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박래군씨, 왜 그렇게 사세요?

등록 2012-07-11 17:51 수정 2020-05-03 04:26

오랜 기간 박래군은 ‘음지의 해결사’로 통했다. 삭여온 고통과 억울함이 임계점을 향해 치달을 때, 사람들은 실낱같은 희망의 끝자락을 붙들고 박래군을 찾았다. 양심수, 고문피해자, 의문사 유가족 같은 시국사건 관련자만이 아니었다. 형사사건으로 수감된 일반 재소자, 가족과 사회로부터 내쳐진 시설 수용자처럼 다양한 이유로 인간의 권리를 박탈(제약)당한 존재들이 그를 통해 신원을 이루고자 했다. 박래군은 그때마다 ‘몫이 없는 자들’의 아바타가 되어 입술이 부르트고 손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다. 그 와중에 전과를 11개나 달았다.

박래군은 최근 신상에 관한 질문을 받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민주당의 한 대선후보 캠프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어서다. 하지만 그 박래군은 이 박래군이 아니다. “1994년 구국전위 사건에 연루된 것도, 2003년 장관 보좌관을 한 것도 내가 아닌 다른 박래군이라니까.” 두 박래군은 흔치 않은 이름뿐 아니라 출생연도까지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르다. 그가 올래(來)에 임금군(君)자를 쓰는데, 이 박래군은 올래에 무리군(群)을 쓴다. 자신의 이름을 두고 ‘아버지가 데모꾼 되라며 지어준 이름’이라며 박래군은 웃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박래군은 최근 신상에 관한 질문을 받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민주당의 한 대선후보 캠프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어서다. 하지만 그 박래군은 이 박래군이 아니다. “1994년 구국전위 사건에 연루된 것도, 2003년 장관 보좌관을 한 것도 내가 아닌 다른 박래군이라니까.” 두 박래군은 흔치 않은 이름뿐 아니라 출생연도까지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르다. 그가 올래(來)에 임금군(君)자를 쓰는데, 이 박래군은 올래에 무리군(群)을 쓴다. 자신의 이름을 두고 ‘아버지가 데모꾼 되라며 지어준 이름’이라며 박래군은 웃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산문은 박래군, 시는 우상호’

2009년 용산 참사 범대위에서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일하다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 이런 해결사 노릇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오십 줄에 접어들며 부쩍 체감하게 된 육체적 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래군을 힘들게 한 건 인권운동의 목표와 방향에 대한 근원적 고민이었다. ‘인권피해 현장에 뛰어들어 피해자들 대신 싸워주는 것으로 활동가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대리전 방식이야말로 활동가들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인권 피해자들을 대상화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 못잖게, 피해자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안내하고 조언하는 역할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맷집과 파이팅 좋은 탁월한 싸움꾼이던 그가, 피 튀기는 전선의 후방으로 물러나 인권센터 건립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것도 이런 고민 때문이었다. 그가 꿈꾸는 인권센터는 시민과 활동가가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모색과 실천의 공간이다. 인권 관련 정보와 자료가 집적되고 공급되는 공간이자, 인권교육과 문화활동이 이뤄지는 교육과 문화의 공간이다. 10억원을 목표로 모금을 시작해 5억원이 조금 안 되는 기금을 모았다.

“아무래도 난 현장투쟁 체질인가봐. 종일 사무실에 앉아 전화 걸고, 회의하고, 원고 쓰려니 좀이 쑤셔 죽겠어.” 7월3일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그는 현재 ‘인권재단 사람’(02-363-5855)의 상임이사다)이 있는 서울 서대문 인근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박래군은 대뜸 ‘내근 활동가’가 겪는 어려움부터 호소했다. “남들 고충 해결하러만 다녔지, 아쉬운 소리 하고 돈 모으는 걸 해봤어야지. 나란 놈은 싸움판에 있어야 힘이 솟고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데 말이야.” 창졸간에 ‘추심업자’로 전락해버린 일급 해결사의 비애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날 때부터 ‘현장 체질’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박래군이 싸움꾼이 된 것도 ‘팔할’은 시대 탓이었다. 고향(경기도 화성)을 떠나 수원에서 자취하던 고등학생 시절 박래군의 꿈은 소설가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골에 살다 도회지로 나오니,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소설에 인생을 걸겠다고 결심하곤 부지런히 습작을 했다. “남의 삶 들여다보고, 이해한 만큼 구성해 보여주고, 그러면서 새로운 삶을 제시해주는 게 재밌었거든.”

