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이름들을 적고 시작하자. 대법관 양창수, 대법관 고영한, 대법관 박병대, 대법관 김창석. 이들이 사건 접수 3년1개월여 만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A4용지 28장짜리 결정문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고 법관이라는 이들이 온전히 책임져야 할 내용이다.
1991년 27살, 지난 5월 간 수술
2012년 10월19일 금요일 오후 6시20분. 대법원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의 재심을 결정한다고 ‘돌연’ 밝혔다. 앞서 2009년 9월 서울고법은 새로운 증거를 바탕으로 강씨의 무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치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곧바로 146쪽에 이르는 즉시항고 이유서를 써서 대법원에 제출했다. 곧 결론이 나리라 예상된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은, 그러나 해를 넘기고 넘겨 3년 넘게 끌었고 대법원 국정감사(10월23일)를 나흘 앞둔, 그것도 주말로 넘어가는 금요일 저녁에야 갑작스레 발표됐다. 서울고법이 인정한 재심 개시 사유 가운데 물적 증거는 부정하고, 일부 허위 증언만을 인정해 재심을 받아들인 타협적인 결정이었다. 간암에 걸린 강씨는 지난 5월 간의 절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강씨에게 무죄를 다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대법원이 미적거리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거셌다.
유서 대필 사건을 복기해보자. 1991년 강기훈씨는 27살이었다. 그해 4월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던 김기설(당시 25)씨가 이에 항의하며 유서를 남기고 분신해 숨졌다.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씨는 김씨의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혐의(자살방조)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이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고 몰아갔다. 대법원은 이듬해 강씨에게 징역 3년을 확정했다. 강씨는 1심 재판 때부터 줄곧 유서 대필을 부정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던 이 사건은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에 재심을 권고하기로 결정해 다시 한번 뜨거운 진실 공방을 벌이게 됐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분신 자살한 김기설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노트’와 ‘낙서장’을 새로 발견해, 검찰과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사건 자료·증거물과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및 7개 사설 감정기관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모든 기관에서 유서의 필적은 유서 대필 혐의를 받았던 강기훈씨의 필적과 상이하고 김기설씨 본인의 필적이라는 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1991년 수사 당시 국과수가 필적 감정을 문서감정인 한 명에게만 맡기고도 여러 명이 공동으로 감정한 것처럼 법정에서 허위로 증언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2009년 서울고법은 이런 진실화해위의 조사 내용을 근거로 한 강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반면 1991년 강씨를 기소했던 검찰은 146쪽이나 되는 이례적인 항고이유서를 대법원에 제출하며 재심 결정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새로 발견된 전대협 노트 등은 김씨 사후에 강기훈씨 등이 조작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대법원은 이번 재심 개시 결정문의 상당 부분을 전대협 노트 등 새로운 증거물에 바탕한 필적 감정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데 할애했다. 무죄를 강하게 추정한 서울고법이 재심 개시 사유로 삼았던 주요 근거를 송두리째 부정한 셈이다. 대법원은 진실화해위·서울고법과 달리 △전대협 노트 등이 뒤늦게 발견되고 보관된 경위를 둘러싼 관계자의 진술 내용에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으며 △진실화해위가 한 필적 감정은 김기설의 필적이라는 예단을 가지고 진행된 것으로 의심된다고 설명했다. 대신 대법원은 “국과수 소속 문서감정인들이 허위 증언을 한 사실이 증명됐다”며, 증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사건 발생 21년, 유죄 확정 20년 만에 서울고법에서 진행될 강기훈씨 재심의 핵심 쟁점 역시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데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1991년부터 20년 넘게 강씨를 변호해온 이석태 변호사는 “재심 개시 결정은 반갑지만 타협적인 부분은 유감스럽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진실화해위의 필적 감정보다 1991년 수사 당시 위증을 해가면서 이뤄진 필적 감정이 우월하다는 대법원의 판단은 인정할 수 없다”며 “필적 감정에 대한 예단 역시 2007년 진실화해위 때보다 1991년이 더 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강기훈씨는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 뒤 “그동안 검찰이 주장한 것처럼 자신들이 정말 그 당시 잘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지금도 정말로 확신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필요에 따라 고집하는 것인지 몰라도, 이제는 (검찰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며 “재심 재판(의 결과)보다 내게는 검찰의 사과와 반성이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진실 여부는 재심에서 가려지더라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자체는 검찰과 사법부를 수렁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1960~80년대 횡행한 고문조작 사건들은 주로 중앙정보부나 경찰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수사 자체가 부실했던 탓에 남아 있는 수사 기록이나 증거도 별로 없다. 오래되다 보니 수사나 재판을 맡았던 이들도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다. 반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1년에 터졌다. 검찰과 사법부로서는 서슬 퍼런 군사독재를 핑계로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덮어버릴 수 없는 시기다. 수사·공판 기록도 대부분 남아 있다. 수사를 했던 주임검사부터 유죄를 확정했던 대법관들까지 대부분 생존해 있다. 검찰과 사법부는 사실상 한배를 탄 셈이다. 재심에서 강기훈씨의 자살방조 혐의가 무죄로 나온다면 수사·기소를 맡았던 검찰과 1·2심, 대법원까지 줄곧 유죄를 선고했던 사법부는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검찰 몫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여기에 그 이름들을 다시 적어둔다. 서울지검 강력부장 강신욱, 주임검사 신상규, 검사 안종택. 강기훈 구속 기소, 징역 7년 구형. 1991년 12월 서울형사지법 징역 3년 선고. 재판장 노원욱, 판사 정일성·이영대. 1992년 3월 서울고법 항소 기각. 재판장 임대화, 판사 윤석종·부구욱. 1992년 7월 대법원 유죄 확정. 대법관 김상원·박우동·윤영철·박만호. (부장검사 강신욱은 2000년 검찰 몫으로 대법관이 됐다. 주임검사 신상규는 2009년 고검장까지 올랐다. 대법관 윤영철은 2000년 헌법재판소장이 됐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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