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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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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열린 ‘진실의 뚜껑’

‘장자연 사건’ 극화한 영화 <노리개> 개봉과 함께 성접대 근절 위한 토론회 열려… “쾌락 아닌 권력형 비리로 접근해야”
등록 2013-05-05 07:33 수정 2020-05-02 19:27

2009년 ‘장자연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났다. 2010년 ‘스폰서 검사’ 사건에 이어, 2013년에는 검찰 고위 관계자 등이 한 건설업자로부터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실명이 거론되며 의혹을 받던 김학의 법무부 차관은 사퇴했고,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지만 수사는 한 달째 지지부진하다. 지난 4월23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하는 ‘권력형 비리와 성접대 문제에 관한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장자연 사건을 영화화한 가 개봉돼 관객을 모으는 가운데, 영화 상영과 더불어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유승희 의원(민주통합당), 한국여성민우회미디어운동본부,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참여연대 관계자들이 모여 성접대가 근절되지 않는 원인을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영화  개봉을 계기로 성접대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포스터(왼쪽).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의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이 영화 상영 뒤 성접대 근절을 위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영화 개봉을 계기로 성접대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포스터(왼쪽).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의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이 영화 상영 뒤 성접대 근절을 위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선정적인 보도와 용두사미 수사

영화 는 실존 인물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 장자연 사건을 극화한 법정영화다. 선정적인 보도와 용두사미 수사로 사실과 소문이 뒤엉켜버린 장자연 사건에서 ‘팩트’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2009년 3월7일 장자연이 숨진 채 발견되고, 3월8일 전 매니저 유장호는 고인이 유력 인사들에게 성상납을 강요받은 사실이 적힌 친필문서가 있다고 미니홈피에 공개했다. 3월9일 박은주 부장은 유장호를 만나 친필문서에 서명과 주민번호와 지장이 찍혀 있었음을 확인하는 기사를 써서 3월10일치 에 실었다. 그러나 3월12일 경찰은 단순 자살로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3월13일 KBS가 9시 뉴스를 통해 장자연의 성상납을 받은 인사들의 명단이 적힌 친필문서가 있다고 보도하자, 경찰은 전면 재조사로 입장을 바꾼다. 인터넷에 ‘장자연 리스트’가 떠도는 가운데, 3월17일 장자연의 오빠는 방상훈 사장을 성매매특별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경찰은 4월23일 방 사장의 집무실로 찾아가 35분간 조사를 마친 뒤 다음날 무혐의로 발표했다. 검찰은 방 사장을 불기소하고, 소속사 대표 김종승은 장자연을 때린 가혹 혐의로, 전 매니저 유장호는 김종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각각 기소했다. 2010년 두 사람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장자연 사건에 대한 법적 조치는 끝났다. 그러나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성착취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 는 정지희(민지현)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경찰은 단순 자살로 종결했다가, 정지희가 성상납을 강요당했으며 ‘악마들’의 명단을 적은 다이어리가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수사에 착수한다. 정지희 소속사의 차 대표와 영화감독 최철수가 강요죄로 구속돼 재판을 받는 가운데, 현 회장은 강요죄 방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신병을 이유로 법정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다. 성상납 의혹을 보도한 이장호(마동석) 기자는 언론사에서 해직된 뒤 인터넷 를 이어가며 사건의 진실을 파고든다. 그는 로드매니저와 룸살롱 마담, 현 회장을 고발한 정지희의 오빠, 소속사의 간판급 스타인 고다령 등을 만나며 성접대의 실태와 다이어리의 행방을 탐문한다. 또한 사건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닌 여검사는 고다령으로부터 유의미한 증언을 끌어내고, 법정에서 다이어리를 공개하며 현 회장을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기소하려 하지만, 현 회장을 비호하려는 노회한 변호사와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는 판사의 벽에 부딪힌다. 결국 차 대표와 최 감독에게는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고, 현 회장에게는 무죄가 선고된다. 영화는 장자연 사건을 비교적 충실하게 옮기면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열혈 기자와 열혈 검사의 활약으로 은폐된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여준다. 소속사 차 대표는 신인 연기자에게 출연 기회와 노예계약을 빌미로 감독과 신문사 사장 등에게 술접대와 성접대를 하도록 강요했다. 신문사 사장은 약과 도구를 이용한 가학적 성관계를 즐겼다. 영화는 법정에서 ‘도덕과 신뢰’를 운운하는 현 회장과 가학적 성행위에 몰두하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다. 영화는 성적 착취를 당하는 고인이 “내 이름은 정지희”라고 현 회장에게 소리치던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는다. 노리개가 아닌 인간이고 싶었던 정지희가 죽음으로 자신의 존엄을 입증하려 했음을 안타깝게 전하는 것이다. 영화는 마치 고인의 영혼을 위로하듯 정지희의 해맑은 모습을 마지막에 길게 담는다. 그러곤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여성 연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60%가 넘는 여성 연기자가 방송 관계자나 사회 유력 인사로부터 성상납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는 자막으로 끝맺는다. ‘성상납’이 비단 정지희와 장자연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예계의 관행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매자와 알선자를 비호하는 체계

이어진 토론회에서 표창원 전 교수는 성상납을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형 비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며, 영화 속 가학적 성관계를 갖는 현 회장이 아무런 표정도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성상납에서 성은 감정이나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정복·가학·폭력의 수단이며, 성상납을 받는 권력자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여성 연예인의 성을 유린하는 것을 통해 특별한 우월감을 느낀다는 범죄심리학적 해석을 내놓았다. 또한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기 위해 사법개혁이 필요하며, 경찰과 검찰을 외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시민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박진영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대표는 성매매가 국가권력의 파트너였음을 환기하며, 성매매를 범죄로 보지 않는 시각이 만연한 가운데 일선 경찰부터 사법부 최상층까지 구매자와 알선자를 비호하는 체계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성상납이 근절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경북 포항의 유흥업소 여성들이 잇달아 자살하고 성매매와 착취를 기록한 다이어리가 유품으로 나왔음에도 경찰은 이를 수사하지 않았던 사건을 언급했다.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미디어운동본부 소장은 장자연 사건 당시 성상납의 대가를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해 재발을 방지하는 것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고, 친필문서의 진위를 따지거나 건물에 샤워시설이 있었다는 등의 관음적인 보도가 횡행했음을 지적했다. 최근의 별장 성접대 사건에서도 언론은 얼마나 질펀하고 호사스럽게 성접대가 이루어졌는지를 보도해, 권력형 비리인 성상납을 마치 상류층의 섹스파티인 양 다루고 있다. 유승희 의원은 장자연 사건 이후,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성접대 개념을 명시했지만, 권력층의 비호와 은폐로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하며,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에 성접대의 개념을 명시해 접대를 받은 공직자가 반드시 처벌받도록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침묵 속 죽음의 행렬은 계속될 것

속 여성단체가 들고 있던 플래카드에는 ‘진실의 뚜껑이 열렸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진실의 뚜껑은 잠시 열렸다가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되는 순간 다시 닫힌다. 영화로, 글로, 말로 권력과 유착된 비리의 고리를 끊는 작업을 지속하지 않는다면 침묵 속 죽음의 행렬은 계속될 것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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