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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짓 천태만상… 당신은 떳떳하신가

서비스업 종사자 5명이 털어놓는 ‘진상열전’… 여성·비정규직 등 약자에게 더 강해지는 그분들
등록 2013-05-05 18:33 수정 2020-05-03 04:27

비행기 안에서 짜지 않은 라면 진상(進上)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 ‘진상’(‘진짜 상놈’의 준말) 사건이 터졌다. 기내뿐 아니라 백화점·마트·식당·미용실·콜센터·호텔 등 친절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곳 어디서든 진상 고객님은 강림한다. 일상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서비스업 종사자 김지연(45·여·대형마트 고객센터), 강희진(26·여·시중은행 콜센터), 최상진(43·남·특급호텔 객실), 박민지(38·여·백화점 화장품 판매), 장규남(33·남·대형마트 영업직) 등 5명에게 직접 겪은 ‘진상 고객뎐’을 들려달라 청했다. 신분 노출을 우려해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업종은 달랐지만 진상의 유형은 비슷했다. 낯선 이에게 쉽게 할 수 없는 반말·욕설 등 폭언을 퍼붓거나 상식 밖의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성희롱이나 폭행까지 가하는 이들을 ‘진상’이라고 했다. 진상엔 남녀노소,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고 했다. 그만큼 수가 많다는 이야기다.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진상의 시작 “안 되는 게 어딨어?”

대개 진상의 발단은 ‘안 되는 게 어딨냐’는 막무가내 요구에서 비롯된다. 지난해부터 은행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강희진씨는 하루에 보통 70~80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와 통화를 하는 고객의 10%가량은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서비스를 요구한다. 계좌나 신용카드 비밀번호 초기화 및 변경, 신용카드 한도 상향 등은 유선상으로 할 수 없게 돼 있다. 이런 규정을 열심히 설명해도, 줄기차게 서비스를 요구하는 고객은 욕설과 폭언을 쏟아낸다. “은행에 갈 수 없어 전화하는데 도대체 왜 못해주냐며 분노를 쏟아내는 고객에게 죽어라 ‘죄송하다’고 하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다. 다른 은행을 이용하겠다고도 하시는데 ‘아휴 그래, 다른 은행 가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오전 9시부터 2시간 동안 전화를 끊지 않는 고객의 화풀이를 계속 들어준 적이 있다. 고객이 먼저 전화를 끊기 전에는 통화를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날 넋이 나가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땐 뭘 잘 모르니까 내 능력이 없어서 이런 험한 꼴을 당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호텔에서는 ‘막무가내형’ 고객을 찾아보기 쉽다. 고객의 남다른 ‘까탈스러움’도 개인의 취향으로 존중해 맞춤형 서비스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취향’은 종업원뿐 아니라 다른 고객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진상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20년간 호텔에서 근무한 최상진씨는, 이런 고객이 호텔 정문에 들어서기만 해도 직원 모두가 긴장 상태에 들어간다고 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어느 자산가는 장기 투숙을 자주 한다. 그런데 이분은 속옷 하나만 걸치고 객실 문을 열어놓고 생활한다. 그런 옷차림으로 방에서 메이드들을 불러다가 타월을 갖다달라는 등 이런저런 주문을 많이 한다. 성희롱이 될 수도 있는 거다. 다른 투숙객들이 불편해하기도 해 은근슬쩍 문을 닫으면 또 열어둔다. 메이드가 다른 방을 청소하느라 이 고객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여지없이 폭언이 쏟아진다. 액자를 따로 가져와 객실에 걸어달라고도 하는데, 못질을 원하는 시간대가 다른 고객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때라 곤란한 적이 많다. 이 고객은 조식 식사 종료 5분 전에 들어와 정찬을 즐긴다. 이렇게 되면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무릎 꿇어” “대학은 나왔어?”

각 호텔에서는 진상 중의 진상을 추려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한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고객에 대해서는 ‘예약이 다 찼다’며 정중하게 서비스 이용을 거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이 없다’는 핑계를 대기 힘들 정도로 일찍 예약을 하거나, 아예 예약 없이 오는 경우 투숙을 막진 않는다. 그가 보기엔 외국인보다 내국인들이 직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기내 라면처럼, 호텔 스테이크도 고객의 주관적 ‘입맛’으로 인해 수차례 다시 조리되기도 한다. 스테이크 굽기는 정도에 따라 오븐 온도와 조리 시간이 어느 정도 매뉴얼화돼 있다.

무리한 서비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진상 고객들의 뻔한 레퍼토리가 펼쳐진다. 고래고래 큰 목소리로 사장이나 책임자들을 찾거나 직원을 향해 ‘사과를 받아야겠다’며 무릎을 꿇으라는 등의 과도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인격모독 군림형 고객들이다.

