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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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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사회의 내부 망명객들

대학입시 거부한 ‘투명가방끈들’의 집담회… 졸업장만 인정하는 학력만능 사회 고발하며 ‘참배움’을 갈망하는 그들
등록 2011-11-16 06:04 수정 2020-05-02 19:26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공직(후보)자들의 투명한 학력 공개를 요구하거나 대학 신입생 선발의 공정성을 촉구하는 모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들이 대학입시 거부를 선언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대학 졸업장 없인 사람 구실 하기조차 힘들다는 험한 시절에 남들 다 거치는 사회적 인정의 통과의례마저 거부하겠다는 이 무모한 무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쩔 수 없는 속물적 궁금증을 안고 행사가 예정된 서울 청계광장으로 갔다. 또래들이 한참 대입수능시험을 치르고 있을 11월10일 오전 11시30분, 솜털 뽀송한 10명 안팎의 10대들이 모여 ‘입시 거부 선언문’을 읽고 있었다.

한소영(18·경기 부천·탈학교 청소년 활동가)

한소영(18·경기 부천·탈학교 청소년 활동가)

“수능시험, 양심이 허락지 않아”

“이 경쟁에 미친 입시 위주 교육과 불안정한 모두의 삶을 무시한 채 폭주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단단한 제도에 시비를 건다. 경쟁에 뛰어들어 남을 짓밟고 뜀박질하는 대신, 사회가 붙여준 ‘루저’라는 딱지를 버리고 스스로 거부자의 길을 택한다.” 회견이 끝난 뒤 조용히 물었다. 왜 투명가방끈인가. 답변은 명료했다. “졸업장이 없으면 배움의 이력(가방끈)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현실을 꼬집고 싶었다.” 실제 이들은 누구보다 배움을 욕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욕망의 크기만큼 배움의 공간이 대학이어야 한다는 그릇된 통념과 싸우려는 열망 또한 강렬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잉여’와 ‘투명인간’이 되기를 자처한, 학력만능 사회의 내부 망명객이었다. 이들을 만나 속내와 고민을 들어봤다.

-수능 거부 선언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김재홍(이하 재홍) 모두가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지금의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교육 문제를 연구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런데 고민이 생기더라. 지금의 교육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내가, 그 시스템의 핵심인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가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대학에 가고, 그릇된 교육제도의 단물을 빨고 나서 그 제도를 비판하는 것은 사다리 타고 올라간 뒤 그 사다리를 걷어차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수능을 치르는 것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해솔(18·서울·탈학교 청소년 활동가)

김해솔(18·서울·탈학교 청소년 활동가)

김해솔(이하 해솔) 무작정 잡아놓고 오로지 대학 얘기만 하는 학교 분위기가 싫어 2년 전 학교를 자퇴했다. 굳이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배움의 길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학을 갈지 말지에 대해선 결심을 미뤄왔다. 하지만 나와 같은 1993년생들이 수능을 볼 시기가 되니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한소영(이하 소영) 일제고사, 수능에 대한 문제의식은 예전부터 있었다. 고1 때 학교를 자퇴하면서부터 대학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입시 거부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문동혁(이하 동혁) 얼마 전 경남의 한 지역신문에 대학입시를 거부하겠다는 글을 썼다. 이것을 본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입시 거부를 고민한 지는 1년이 넘는다.

-집이나 주변에서 걱정하지 않았나.

재홍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은 나를 내버려두시는 편이다. 아무리 설득해도 내 고집을 꺾기 쉽지 않다는 걸 아니까. 부모님께는 올해 초 말씀드렸다. 선생님한테도 얘기했지만, 별 말씀 없었다. 학생회장을 하며 학생인권 문제로 학교 쪽과 여러 번 부딪쳤으니, 선생님들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저러겠지’ 하셨던 것 같다.

동혁 난 좀 부끄럽다. 전문계고를 다니면서도 대학에 진학해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최근까지 버리지 않았다. 물론 청소년 인권단체 활동을 하고 희망버스에 참가하며 생각이 흔들리긴 했다. 그러다 지난 10월 말 서울의 한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입학시험을 치렀다. 실기고사인데, 준비를 안 했으니 당연히 떨어졌다. 결과가 나온 뒤 어머니에게 수능시험을 안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수능 거부 선언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대학이 변하면 모를까, 현실은 시궁창

김재홍(18·충남 천안·고3)

김재홍(18·충남 천안·고3)

소영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걸 집에는 숨겨왔다. 가족은 지금도 내가 이런 활동을 하는지 모른다. 사실 중학생 시절까지도 대학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비도 내가 마련할 작정이었다.

