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이주의’ 사회

등록 2012-02-17 07:06 수정 2020-05-02 19:26
일러스트 김대중

일러스트 김대중

사람들이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운동단체에 처음 와보고 가장 신선하게 느끼는 것이 ‘높임법’이다. 분명히 20대인 회원인데도 초등학생 회원과 서로 반말을 하고 ‘언니’나 ‘형’ 같은 호칭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나이 차이가 몇 살이 나든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존댓말과 반말이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를 반영하지 않고, 친소(親疎)에 따라서만 사용되는 것이다. ‘형, 누나, 언니, 오빠’ 같은 호칭도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 학교에서나 직장 등에서 학년 하나, 나이 한 살 차이로 선후배와 위아래를 확실하게 구별하는 문화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이런 문화를 낯설어하고 때론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나이 따지기가 일반적인 사회

한국 사회는 나이를 중요하게 여긴다. 몇 년생이냐고 묻든 몇 살이냐고 묻든 띠를 묻든,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이나 높임법을 어떻게 할지 정리하는 것은 관계맺기의 기본 단계다. 더 나아가서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들 사이에 위아래가 생기고, 각기 다른 역할을 요구받으며, 차별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사회적 현상, 그리고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나이주의’라고 부른다. ‘인종주의’나 ‘학벌주의’ 같은 모양새의 조어인 셈이다.

나이주의라는 틀로 이야기를 한창 만들어가던 초창기에, 어떤 분이 “나이주의라는 게 있기는 한 개념이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실제로 ‘ageism’이라는 게 영어사전에 등재돼 있고 학계에서도 쓰이는 개념이다. 미국 등지에서 운동이 일어났던 적도 있는데, 이때 외국에서는 주로 ‘고령자·노인 차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한국에도 연령차별금지법이 2009년 제정돼 시행되고 있는데, 정식 명칭은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로 이 역시 주로 고령자·노인에 대한 차별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청소년운동에서는 이 개념을 더욱 넓혀서 쓴다. 고연령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저연령·아동·청소년에 대한 차별, 나아가서 연령대에 따른 이미지 등까지 나이주의 개념으로 묶어서 들여다본다. 이런 문제의식이 유효하다는 것은 어쩌면 한국 사회가 나이가 적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서구 사회에 비해 더 심함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여성운동에서도 정해진 생애주기를 강요하고 여성을 나이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나이주의의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이런 식으로 넓혀가면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나이주의 문제를 겪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청소년운동의 주된 활동이 나이주의를 비판하고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것이긴 하지만, 나이주의는 청소년뿐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나이를 이유로 일할 때 더 안 좋은 대우를 받는 것, 10대들이 집회에 참가하면 “애들은 공부나 해라” 하거나 노인들에게 “손주들이나 보지 용돈 받고 조종당해서 나왔느냐”라고 하는 것, 35살 미만 가구는 전세대출 지원에서 차별받는 것, 40대인데 미혼·비혼인 사람을 뭔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것 등 나이주의의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만들어갈 권리가 있다. 나이는 하나의 참고 사항이거나 살아온 시간을 반영하는 것일 뿐, 그 자체로 우열의 이유는 될 수 없다. 바로 지난해 12월에도 인권교육을 가기로 한 학교에서, 이력서를 보니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되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20대의 ‘새파랗게 젊은’ 강사가 아무래도 못 미더웠나 보다. 교원연수에서 교사들이 나이가 적다고 해서 청소년활동가와 인권활동가를 깔보고 막 대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몇 번을 당해도 불쾌하지만, 그럴 때면 역시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며 나이주의의 논리가 얼마나 부당한지 느낀다. 미성숙한 어른들에게 화를 내서 뭐하겠는가? 내가 참고,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수밖에.

공현 청소년인권운동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