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본다. 무릎이 꺾였고 두 팔은 형틀에 묶였다. 두 눈을 가린 흰 광목에 총탄이 이마를 뚫고 간 핏자국이 선연하다. 굳게 다문 입술, 무표정한 낯빛. 매헌 윤봉길.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연(천장절) 및 상하이 점령 기념 행사장에서 폭탄을 투척했고, 그해 12월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총살형을 당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고 있다. 일본 장교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려고 목숨을 바친다.” 두 아들에겐 이런 유서를 남겼다.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그러나 윤봉길이 목숨 바쳐 사랑한 조국 한국의 뉴라이트 교과서는 그의 행위를 ‘테러’라 부른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하 역사박물관)이 12월26일 개관한단다. 역사박물관엔 뉴라이트의 현대사 인식이 짙게 배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건립 방침을 처음으로 밝힌 자리가 2008년 8월4일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회의장이었던 것이나, 역사박물관이 대한민국의 시작점을 헌법에 명시된 상하이임시정부가 아닌 분단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15일로 잡았다가 광복회의 격한 반대에 부닥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전시기초자료를 보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박정희가 52회 언급된 반면, 다른 대통령들은 모두 합쳐 19차례 언급됐을 뿐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을 다룬 제3전시실 전시물 445건의 84%(374건)가 새마을운동 등 박정희의 이른바 ‘업적’을 소개한 것이다. 유신반대운동은 2%(11건)뿐이다. ‘다카키 마사오’라는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건 물론이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등 분단을 딛고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려는 지난한 노력에 관련된 전시물도 없다. 역사박물관이 아니라 ‘이승만·박정희 홍보관’에 불과하다는 역사학계의 비판이 괜한 트집잡기가 아니다. 박물관이란 공동체가 쉼없이 되새김질해야 할 ‘기억의 저장소’이지 홍보관이 아니다.
대통령까지 나서 세금 448억원을 콘크리트 타설하듯 쏟아부어 공청회 한번 없이 속도전을 펼친 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역사 왜곡에 맞서려는 학계와 시민사회의 대응은 눈물겹다. 11월26일 시사회를 한 역사 다큐 ‘백년전쟁’도 그 하나다. 근현대 100년의 역사를 ‘레지스탕스’(저항세력) 대 ‘콜라보’(사익추구세력·친일부역세력)의 쟁투로 분석한 ‘백년전쟁’ 시리즈물 가운데 우선 2편이 유튜브를 통해 일반에 무료 공개됐는데, 반향이 크다. 가 그것이다. 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했다. 편당 제작비가 2500만원이라는데, 다큐의 질이 들인 돈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준다. 가족·친지와 함께 꼭 한번 보시기 바란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으로 유신독재의 심장을 겨눈 비수를 자임했던 시인 김지하가,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와 유신독재를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이제 여자가 세상일 하는 시대가 왔다”며 지지하는 무상한 세월이다. 100년을 이어온 역사전쟁을 끝내려면, 콜라보를 청산하고 레지스탕스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갈 길이 멀다.
18대 대선 투표일인 12월19일은 윤봉길이 일본군한테 총살당한 지 꼭 80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을 앞두고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전설 요기 베라의 말을 떠올린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잊지 말자. 포기는 시민의 덕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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