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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시장, 토건시장이 되려는가

후폭풍 가늠 못하고 가락시영아파트 초고층 재건축 승인한 서울시… 무분별한 뉴타운·재건축 사업의 고삐를 풀어준 셈
등록 2011-12-21 06:15 수정 2020-05-02 19:26
»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1월15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학술행사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1월15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학술행사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박원순표 서울시정이 초반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전임 시장 시절부터 추진된 각 지역의 뉴타운·재건축 사업을 둘러싼 잡음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이하 도계위)는 송파구 가락시영아파트를 기존 2종에서 3종으로 상향하는 것을 골자로 한 주택 재건축 정비구역 지정안을 12월7일 통과시켰다. 이명박·오세훈 전 시장마저 투기 과열을 우려해 보류했던 사업이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이에 따라 용적률은 285%까지 상승했고, 이 구역에는 평균 28층, 최고 35층 규모의 공동주택 8903가구가 신축된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정부는 △강남 투기과열지구 해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제 폐지 △분양가상한제 완화 및 폐지 추진 등의 내용을 담은 ‘12·7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와 서울시가 동시에 건설자본과 부자들만을 위한 핵폭탄급 선물을 내놨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서울시의 이번 발표를 두고 “시점도, 내용도 최악”이라고 혹평했다.

“부동산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 줄 것”

서울시는 이번 결정으로 1179가구의 장기전세주택(시프트)이 들어서게 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기존 계획에서 장기전세주택은 200여 가구였다. 도계위 당연직 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울시 문승국 행정2부시장은 “‘종 상향’ 문제만 너무 부각됐는데, 이번 사업으로 1천 가구 넘는 장기전세주택을 확보했다는 공공성 측면을 헤아려달라”고 했다. “임대주택 8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는 박원순 시장 공약의 연장선이라는 주장이다. 문제는 종 상향 결정에 따른 각종 부작용이 고려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박 시장의 서울시정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이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온 시민사회와 학계를 중심으로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선대인경제전략연구소의 선대인 소장은 “잘못된 결정”이라며 “대외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게 됐다”고 지적했다. 홍성태 상지대(문화콘텐츠학) 교수는 “당장 4천여 세입자 가구가 쫓겨나게 생겼는데, 장기전세 물량 몇 건을 더 만들었다고 끝날 사안이 아니다”라며 “가락시영아파트의 초고층화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망국적인 서울 고층화와 집중화의 완성”이라고 맹비난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도 성명을 통해 “토건시정 종식을 선언한 박원순 시장이 토건시장이 되려고 하는가”라고 비판했다.

서울시 도계위의 이번 결정은 박원순 시장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일까. 서울시의 공식 태도는 “도계위는 전문가들이 중심이 된 독립기구로, 사안에 대한 결론이 나면 서울시는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민간 위원들의 임기는 2년이다. 모두 오세훈 전 시장 시절에 참여한 인사들이다. 하지만 이번 결정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도계위에는 위원장인 행정2부시장 외에도 서울시 주택국장, 도시계획국장, 뉴타운사업본부장 등이 참여한다. 서울시가 개입할 수 있는 통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박원순 시장의 측근 인사들과 서울시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 시장도 이번 사안을 미리 보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 시장 본인은 물론 시정 전반을 보좌해야 할 정무라인과 자문위원단은 사안의 중요성과 종 상향 결정이 몰고 올 후폭풍에 대해선 폭넓게 검토하지 못했다. 이번 결정으로 확보될 시프트 물량만을 산술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한 서울시 관계자는 “‘박원순 시장 때문에 부동산 시장이 침체됐다’는 보수언론의 프레임과, 정작 부동산 정책을 책임져야 할 중앙정부가 이런 분위기를 내심 즐기고 있다는 외부적 상황도 이번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오세훈표 도시계획위원회’의 도발?

서울시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박 시장은 종 상향 발표가 이뤄진 직후 “대형 필지의 종 상향이나 대규모 개발 행위에 대해선 신중하게 판단하고, 내·외부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뒤집어보면, 이번 도계위 결정 과정에서 사전에 면밀한 검토가 없었다는 점을 자인한 셈이다. 김형주 정무부시장은 “지금은 일종의 과도기인 만큼 하나의 사업이 전체적 정책 기조와 맞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을 보좌하는 ‘희망서울 정책자문위원회’(위원장 김수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한 자문위원은 “개인적으로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자문위 내부에서도 우려하는 기류가 많이 보인다”며 “사안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상적 프로세스로 처리돼버린 듯하다”고 했다. 이 자문위원은 “용적률 285%인 지역에 가보면 그야말로 고층 아파트로 이뤄진 성(城)”이라며 “도계위가 종 상향을 발표하는 시점까지 관련 내용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수현 자문위원장은 “자문위는 구체적인 현안 하나하나에 개입하는 조직이 아니라 큰 틀에서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곳”이라며, 이번 종 상향 결정의 배경과 관련된 질문에는 “모르겠다” “잘 알지 못한다”는 답변만을 내놓았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이번 종 상향 결정으로 각종 개발사업을 둘러싼 논란을 돌파해야 할 서울시의 발걸음이 꼬였다는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가락시영은 대로변에 위치해 있고 지하철역도 바로 옆에 있어 종 상향이 가능한 것으로 (도계위에서) 결정한 것 같다”며 “지역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지, 다른 모든 지역에도 해당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홍성태 교수는 “대로변 운운하는 해명은 초등학생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라며 “이런 행태가 반복된다면 박원순 시정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문제의 근원은 도계위의 비밀주의”라며 “당장 회의록을 공개하고 서울시가 도계위에 재심을 요구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시 쪽은 “이미 소위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서울시가 도계위의 결론을 뒤집을 근거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논란은 다른 지역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경실련은 “이번 결정으로 여타 재건축·뉴타운 사업도 형평성을 제기하며 종 상향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개포지구·둔촌주공·고덕지구 등은 가락시영의 사례를 들어 종 상향 요구를 관철하려 한다. 논란이 거세지자 도계위는 지난 12월16일 서초구 방배동 경남아파트의 종 상향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보류했다.

“나는 팔자 사나운 서울시장”

박 시장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 12월14일 서울시청에서 개최한 정책토론회에는 각 뉴타운과 재건축 지역에서 몰려든 원주민들로 파행을 겪었다. 각종 개발사업으로 살 곳을 잃게 된 원주민들은 “무분별한 뉴타운·재건축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가락시영아파트 종 상향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 박 시장은 “어떤 분이 저보고 ‘팔자 사나운 시장’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맞다”고 토로했다. 정책적 차원에선 ‘오세훈 지우기’와 ‘시정의 연속성’, 구체적 사업에선 복잡하게 얽힌 이해 당사자들의 갈등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하지만 하소연으로 행정 책임을 피하기엔, 서울시장은 너무도 무거운 자리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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