍하게 취급한다. 혐오성을 드러내지 않고 사랑으로 나타낸다. 미국이 인권국가라고 하지만, 장애아가 태어나기 전에 몰래 부모가 죽여버린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 이것보다 극단적인 혐오가 어디 있나. 근데 사회는 그런 부모를 이해하고 동정한다. 오죽하면 그랬겠느냐고.

사회 이동권 투쟁할 때, 목에 쇠사슬을 묶고 그랬다. 요즘은 달라졌나.

1

1

돈 때문에 못한다. (웃음) 노들하고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가 2001년부터 벌금만 수억 갖다줬을 거다. 벌금만큼 무서운 탄압이 없다.

사회 그래도 소수자 인권은 나아지지 않았나.

저상버스 생기고 물리적 조건은 나아졌다. 활동보조 서비스 같은 것도 제도화됐다. 비장애인 인권 수준이 0이라면, -70까지는 올라왔다. 그러나 빈곤 문제가 남아 있다. 가난 앞에서 누구도 인권을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투쟁해서 장애인차별금지법, 국가인권위도 만들었지만 그것이 운동을 편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과 국가가 운동을 빨리 포섭하고 분열을 조장한다. 소수자 영역은 더욱 치명적이다.

사실 차벽·물대포도 이명박 정권에 ‘짠’ 하고 등장한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은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평화집회 담론을 유포하고 집시법도 교묘하게 개악했다. 민주정부하에서 마치 다른 경로가 있는 듯한 환상이 유포되면서 우리가 잘 싸우지 못했다. 성찰할 부분이다. 희망버스가 있기는 했지만 조직화된 대중의 힘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운동이 후퇴하고 있다.

예전이라면 관제 데모라고 했을 집회에 자발적 참여가 늘어난다. 자본론 강사를 고발하고 빨갱이를 고발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동성애를 비하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이것이 더 두렵다.

“가장 힘센 권력 감시하는 게 인권운동”

사회 인권운동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변화에 인권운동이 발빠르게 대처하기 힘들었다. 북한 인권이라는 담론은 완전히 뺏겨버리고, 그들이 인권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이제는 다른 인권 얘기도 한다. 현안에 묻혀서 한두 해 보내면 어느새 새로운 이슈가 나타나고.

우리가 한발씩 늦었다. 저쪽이 빠르다. 동성애 이슈도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 띄운 것이다. 왜 우리를 택했을까? 사상보다 성이 모든 국민에 걸쳐 있는 문제다. 성으로 이슈를 만들면 바로 도덕과 연결된다. 그래서 혐오가 뜬다. 혐오의 정당성은 내가 더 도덕적이라는 것에서 나온다. 내가 더 건전한 사회를 만들고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프레임을 바꾸어버렸다.

물론 인권운동이 사회 변화에 기여한 바는 있다. 관심 없는 분야에 관심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법도 많이 개정하고, 과거사 문제도 정리하고. 물론 사회 변화, 역사 발전 안에서 이뤄진 거다.

사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왜 그렇게 비판했나 하는 의견도 있다.

인권운동의 역할이 가장 힘센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정권과 친하겠나. 제대로 감시 못한 것을 비판하면 모를까.

실제로 그때 되게 외로웠다. 너희는 대의에 따르지 않는 세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에는 공중전을 많이 했다. 밑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제도적 성취가 있었지만. 더 지상으로 내려가 삶에서 인권의 언어가 힘이 되는 방식이 뭐가 있을까 고민한다. 박경석 선생이 영혼을 담은 물리력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영혼을 담은 조직활동으로 이어가고 싶다. 인권운동이 인권운동일 수 있으려면 다른 운동들의 연대를 촉진해야 한다. 현장에서 인권의 가치를 보여주면서 진보적 언어로 인권을 벼리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1

1

오늘 인권운동 발전 얘기가 계속 나와서 발전이 뭔지 고민하게 됐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법을 얼마나 개정했는지, 몇 명이 국회의원이 됐는지, 단체가 얼마나 커졌는지, 이것이 발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퀴어운동도 동성애자 국회의원 만들기로 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제도화되는 순간, 성과는 뺏겨버리고 면죄부만 주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가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늘어났느냐, 그것이 진정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도 있다. 용산이든 강정이든 밀양이든 쌍용이든 인권활동가들이 온 것을 든든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별 것도 못하는데, 그곳에 못 간다고 하면 아쉬워한다. 예컨대 밀양에서 인권활동가들이 이 상황을 반전시키는 일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

지난해 강정에서 펜스 칠 때 인권침해 감시단 조끼를 입고 있으니까, 할아버지 한 분이 와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게 있냐고 하시더라. 섬이고 하니까 세상에 인권활동가가 있는지 몰랐던 거다. 그런 이들에게 힘을 얻고 배운다.

“법 개정 건수를 성공 기준 삼지 말아야”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든다. 인권운동가들이 예컨대 쌍용차 노동자와 함께하는 이유는 그들이 해고됐기 때문이다. 욕심 안 냈으면 좋겠다. 복직한 다음에 회사를 그만두든, 노동운동을 떠나든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들과 함께했던 순간이면 되는 거다. 천주교인권위는 군의문사 판결이 나면 뒤도 안 본다. 소송이 끝나면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제발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럼 운동은 누가 해?

형이 하는 거지, 계속.

사회 20년 더?

칠십인데!

사회·정리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