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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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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세계 최단기간에 히말라야 8천m급 14좌를 무산소 완등한 산악인 김창호씨
생명의 위협 무릅쓰고 미지의 고봉을 찾아 탐험에 나서는 한 등반가 이야기
등록 2013-07-24 02:40 수정 2020-05-02 19:27
김창호 대장은 “새로운 시공간이 주는 매력 때문에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시 산을 찾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창호 대장은 “새로운 시공간이 주는 매력 때문에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시 산을 찾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2013년 5월20일 오전 9시, 에베레스트 정 상 8848m.

세계 최단기간 히말라야 8천m급 14좌(봉 우리) 무산소 완등이자 국내 최초 무산소 완 등 기록을 세운 순간, 김창호(46) 대장은 감 격해할 힘도 겨를도 없었다. 몸무게를 줄이 느라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 잠 도 거의 못 잤다. 탈진을 넘어 죽음을 건너온 극한의 시간이었다. 깃발을 꽂고 사진을 찍 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같이 오른 대원들도 기진맥진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저 ‘좋구나~’라는 생각이 살짝 스쳤을 뿐. 그 제야 요기가 느껴졌다. 움직일 힘이 없었다. 아랫도리가 젖어왔다.

8천m 봉우리 14개 무산소로 올라

“일반적으로 해발 2천~3천m 이상의 고 지대로 이동했을 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고산병을 앓거든요. 근데 해발 8천m나 되는 봉우리 14개를 무산소로 올랐으니 자살 시 도에 가깝죠. 특히 에베레스트 정상은 산소 가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그 정도 높이에서 인간의 인지능력은 평지랑 다를 수밖에요.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 으니까요. 한국에 위성전화를 거는 것도 잊 고 내려왔어요. 더 있다가는 죽을 것 같더라 고요.”

숱하게 히말라야를 올랐던 20여 년차 산 악인 김창호 대장도 이번 등반은 녹록지 않 았다. 일정 자체가 강행군이었다. 이름하여 ‘From 0 to 8848’. 해발 0m에서 시작해 에 베레스트 정상 8848m까지 무동력·무산 소로 등반하는 여정이었다. 카약(156km), 자전거(893km), 트레킹(162km)으로 나눠 총 1211km를 3월14일부터 4월20일까지 40 일 동안 횡단한 뒤, 5월20일까지 한 달 동안 18km에 이르는 거리를 등반했다.

“2007년 K2(8611m로 에베레스트산에 이은 세계 제2의 고봉)에 무산소로 올랐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200m 차이 가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10m, 50m 단위 마다 숨 쉬는 차이가 느껴지는데 정말 차원 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후배나 동료들이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한다고 하면 쉽 게 권하진 못할 거 같아요. 대신 진짜 충분 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싶어 요.”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관한 한 독보적인 탐험가로 통하는 김창호 대장이지만 그가 산악인이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1988년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의 전공은 무역학이 었다. 산악부에 들어가 등산을 배웠다. “1학 년 때부터 암벽등반, 빙벽등반을 시작했어 요. 국내 산을 주로 다닌 다음에 해외로 나 가는데 전 1학년 때부터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흰산’이라고 부르던 히말라야에 가게 됐죠. 그땐 등산 자체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공간에 가는 게 제일 재밌 었어요. 등반의 테크닉을 익히면 전 지구상 이 놀이터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죠.”

자신 죽이려던 권총강도를 용서하다

그래서일까. 젊은 시절 그의 히말라야 등 반은 매우 도전적이었다. 1993년에 오른 그 레이트 트랑고타워(6283m)는 카라코람 히 말라야를 대표하는 대암벽이었고, 1996년 등반한 가셔브룸4봉(7925m) 동벽은 세계 최고난도로 꼽히는 거벽이었다. 특히 트랑고 타워는 그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 다. 베이스캠프에서 사흘 거리인 대암벽 아 래 올려놓은 20일치 식량과 장비가 눈사태 에 쓸려 사라지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벽 을 오르던 닷새째 날에는 80여m를 추락해 갈비뼈 2개가 부러져 죽다 살아났다. 식량 에 연료까지 떨어져 마실 물을 못 만들고, 그 바람에 탈수 현상이 일어나면서 판단력까지 흐려졌다. 그렇게 등반을 시작한 지 14일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거대한 설산과 끝없는 빙하가 그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었다.

사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대자연만이 아니었다. 파키스탄의 오지 발타르 빙하의 바투라2봉(7762m)을 탐사하던 2004년 7월에는 권총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답사를 하고 사진을 다 찍고 나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는 거예요. 순간 몸이 얼어붙었죠. 사내 3명이 총을 겨누더군요. 꼼짝없이 그들에게 억류됐죠.” 아랫마을에서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을 죽이고 숲 속으로 도망친 자들이었다. 가방과 몸을 뒤져 현금 100달러와 카메라를 챙긴 그들은, “코리안이 왜 이렇게 돈이 없냐”며 김 대장을 마구 구타했다. 혹시 몰라 여비를 숙소에 두고 온 것이다. 김 대장은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 싶었다. 다만 한 달 넘게 히말라야 곳곳을 촬영한 필름만은 가져가지 않기 바랐다. 기대는 무너졌다.

“3명이 있는데 본능적으로 누가 그 전에 2명을 죽였는지 알겠더라고요. 그자가 계속 저를 괴롭혔거든요. 차라리 빨리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죽기 전에 마지막 담배 하나만 피우게 해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만약 살아나면 너희에게 똑같이 복수해주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미치겠더라고요.” 이윽고 무리 가운데 가장 악랄하게 생긴 그자가 총을 쏘았다. 제발, 제발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눈을 떠보니 다행히 살아 있었다. 그자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한번 살려준 거야, 이번에는 진짜야라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하는데 5분 동안 엎드려 있으라는 말로 들렸어요. 살려주고 간 거죠. 그들이 가고 난 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뛰다시피 밤새 산을 내려왔어요. 한 달 뒤 그들이 검거됐다는 소식에 경찰서를 찾았어요. 다행히 필름은 되찾을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따귀를 한 대씩 때리고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그러지 못하겠어서 그냥 한 명씩 안아줬어요.” 한 달 뒤 재판이 열렸다. 판사가 이슬람법에 따라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들을 용서한다고 말했어요. 이 사람들이 날 살려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어요.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는 국경 근처에 있다가 국경수비대에 끌려가 나중에 풀려나기도 했는걸요. (웃음)”

자신이 겪는 고통은 이렇게 웃으며 회고할 수 있는 그도 동료를 잃는 슬픔만은 이겨낼 수가 없어 보였다. 이번 등반에서 고산 증세로 숨진 서성호 대원에 대한 질문에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서성호 대원은 그와 고락을 같이한 친구였다.

모퉁이를 돌면 어떤 길이 펼쳐질까

이번 등반에서 내려온 그는 이틀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정상에서의 시간이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력으로 참고 견뎠다지만 몸은 이미 못 견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면서도 그는 왜 산에 오르는 것일까. “빙하의 끝은 어디일까, 산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모퉁이를 돌면 어떤 길이 펼쳐질까 늘 궁금해요. 새로운 시공간이 주는 매력이 다시 산을 찾게 하는 힘이죠. 이번 하산길에 못 보던 봉우리를 봤어요.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다음엔 저길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걱정하는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요. (웃음)”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했던가. 미지의 고봉이 벌써 그를 부르고 있었다.


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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