김지연씨는 2년 전 한 젊은 여성에게 당한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문제의 고객은 여전히 김씨가 근무하는 마트에 자주 찾아온다. “고객분 결제 금액이 3만원가량이었다. 그런데 상품권 5만원짜리와 1만원짜리 두 장을 모두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다. 상품권 액면 금액의 60%를 사용해야 현금 거스름돈을 줄 수 있게 돼 있으니까, 5만원짜리 상품권으로 결제 가능하고 1만원짜리 상품권은 사용하기 힘들다고 응대했다. 그랬더니 1만원짜리 상품권으로 먼저 결제해달라. 그리고 남은 2만원은 5만원짜리 상품권으로 결제하고 3만원을 거슬러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더라. 그렇게 답변이 오가다 결국 ‘왜 너만 안 되냐. 당신 태도가 불순하다’며 ‘상사 불러라’는 요구가 나와 일이 커진 거다. 바로 위 상사뿐 아니라 매장 부점장까지 호출됐다. 그 자리에 서서 1시간30분 동안 ‘저 생김새 봐라. 저렇게 생긴 여자는 이혼녀다. 저 사람과 사는 남편은 얼마나 불쌍하냐. 저 여자 밑에서 크는 애들은 뭘 보고 배우겠느냐’ 등 참기 힘든 말을 들어야 했다. 사과를 요구하기에 ‘죄송하다’고 했더니 ‘그게 사과하는 태도냐’고 되받았다.” 겨우 사태가 진정된 뒤, 김씨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고객 응대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손이 떨리고 얼굴이 굳어져도 어쩔 수 없었다. 마트 고객 가운데 20~30%는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김씨는 남편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약 10년간 마트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늘어난 건 주량뿐이다. 동료들은 ‘진상’ 때문에 욕을 끊을 수 없다고 한다.

20년간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한 박민지씨는 고객이 요구한 물건을 늦게 가져왔다는 이유로 뺨을 맞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8년 전 쇼핑백을 달라는 고객에게 ‘100원을 내고 사셔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가 욕설을 듣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지점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화장품 매장에서 1년 전 구매한 상품을 교환해달라며 억지를 부린다거나 소리를 지르는 고객이 하루 서너 명 정도는 있다.”

“그때 내가 진상이었을 지도…”

계약직 근무로 시작해 갖은 고생 끝에 정규직이 된 장규남씨는 사계절 중 여름이 가장 싫다. 유제품이나 반찬, 냉장·냉동식품 영업을 담당한 적이 있는데, 여름철에는 제품이 쉽게 상할 수 있다. 고객센터로 불만이 접수되면 장씨가 일선에서 사건 경위를 파악해 교환·환불 처리를 하게 된다. “고객 가운데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는 ‘내가 우유 하나 바꾸려고 거기까지 가야 하냐’는 분이 계신다. 10분 내로 달려오라고 하면, 사비를 들여 택시를 타고 쫓아간다. 집에 가면 상한 음식을 먹어보라고 요구하면서 ‘너 같으면 먹을 거 같냐’는 폭언을 한다. 이럴 땐 먹는 시늉이라도 하고 무릎 꿇으라면 무릎도 꿇어야 일이 일찍 끝난다.”

진상 고객님이 일부 유별난 사람들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진상 고객님이 많아진 걸까. 김지연씨는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이 진상 고객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마트에 와서 무엇인가 쌓인 걸 풀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분은 ‘아줌마는 학교 어디까지 나왔냐’고 물어보면서 자기는 대학교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인사관리 업무를 하고 있는 김은주(33·가명)씨는 아무래도 자신이 ‘진상’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콜센터에서 전화를 여기저기 돌릴 때가 있다. 결국 ‘고객님 말씀을 메모해놨다가 담당자에게 전해준다’고 하길래, 너무 짜증나서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읊어보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식당에 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 테이블로는 서빙을 안 해줘서 갖고 있던 전단지를 던졌다. 그렇게 서비스 받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1990년대에 한창 ‘고객은 왕’이라는 광고가 많았다. 예전엔 서비스가 불친절한 경우도 많았잖나. 친절 서비스라고 하면 뭐든 다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사회생활 하면서 여기저기 치이기 전에는 내가 힘들면 매장 언니들한테 더 못되게 굴고, 약간 하대하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 내 압력이 커진 데서 ‘진상 출몰’의 원인을 찾는다. 여기저기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은 주로 △가정이나 조직의 약자 △식당이나 판매 종사자 등 감정노동자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상대로 분풀이를 한다는 분석이다.

