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사찰이 일상화된 사회

[노 땡큐!]
등록 2012-04-20 08:16 수정 2020-05-02 19:26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기숙사를 포함해 학교 건물에 이른바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감시카메라가 약 40개나 있었다. 지역 인권단체에서 인권침해로 지적을 할 정도였다. 도난 방지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감시카메라는 말 그대로 감시를 위해서도 쓰였다. 학생들이 복도에서 조금만 뛰어다닌다거나 하면 사감은 바로 방송으로 경고를 했다.
한번은 내가 기숙사 안에서 선후배 간 위계와 폭력, 그리고 폭력을 조장하는 사감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새벽에 몰래 배포한 적이 있다. 사감과 선배들은 감시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돌려본 뒤 내가 배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결국 나는 ‘교사 지시 불이행’이라는 이상한 명목으로 벌점까지 받았다. 그때 나는 학교로부터 권력기구가 안전을 명분으로 설치한 감시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배웠다.

자녀 수첩이나 일기 들춰보는 친권자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최초로 부각된 게 벌써 2년 전이다. 바로 몇 주 전에는 한국방송 새노조에서 민간인 사찰 관련 자료를 폭로했다.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정리돼가는 것을 보면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 건에 이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검찰에서는 법리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건 2건뿐이라고 밝혔지만, 국가의 권력 행사는 남용을 막고 엄격히 통제되어야 하므로, 법률을 직접 위반하는 경우뿐 아니라 적법한 공무원 감찰의 업무 내용과 절차를 벗어난 모든 사찰은 문제가 있다고 봐야 옳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상하게 조용하다. 국가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람들을 사찰하고 감시한다는 게 결코 사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삶과 무관한 ‘정치권’ 안의 이슈이기만 한 것도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국가에 무언가 ‘찍힐 만한’ 일을 하면 상황에 따라 언제든 사찰당하고 감시당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한국 사회가 프라이버시권 등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전반적으로 낮다는 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초등학생 일기 검사가 인권침해라는 당연한 결정을 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결정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학생들을 사찰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친권자들도 자녀의 수첩이나 일기를 들춰보곤 하고, 자녀의 휴대전화에 위치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달 때 비용을 걱정할지언정 사생활의 자유를 걱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청소년들 이야기만은 아니다. 일터에서도 노동자는 자기 근무 태도를 속속들이 감시당하는 것이 일상이다. 삼성은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를 사찰하고, 국가정보원은 ‘감청’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수많은 인터넷과 전화 내용을 엿본다. 어디 그뿐이랴. 인터넷에선 누리꾼들의 ‘신상 털기’가 당연한 것처럼 매일같이 벌어지는 판국에. 국가가, 권력기구가 시민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할 텐데, 오히려 국가가 시민들을 감시하고 시민들이 시민들을 감시하는 대한민국이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것쯤은 ‘할 수도 있는 일’ 정도로 느낀다.

감시와 사찰에 위축된 삶

고등학교 때 그렇게 벌점을 받은 뒤, 나는 학교에 비판적인 전단지를 배포할 때 감시카메라가 없는 구역만 다닌 것은 물론 혹시 지문이라도 감식할까봐 꼭 장갑을 낄 정도로 긴장해야 했다. 감시당하고 사찰당하지 않을 자유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꼭 필요한 권리다. 감시와 사찰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그런 감시와 사찰로 차 있는 우리 삶은, 어쩌면 늘 위축된 삶인 것은 아닐까?

공현 청소년인권운동가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