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팀장님. 일일 보고 드리겠습니다. 2012년 11월29일 대북심리전단 3팀 작업 내용입니다. 트위터 알티 25회. 언론사 기사 댓글 78건…. 18시15분 현재 업무 종료하겠습니다.”
이날도 하루 종일 노트북과 씨름한 김태이씨. 오피스텔 붙박이가 되다보니, 칼퇴근의 감흥도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 들어 그는 입사 시절 꿈을 자주 꾼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마침내 7급 공무원이 됐다. 첩보 드라마 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다부진 포부가 있었다. 최정예 요원 태이씨에겐 2012년 대선 때까지 단독 임무가 주어졌다. 회사는 최신형 컴퓨터 장비를 지급했고,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는 특별한 ‘전진기지’가 있었다. 이름하여 아이리스 PC방. 그곳에서 만난 취업 준비생 이병언씨에게 태이씨는 은밀한 알바를 제안한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사훈과 꼭 들어맞는 ‘익명’의 일이었다.
“어딜 봐서 현행범임?” 어떤 심정이었을까
목도리와 야구모자 그리고 마스크.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서막을 알린 ‘오피스텔 대치극’ 주역인 국정원 직원에겐 신원 보호용 3종 아이템이 있었다. 지난 9월3일 저녁,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 다리 CY씨어터 무대 위엔 비슷한 차림을 한 여성이 보였다. 9월14일까지 열리는 독립예술축제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인 연극 의 주인공이다. 2012년 12월12일 밤, 오피스텔 문을 걸어잠근 채 본인 관련 뉴스에 “어딜 봐서 현행범임?” 등의 댓글을 달았다는 국정원 직원. 그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야기는 이런 상상에서 출발한다.
국정원 직원이 ‘ㅋㅋㅋ’거리며 특정 대선 후보를 옹호하는 댓글을 달았다. 피 같은 세금으로 제작된 현실의 병맛 코미디는, 풍자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너무나 ‘극’사실적인 무대는 관객에게 씁쓸한 키득거림을 선물했다. ‘아이리스 PC방’이라는 허구의 세계가 현실과 더욱 가깝게 돼버린 데는 국정원 탓도 있다. 이번 공연에서 연출·극본·출연 세 가지 역할을 한 배우 양동탁(37)씨가 대본을 써내려갈 무렵엔 ‘상상’ 속 장면이 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설마 그렇게 했을까’ 싶었던 장면이, 실제 상황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이 정치 관련 댓글·게시글 작성 활동에 직원들을 투입하기 전 ‘매뉴얼’로 교육을 시킨다든가, 직원들이 활동 내역을 날마다 윗선에 보고하는 장면 등이 그랬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아이리스 PC방>.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연극으로 만든 호기로운 이들은 ‘극사발 프로젝트’다. 극사발은, 연극을 통한 사회적 발언의 줄임말이다. 지난해 초 양동탁씨가 “사회극이나 정치극이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의 문제점을 담아내는 연극을 해보자”며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이런 취지에 공감한 10여 명의 배우·연출가 등 젊은 연극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번 공연에는 배우 황선화·박우식·민아비·이정선씨가 출연했으며, 연출가 김태형·강경호, 음향감독 배미령씨 등이 스태프로 참여했다.
극사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지난해 공연한
“다음 작품은 좀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제각기 현업에 종사하며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는 데엔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과 필요하다. 지금까지 공연한 두 작품의 제작비는 소셜펀딩 사이트를 통해 후원금을 받아 마련했다. 을 한 번 더 무대에 올리고 싶지만, 현실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극사발 프로젝트의 활동은 지속될 것이다. “지난해와 올해 공연에서는 핫한 이슈를 다뤘지만, 앞으론 비정규직이나 청년 세대 문제처럼 더욱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하고 싶다.” 양동탁씨의 바람이다.
연극의 막이 내리기 전, 태이씨는 조용히 ‘아이리스 PC방’을 찾았다. 은밀한 활동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선거도 끝나고 이제는 흔적만 남았네요. 김하영씨 덕분에 선거 결과를 편히 지켜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대선 다음날,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 단장은 국정원 직원 김씨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9월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원세훈 전 국정원 원장의 두 번째 공판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민 전 단장은 이날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그는 경찰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17일에도 김씨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경찰 공식 발표가 났고 이제 가닥이 잡혀가고 있으니 마음 편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연극과 현실은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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