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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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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죄부를 준 특검이 삼성 집안싸움 원인”

김용철 변호사 ‘삼성 비자금’ 폭로 도운 김인국 신부 인터뷰
“재벌개혁은 정치권 아닌 삼성 권력 순치할 시민 손에 달려”
등록 2012-03-02 09:02 수정 2020-05-02 19:26

삼성그룹 기업구조조정본부(현 미래전략실)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비자금’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남 맹희씨가 동생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지난 2월12일 상속재산의 일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덕이다. 2월21일에는 삼성 직원이 CJ그룹 이재현 회장을 미행하다 들통 나기도 했다. 이재현 회장은 이맹희씨의 큰아들이자 삼성가의 장손이다. CJ 쪽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며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 고소했다. 이에 대해 삼성 쪽은 “호텔신라 인근 부지에 대한 사업성 검토를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재산 때문에 벌어진 집안싸움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툼의 기원은 짧게 잡아도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10월29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은 ‘삼성과 검찰은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라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삼성 특검을 불러왔다. 수사 결과가 나오자 삼성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차명재산은 ‘유익한 일’에 쓰겠다는 등의 약속을 했다. 5년이 흐른 지금 이건희 회장은 복귀했고 사면받았다. 반면 특검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차명재산을 유익한 일에 쓴다는 계획은 감감무소식이다. 그리고 2012년 2월, 특검 때 드러난 차명 (상속)재산은 삼성가 집안싸움의 화근이 되고 있다.
김인국 신부(청주교구 옥천성당·사제단 총무)는 5년 전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의 경제 민주주의가 진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경제민주화에 진전이 있었을까? 삼성가의 재산 다툼이 진행되는 와중에, 김 신부를 2월22일 충북 옥천성당에서 만났다.

» 한겨레21 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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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삼성한테 행복한 세월”

최근 이맹희씨가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도둑들이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금고를 턴 뒤 훔친 장물을 서로 독차지하려고 서로 배신하며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을 보는 느낌이다. 영화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이번 소송은 우스웠다. 2008년 4월 삼성 특검의 수사 결과를 보며 우리는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사기는 사기를 낳는 법인데 저렇게 처리해서 어쩌려고 하는지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문제제기 당시부터 ‘홀가분하게 다 털고 가자. 그러면 시민들이 지나간 관행으로 보고 인정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대로 고백했다면 아마 대한민국 사회가 너그럽게 용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버렸다. 본인들이 알아서 머리를 깎지 않으려고 극구 버틸 때, 특검에서라도 그 일을 해줘야 했다.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삼성 특검의 역사적 책무였다. 그런데 특검이 비자금의 실체를 감추고 유산이라며 돌려주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뒤 5년이 흘렀다. 삼성은 변했나.
삼성한테는 무척 행복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원하는 것 이상으로 얻었으니까. 숙원이던 경영권 승계도 깔끔하게 완료했고, 아들딸의 지분도 확대됐다. 무엇보다 삼성의 사회 장악력이 견고하고 영속적이라는 점이 입증됐다. 이건희씨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했지만 그 자체가 쇼였다. 회장이란 자리부터 법률상 아무런 지위도 권한도 인정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자리다. 말은 물러난다고 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한순간도 변함없었다. 앞으로도 여러 면에서 거침없는 행보를 보일 것이다.

삼성이 세졌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가.
특검까지 갔고 이건희씨가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뿐이다. 우리 사회는 이건희씨가 범죄자라는 인식이 약하다. 오히려 공익제보자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만 깊어지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있다. 검찰, 사법부,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도 사회 감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결국 해결은 시민들에게 달려 있다는 교훈을 일깨워줬다.

시민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민주화의 열쇠는 시민들이 쥐고 있다. 재벌들이 자발적으로 개선할 리는 만무하다. 시민들은 선택적 소비, 즉 불매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투표라는 선택적 구매 행위로 정치민주화를 이뤄낸 것처럼, 경제민주화는 불량식품을 도태시키는 불매운동으로 이룰 수 있다.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분노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부패의 핵심인 재벌 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국 자본주의는 괴물이 될 것이다. 봐라. 재벌은 노동자의 뼈를 깎아서 배 터지게 먹고, 엄청난 돈을 들여 살을 뺀다. 도대체 이게 뭔가. 서로 나눠서 알맞게 먹으면 그럴 일도 없잖은가.

“재벌개혁? 누가 한-미 FTA 했나?”