재수 생활을 거쳐 1981년 연세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입학도 하기 전 문학회(연세문학회) 문을 두드렸다. 당시 문학회에는 기형도, 성석제, 원재길 등 쟁쟁한 학생 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곳에서 박래군은 우상호(국회의원), 공지영(소설가), 김응교(시인) 등과 함께 글을 썼다. 1학년 가을 교내 문화상 소설 부문(박영준문학상)에 당선됐다. 농촌의 절망적 현실을 농사꾼 부자(父子) 이야기로 풀어낸 ‘땅강아지’라는 단편이었다. “그해 시 부문에 당선된 우상호하고 둘이서, ‘산문은 박래군, 시는 우상호’ 하며 찧고 까불던 시절이었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해 11월 교내 시위에 휘말려 극렬 운동권이 됐다. “유망한 문청 하나가 운동권의 ‘마수’에 걸려 문학 인생을 종쳐버린 거지. 한국 문단의 불행이었어. 허허.”

» 1979년 박래전의 중학교 졸업식 직후 기념촬영을 한 박래군(왼쪽). 박래전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 1979년 박래전의 중학교 졸업식 직후 기념촬영을 한 박래군(왼쪽). 박래전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래군과 래전, “창자가 이어져 있다”

1983년 4월 과 학생회장으로 학내 시위를 주동하다 경찰에 붙잡혀 일주일 만에 강제징집을 당했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21사단에서 27개월간 철책 근무를 섰다. 북한의 대남방송 확성기를 통해 1984년 대우자동차 파업과 85년 구로동맹파업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쿵쾅쿵쾅했지. 그때는 학생운동 정리하면 당연히 공장으로 가는 거였으니까.”

1985년 여름 제대한 뒤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인천으로 갔다. 부평에서 동생 박래전과 함께 야학을 준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듬해 공사용 목장갑을 만드는 공장에 위장취업했다. “회사가 취업 심사를 하면서 용케도 학생 출신을 가려내더라고. 근데 난 용모가 준수해서 무사통과였지.” 공장일에 익숙해질 즈음 회사가 일거리가 없다며 공원들을 무더기 해고했다. 일일 파업을 주동해 원직 복직을 따냈다. 승리했다는 도취감도 잠시, 결국 2개월 만에 신분이 들통나 쫓겨났다.

그해 5월 노동자들도 ‘5월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조직의 지침이 내려왔다. 5월30일 한미은행 영등포지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다 구속됐다. 창틀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는 임무였는데, 공교롭게도 9시 뉴스 화면을 타는 바람에 시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동네 사람들이 어느 순간 발길을 싹 끊더래. 그러다 87년 7월에 가석방되니까 축하를 하고 난리가 아니었다더구만. 동네서 애국자 났다고.” 항소심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영등포교도소와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영등포교도소 시절은 그의 잠재된 ‘해결사’ 기질이 막 개화한 시기였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옥중 투쟁의 선두엔 항상 그가 있었다. 한번은 부식으로 나온 두붓국이 ‘개판’이었다. 식판을 던지고 문짝을 걷어차며 항의했다. 부식 문제로 열이 받아 있던 조폭 재소자들까지 동조해 교도소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다. 소장의 사과로 소동이 일단락된 뒤 그에겐 교도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합리한 일에 앞장서 항의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1987년 7월, 6월항쟁 덕분에 형기를 1년이나 남겨두고 가석방됐다. 대전교도소 시절 징벌방에서 허리를 다쳐 현장에 바로 복귀하는 것이 어려웠다. 울면서 호소하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복학원을 냈지만, 여전히 관심은 노동운동이었다. 그러다 몇 달 뒤 동생 래전의 죽음을 맞았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진상규명 작업이 한창이었어. 근데 노태우 정권이 굉장히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거야. 재야와 학생운동권에서 학살 원흉 처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는데, 그때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래전이가 학생회관에서 분신을 해버린 거지.”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동생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어릴 적 동네에서 “창자가 이어져 있다”는 말을 들을 만큼 우애가 깊던 형제였다. 한참을 방황하다 이소선 여사의 권유로 민주화실천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발을 들였다. 전국의 의문사 유가족(35가족)이 농성을 벌이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들렀다가, 어머니·아버지들과 정이 들어버린 게 컸다. “노인들이 추운 겨울에 아들 영정사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고 들어와서는 그대로 스티로폼 한 장 깔아놓은 바닥에 쓰러져 주무시는 거야. 꿈에서 아들을 봤는지 헛소리도 하고 그러면서. 짠해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더라고.”

