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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을 감으며 처음처럼

공병호의 수동 손목시계
등록 2011-12-16 01:50 수정 2020-05-02 19:26

물건이 흔한 시대라서 갖고 있는 것들 중에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굳이 애장품을 한 가지만 들라면, 태엽을 감는 은색 손목시계를 꼽고 싶다. 지금부터 25년여 전 결혼식을 올릴 즈음의 이야기다.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듯 나나 아내나 모두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우리 부부는 집안끼리 주고받는 것을 대폭 줄이고 그 비용을 모아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형편도 형편이었지만 나는 당시에도 주관이 뚜렷한 편이었다.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며 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관례로 하는 혼수 구입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기준으로 보면 우리의 결혼은 물질적 측면에서 초간편 결혼식이었다.

나보다 오래 직장생활을 해온 아내는 결혼이 임박하기 전 잠시 유럽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업무 때문에 방문한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계 가계가 즐비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쇼윈도에 놓인 다양한 시계를 보며 남편 될 사람에게 시계를 하나 준비하고 싶었단다. 막상 거리에 선 아내의 고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격이 너무 비싼 시계들이라는 사실, 다른 하나는 내 손목이 평균적인 한국 남자보다 다소 가늘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를 두고 고민하다 앞의 문제는 같은 브랜드 가운데서도 저렴한 시계를 구하고, 뒤의 문제는 가장 작은 시계를 구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구입한 것이 롤렉스의 은제 태엽 손목시계다. 이 시계는 이틀마다 한 번씩 태엽을 감아줘야 한다. 그래서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시계가 잠을 자는 기간이 많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틀에 한 번 단 몇 분이긴 하지만 태엽을 감는 일도 부담이 되기 때문에 자주 이 시계를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따금 신발끈을 다시 매고 심기일전하고 싶을 때면 꼭 태엽을 감아서 차고 다닌다.

롤렉스의 금빛 시계를 구입해서 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이 작은 은색 시계의 태엽을 감을 때마다 ‘처음처럼’이란 한 단어를 머리에 떠올린다.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건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면 큰 실수도 없을 것이고 긴 인생살이에서 나름의 목표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혼 전의 아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엽을 감는 시계를 사서 선물한 데는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싶다.

태엽 손목시계는 전자시계와 달리 몇 년 쓰고 나면 부속품을 갈아야 한다. 그렇게 비용이 드는 일은 아니지만 요즘에도 몇 년마다 부속을 갈아가며 태엽 감는 시계를 사용하는 사람이 흔치는 않을 것이다. 태엽을 감을 때마다 나는 신혼 시절의 출발점을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이미 내가 가진 것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은 태엽 손목시계는 내가 놓인 상황에 따라 다양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애장품이다.

공병호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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