2007년 당시에도 “경제민주화의 진전을 바란다”고 했는데.
경제와 민주라는 개념 자체가 상극이다. 경제는 돈, 민주는 가치의 문제다. 형용모순처럼 들리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 재물이라는 육신에 민주라는 영혼을 심어두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괴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절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고뇌하고 싸웠다. 그러나 경제독재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욕망이 생각을 마비시키고 자발적인 복종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예전 우리 부모 세대는 삼성 창업자의 불의한 축재를 보고 ‘돈병철’이라고 불렀다. 돈이 많다고 존경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겠다는 빈자들의 자존감이 꼿꼿했다. 그런데 아버지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은 그 아들을 우리는 꼬박꼬박 ‘회장님’이라고 부른다. 그 정도로 우리 정신이 박약해진 것이다. 게다가 대기업의 횡포를 뻔히 보면서도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믿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최근 재벌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양극화가 심각해지니까 그렇다. 무슨 문제든 모순이 극대화되면 반동이 생기는 법이다. 올 총선과 대선은 그런 점에서 기대된다. 이름 하나 바꿨다고 4월 총선에서 옛 한나라당 세력에 국회의 주도권을 쥐어주고 12월 대선에서 독재자의 딸에게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양극화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경제독재와 부패구조를 자발적으로 승인한 것밖에 더 되겠는가.

그럼 민주통합당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최근 “친노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누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설계하고 추진했는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새누리당은 말할 것도 없고 재벌 개혁 운운하는 그들도 친재벌이다. 지난해 11월 한-미 FTA 날치기 비준을 앞두고 사제단이 국회 앞에서 천막단식기도회를 열었다. 그때 여야 창구역을 맡던 한 민주당 의원이 와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걸 듣고는 새삼 깨달았다. 바로 한-미 FTA를 꾸민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그런 사람들이 공천심사위에 포진해 있으니 걱정이다. 민주당이 얼마나 통합진보당에 양보하는가에 따라 그 진정성이 판가름 난다고 본다.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거나 집권하면 삼성 등 재벌 개혁이 가능할까.
누가 이기든 삼성은 고질적인 경영 행태를 유지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물론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크게 승리해 약진하고 새누리당이 대거 몰락할 경우 눈치를 보긴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안에 삼성의 포도주를 안 마셔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유혹에 약한 국회의원을 노리는 세력들의 고도의 공세를 고려하면 개혁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시민, 자신의 권력 과소평가 말아야”

너무 비관적인 전망인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불매운동이 있다. 상대는 골리앗인데 우리에겐 겨우 ‘불매운동’이라는 다윗의 조약돌뿐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삼성이라는 고집스런 자본권력을 순치시키는 실질적인 힘은 불매운동이다. 선택적 구매와 의식적 불매 행위를 반복하며 시민들은 ‘예’ 할 것과 ‘아니요’ 할 것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면서 소비자는 자기 양심과 영혼을 지킬 수 있고, 동시에 늘 실적과 이윤을 보고 움직이는 기업을 바꿔나갈 수 있다. 시민은 자신의 권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2008년 촛불시위, 2009년 용산 참사 때 등 지속적으로 사회적 발언을 했다.
촛불시위 당시 시민 99%가 응집했을 때 갖는 폭발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용산 사태를 경험하면서 신기루였나라는 생각도 했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오염된 고기가 그렇게 문제라면서, 자기 곁에 있는 이웃의 불행에 차갑다면 촛불의 마음은 무엇일까라는 회의도 했다. 그것도 지나고 보니 정리가 되더라. 촛불을 너무 신성시할 필요도 없지만 과소평가할 일도 아니다. 대중의 힘이 모일 만한 발화 요인이 생기면 터진다. 다만 그것에 너무 기댈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 이명박 정부 임기 중에 벌어진 일들이다.
현 정부가 참 불의한 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 천주교의 변화다. 한국 천주교의 주교회의는 사회적 발언을 금기시하고, 세상과 철저히 거리를 두는 보수적 집단이다. 일제 때도 말하지 않았고, 박정희 독재 때도 김수환 추기경이 상징적으로 입을 뗐을 뿐 국가 사업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4대강 사업을 비롯해 한-미 FTA,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등에 대해 반대 발언이 나오고 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니까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정부도 이토록 한국 천주교회를 상심케 한 적은 없었다.

끝으로 할 말이 있다면.
뱀이 시키는 대로 놔두면 안 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원죄 이야기다.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따먹은 것보다 더 무거운 죄는 지각능력과 판단능력을 버리고 뱀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 것이다. 운명의 결정권을 뱀에게 넘긴 것이 죄와 불행의 시작이었다. 세상의 불법과 폭력에 우리가 공범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악에 우리도 어떤 모양으로든 일조하거나 간접으로 승인하거나 결과적으로 방조 또는 묵인한 측면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이 이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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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강해질수록 새 희망도 떠올라

김 신부는 박노해 시인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갈수록 악의 신비를 강하게 느낍니다. 악은 더욱 새로워지고 다양해지고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선이 출현할 때마다 악은 더욱 집요해지고, 새로운 희망이 떠오를 때마다 악은 더 광범하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악의 강력한 힘을 생각해서 더욱 분투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그만큼 새 희망이 떠오르고 있다는 격려가 담겨 있는 듯했다.

옥천=글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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