» 1990년 2월 졸업식장에서 박래전의 영정을 앞세우고 침묵행진을 벌이는 숭실대 졸업생들. 한겨레 자료

» 1990년 2월 졸업식장에서 박래전의 영정을 앞세우고 침묵행진을 벌이는 숭실대 졸업생들. 한겨레 자료

그후로도 오랫동안, 용산 희생자

1993년까지 한 달 활동비 15만원을 받는 유가협 사무국장을 맡아 전국을 떠돌며 ‘장례사’ 역할을 했다. 그의 손으로 장례를 치른 ‘열사들’만 50명이 넘었다. 그러다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세계인권회의에 비정부기구(NGO)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게이·레즈비언들이 핑크색 리본을 나눠주며 엉덩이가 뚫린 바지를 입고 퍼포먼스를 하는데 야, 정말 충격이었지. 게다가 우린 의문사 실상을 알리러 갔는데, 남미에선 수년간 3만 명이 실종됐다고 하니 우린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고.”

빈의 경험은 인권운동을 양심수 석방 투쟁이나 고문 추방 캠페인, 의문사 진상 규명 활동 같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일부로 여겼던 박래군의 생각을 밑바닥부터 휘저어놓았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한국 인권활동가들이 세계 흐름을 접하고는 세게 한 방 먹은 거지. 내겐 인권운동을 ‘나의 운동’으로 가져가도 되겠다는 확신을 심어준 거고.”

귀국 뒤 유가협 활동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서준식이 만든 인권운동사랑방에 책상 하나를 얻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정신적 후유증을 겪는 고문피해자에 대해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빈에서 가져온 유럽 쪽 자료들이 큰 도움이 됐다. “고문(torture)·실종(missing)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 자료는 모조리 가져왔어. 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뒤 정신분열증을 앓는 선배가 한 분 계셨는데, 그때 가져온 덴마크 고문피해자 재활치료센터 자료를 한 의사가 보고 소견서를 써줬고, 그걸 법원에서 인정해준 거지.”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은 고문피해자 구제 활동을 넘어 교도소 재소자와 시설 수용자의 인권 개선, 나아가 주거권 확보와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문제 해결 같은 사회권 운동으로 확장됐다. 그에 맞춰 박래군의 ‘현장’도 경기도 평택의 청각장애학교 에바다, 충남 연기군에 있는 부랑아 수용시설 양지마을, 미군기지 이전으로 농민들이 내쫓긴 평택 대추리, 그리고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용산 참사 현장 등으로 숨가쁘게 이어졌다. 박래군에게 가장 무거운 부채의식을 안긴 곳은 용산이었다. 범대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10개월의 수배 생활과 4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미치겠더라고. 무고한 시민이 여섯이나 죽었는데도 항의는커녕 추모도 않는 거야.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에 구름같이 몰려들던 사람들이 왜 용산에는 오지 않을까. 내 결론은 이랬어. 용산은 우리 욕망이 잘못됐다는 거, 집 사고 부자 되기 위해 잔인한 폭력과 내쫓김을 묵인·방조·편승했던 우리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현장이라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외면한다는 거.” 이런 그이기에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영화 의 작은 흥행이 누구보다 반갑다. “기회야.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안 돼. 청산돼야 할 고통스런 역사를 후손에게 남겨두게 되는 거니까.”

» 1997년 2월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시절의 박래군과 서준식(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 1997년 2월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시절의 박래군과 서준식(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그 세상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7월 둘쨋주에는 ‘남산 인권·평화의 숲’ 조성을 위한 시민 청원서를 서울시에 제출할 계획이다. 시와도 순조롭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이 두 번째야. 2004년엔 안기부 터를 민주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이명박 시장이 거부했지. 박원순 시장은 달라. 잔인한 국가범죄가 벌어진 역사 현장을 눈앞에서 치워버릴 게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범죄가 벌어졌는지를 되새기고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데 우리와 암묵적 공감대가 만들어진 거지. 서울시 신청사가 완공되고, 남산 별관들이 이전하는 9월이 되면 뭔가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거야.”

30년 가까이 한눈팔지 않고 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박래군이 답했다. “동생과의 약속이야. 래전이가 유서에서 그랬어. ‘민중의 새 세상’을 위해 ‘이 땅의 작은 인간 박래전’이 목숨을 던진다고. 장례를 치르며 다짐했지. 네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네 몫까지 싸우겠다. 그 세상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후원계좌 : 신한 100-020-833848, 인권재단 사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