때로는 방관하는 회사가 더 밉다
한 대형마트 입점 업체 사원들이 아침 조회에서 ‘친절교육’을 받고 있다. 판매사원들은 이런 교육을 ‘정신교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 대형마트 입점 업체 사원들이 아침 조회에서 ‘친절교육’을 받고 있다. 판매사원들은 이런 교육을 ‘정신교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때로는 때리는 고객보다 방관하는 회사가 더 밉다. 장규남씨는 회사가 진상을 만들어내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매장 어느 곳에서도 환불·교환 규정을 볼 수 없다. 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소비자 역시 상술의 피해자다. 그런데 이건 노동자들의 잘못이 아니잖나. 이런 상황에서 고객이 기분이 상하면 중간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만 샌드백이 되는 거다. 규정대로 했다가 일이 커지면 회사에선 방관하다가 ‘왜 그랬냐’며 어거지를 쓰는 고객의 요구를 받아준다. 또 인격 모독까지 하는 고객이 있을 때 어떻게 하라는 매뉴얼이 없다. 그때그때 ‘복불복’으로 걸린 직원들이 임기응변으로 넘어가는 실정이다.”

폭행 사건이 일어나도 경찰에 신고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최상진씨는 수년 전 어느 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어떤 남자분이 예약을 하지 않고 왔다. 규정대로 숙박기록부 작성과 지불 개런티(미니바·레스토랑 등에서 사용해 발생할 수 있는 금액을 선불로 보증)를 위해 카드번호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객이 기분이 나빴는지 작성하던 종이를 구겨 나한테 던지며 방을 안 쓴다고 하더라. 어디론가 가길래 사태가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호텔 내 주점에서 전화가 왔다. 아까 그 고객이 객실을 이용한다니까 방 키를 가지고 오라는 요청이었다. 숙박기록부 작성과 카드번호 오픈을 한 번 더 부탁했더니 또다시 숙박등록지를 찢고 객실을 안 쓴다고 하더라. 결국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그 남자가 프런트 데스크를 뛰어넘어 들어와 전화기를 던져서 내 안경 끝부분이 파손됐다. 나는 명백한 폭행이니까 112에 신고하겠다고 했지만 윗선에선 ‘한 번만 참으라’고 다독거렸다. 결국 안경값만 변상받고 넘어갔다.” 고객이 이런저런 서비스에 문제가 있다며 보상을 요구하면 최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무료 음료를 주거나 조식 쿠폰을 지급하는 것이다. 일이 커지면 경영진들은 직원의 응대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까다로운 고객 응대도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업무 능력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사평가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진상 없이, 오늘도 무사히!”

진상의 강도는 여성이나 비정규직 등 약자를 상대로 더욱 거세진다. 대부분 협력업체 소속인 백화점 판매사원들의 경우 고객 불만이 생계 위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백화점은 협력업체에 사람 교체를 요구하기도 한다. 백화점에도 블랙리스트 고객이 있긴 하지만, 환불을 상습적으로 한다든가 하는 경우다. 판매사원들을 막 대한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는 건 아니다. 고객이 소리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면 백화점 직원들이 막아줘야 하는데, 손찌검을 하지 않는 한 쳐다보기만 한다.”(박민지씨)

은행에서 근무하는 강희진씨는 김지연씨네 마트나 박민지씨네 화장품 매장에서 물건을 샀을지 모른다. 최상진씨나 장규남씨는 강희진씨네 은행 고객일 수도 있다. 서비스업 종사자와 소비자의 구분은 모호하다. 직원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회사가 억지 친절과 미소만으로 고객 만족을 실현할 수 있을까. 인터뷰에 응한 5명은 오늘도 이런 말을 외치며 스스로를 다독일 것이다. “진상 없이, 오늘도 무사히!”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익명의 분노, 얄미운 강자를 조준하다
가해자가 대기업 임원이 아니었다면
‘만약 손찌검이 없었다면, 미국행이 아니라 한국행 비행기였다면, 피해자가 승무원이 아니었다면, 가해자가 대기업 임원이 아니었다면,이번 기내 난동 사건이 이슈가 됐을까?’
인터뷰에 응한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자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번 기내 난동 사태를 지켜본 현직 승무원 김민지(가명)씨는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다고 했다. “사회적 약자들이 힘든 상황을 구조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평상시 내재된 분노가 익명으로 튀어나와 ‘대기업 임원’이라는 예뻐할 수 없는 한 사람에게 쏟아진 것 같다.”
가해자로 알려진 포스코에너지 임원이 보직 해임된 건 지난 4월22일로, 비행기에 탑승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사건 당시 정황이 적힌 캐빈리포트 내용 일부가 공개되고, 누리꾼들이 가해자의 신원을 찾아나서면서 세간의 이목이 더욱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항공사 관계자는 “20일 승객으로부터 제보를 받았다는 한 언론사가 이 사건에 대해 취재를 요청해왔다”며 “그 보도가 나간 뒤 인터넷을 통해 캐빈리포트 내용 일부가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유출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 내용엔 승객분 이름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으로 진상 고객님은 줄어들까. 김씨는 “외부로 알려진 기내 난동 사건은 추리고 추려진 극단화된 건이다. 손찌검보다 더한 일도 기내에 많은데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참으라고만 한다”며 “이런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때리지만 않는’ 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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