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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크로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정치학

등록 2012-10-23 12:21 수정 2020-05-02 19:27
영화와 후보의 즐거운 야합대선과 연결해 보라는 마케팅과 홍보를 노리는 대선주자의 윈윈

를 본 뒤 문재인은 몇 분 동안 눈물을 훔쳐내느라 객석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안철수는 감상 소감으로 지도자의 진정성을 설파했다. 대선 후보의 눈물과 지도자론은 개봉 시기를 조절하는 등 대선과 영화를 절묘하게 연관시킨 영화 제작자가 펼친 작전의 결과다. 대선 후보를 영화관으로 이끈 또 다른 주역은 이미 영화를 보고 노무현이나 안철수를 떠올린 대중이다. 현재의 정치 일정과 맞추어 감상하면 영화가 살짝 재밌을 거라고 미끼를 던졌고, 대중은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이 생각하는 대선주자와 (가짜) 광해를 일치시켜 즐거움을 누렸고, 대선 후보자는 기꺼이 극장 안으로 걸어들어가 눈물과 정치관을 보여주었다.

제작자와 관객이 를 대선과 연결시켜 대선주자의 손을 이끌었고, 정치관 설파와 눈물을 보인 일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지닌 사회적 상상을 엿보게 해준 사건이다. 아무렇게나 상상의 나래를 훨훨 펼친 결과로서의 상상이 아니라 서로의 정서를 확인해가며 형성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림으로서 상상을 말한다. 어느 시기, 어느 공간이든 이런 상상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변화해간다. 이른바 대선 후보들이 즐겨 쓰는 ‘시대정신’과도 흡사한 모습을 지닌다. 순식간에 인기를 누렸고, 사회적 담론을 휩쓸어버렸다는 점에서 는 2012년 대선을 앞둔 한국의 시대정신이나 사회적 상상력과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지만 어렴풋이 보여주는 지표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영화 속 두 명의 광해 중 대중은 가짜 광해에 주목했다. 진짜 광해는 가짜 광해와 비교되기 위해 존재할 뿐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회적 상상은 가짜 광해와 살포시 손을 잡고 영화 속에선 가짜이긴 하지만 대중의 상상 속에선 진짜라고 말한다. 사회적 상상은 지금의 정치세력을 가짜로 여기고, 새롭게 다가올 진짜를 기다리는 모양새를 취하는 셈이다. 어떤 이들은 그 새로운 진짜가 이미 우리 곁에 왔었지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던 ‘노무현 정신’일 거라 받아들였다. 다른 이들은 안 후보가 그 새로운 진짜일 거라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상상을 통해 울컥했고, 다른 이들은 전혀 새로운 정치인물을 상상했고 그에 가까운 안 후보를 떠올렸던 것이다.

세상의 모두가 인기 있기를 원하지만 그를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를 만든 쪽에서는 홍보를 위해 정치인을 초청했을 거고, 대선 후보들도 홍보를 위해 영화를 관람했을 것이다. 모두 인기를 위한 초청이었고 방문이었다. 현재로서는 양쪽 다 홍보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성공이 인기를 끄는 비결에 대해 어느 정도 힌트를 준다. 사회적 상상에 잘 근접했고 손을 잘 잡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회가 있었지만 놓쳐서 아쉽다는 후회감, 그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새로움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상을 잘 포착한 탓에 영화의 초청도 후보자의 방문도 성공적이었다. 의 인기는 멋진 캐릭터, 연기, 이야기 탓이기도 하겠지만 만시지탄과 희망으로 채워져 있는 현재의 사회적 상상에 근접했던 사실과 따로 떼놓을 순 없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 관람, 소감, 눈물은 크게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정치쇼라 하더라도 이 정도면 괜찮은 쇼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대선 시즌과 겹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관객은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광해의 운명을 해석하고 있다. 리얼라이즈픽쳐스 제공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대선 시즌과 겹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관객은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광해의 운명을 해석하고 있다. 리얼라이즈픽쳐스 제공

가면의 눈물 민낯의 배신

가면에 가면을 덧씌워 읽는 , 그리고 진정한 군왕의 부재

이것은 가면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에서 조선의 왕 광해는 암살 위협을 피하고자 자신과 닮은 천민 하선에게 대역을 맡긴다. 하선은 독에 취해 쓰러진 광해를 대신해 군왕 노릇을 한다. 조세개혁을 위한 대동법을 시행하고, 명에 사대를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치며 실용적인 중립 외교를 명한다. 무엇보다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한 착한 군왕의 현시다.

이야기는 또 다른 가면을 낳았다. 여기서 가면은 가짜 왕 하선에게 실존했던 광해의 얼굴을 덧씌우고, 이를 한국 사회의 어떤 ‘선출된 왕’이었던 인물과 동일시한 뒤, 이미 세상을 등진 그 인물에 대한 연민의 이미지로 확장하는 어떤 재생산의 산물이다. 그 ‘선출된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한 대통령 후보는 를 보고 그 인물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 역시 그 인물을 연민하며 다시는 그 인물을 떠나보낸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굳게 다짐한다. 여기서 가면 뒤의 민낯을 보려는 ‘왜?’라는 물음은 삭제된다.

역사에 실재하는 광해와 영화 속의 광해는 임진왜란 때 전장 일선에서 관군과 의군을 지휘하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세자의 모습을 세월이 갈수록 잃어가며 타락한 권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지금 광해라는 가면으로 재소환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노동자들 옆에서 “피고인은 무죕니다”라고 통렬하게 외치던 노동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잃고,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김진숙)라는 말로 대변되는 5년의 통치 기간을 보냈다. 관료를 제압하지 못해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했고, 가진 자의 가짐이 한국 법률뿐만 아니라 이제 미국 법률로도 보호받을 수 있게 만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추진했다.

그러니 사실 는 백성이나 시민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고, 중립과 균형 외교를 추구하며,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신하 또는 관료를 제압하는 군왕 혹은 대통령은 이 땅에 부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단지 15일 동안 현시했다 홀연히 피안으로 사라지는 하선의 모습에서 그가 상상의 산물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가면의 형태로 이미지화한 문화 텍스트 소비는 한국 정치와 닮았다. 텍스트에 대한 주체적 소비를 주저한 채 강제된 소비 대열에의 동참이 필수 행위처럼 된 것이 1천만 관객으로 향하는 영화 읽기의 현재 모습이다. 대통령 개인의 이미지에 정치적 열망을 위탁하고, 그 강제된 위탁의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 필수 행위가 돼버린 현재의 시국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다음엔 위탁된 열망의 좌절이 낳은 냉소가 반복될 수 있는 토대가 예비돼 있다. 그 토대 위에서 탄생한 대통령이 이제 임기를 넉 달 남겨두고 있다.

이재훈 한겨레 월간 사람 매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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