해솔 자퇴할 때 부모님이 내건 조건이 ‘대학은 어떻게든 간다’는 것이었다. 친척 중엔 외국어고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에 간 오빠도 있다. 가족은 나도 그 길을 걷겠거니 했을 거다. 나 역시 대학을 가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대입검정고시를 치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해 말 대학에 안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부모님은 반대였다. 계속 다투다 휴전하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별 신경 안 쓰신다.

-대학 진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소영 세상이 변하면 갈 수도 있다. 무상교육이 되고, 줄 세우기 시험을 통하지 않고 누구라도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굳이 진학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멀어 보인다. 내가 죽을 때쯤 되면 실현될 수 있으려나? 솔직히 지금의 선택을 30∼40대가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다.

문동혁(18·경남 창원·고3)

문동혁(18·경남 창원·고3)

동혁 고등학교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며, 대학에서 말 그대로 학생자치를 실현하고 싶은 꿈도 있었다. 대학이 우리가 꿈꾸는 곳처럼 된다면 가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소영 계속 공부를 하고 싶지만, 대학이라는 곳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다. 공부를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학비를 감당할 만큼 사정이 넉넉지도 않다.

-수능 거부를 선언하며 단서를 달지 그랬나. 우리가 원하는 교육개혁이 이뤄진다면….

재홍 그러면 임팩트가 약해지잖나. (웃음) 잘못 알아듣거나 곡해하는 사람도 생길 테고.

해솔 인터넷 공간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데 굳이 자기 신원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얼굴을 드러내려면 상당한 두려움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이렇게라도 잘못된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은 투명인간 같은 존재다. 있어도 없는 이 취급당하고, 복지나 공공정책의 고려 대상도 되지 못한다.

“조용히 안 보면 되지 왜 선동하냐”

-주위의 편견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울 텐데.

소영 인터넷 댓글 가운데 이런 게 있더라. ‘공부 못해서 대학 못 가는 거면서 왜 포장하냐.’ ‘너희가 그런다고 사회가 바뀔 거 같으냐.’ 선생님이나 오지랖 넓은 어른들은 그런다. ‘지금 그러지 말고 대학 나와 사회의 주류가 된 뒤 세상을 바꿔라.’ 사실 이런 얘기를 일제고사 문제로 선생님들과 마찰을 빚을 때부터 들었다. 그분들 말씀대로라면 세상은 이미 살기 좋게 변해 있어야 한다.

해솔 난 이런 댓글이 가장 가슴 아프더라. ‘그래, 너네 열심히 해서 수능 안 보는 사람 더 늘어나게 해라. 덕분에 우린 좀 편하게 대학 가보자.’ 가장 흔한 건 ‘시험 치르기 싫으면 조용히 안 보면 되지 왜 선량한 다른 아이들을 선동하려 드냐’는 거다.

재홍 난 수능을 앞두고 주변에서 이런저런 문자를 많이 받았다. 찹쌀떡도 받고. 그런데 내가 수능을 안 본다고 답글을 보내니까, 아예 반응이 없다. 왜 안 보느냐고 물어봐주면 좋은데, 침묵이 더 아프다. 그들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동혁 나한테는 친구들이 ‘10년 뒤에 널 꼭 다시 보고 싶다’고 하더라. 물론 좋은 뜻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너 지금 잘난 척하는데, 그때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보자’는 소리다.

-외로운 소수자의 길을 걷는 게 두렵지는 않나.

소영 부담이 되는 건 우리에게 ‘입시 거부자’라는 꼬리표가 계속 따라붙는 거다. 무시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앞서 거부 선언을 했던 선배들을 보면 그렇지가 않더라. 고민도 있다. 우리가 대학 진학을 거부한다는 게 배움을 그만두겠다는 뜻은 아니다. 고교를 자퇴하며 가졌던 생각, 미술 공부를 하고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은 한결같다. 문제는 대학을 가지 않으면 배움과 학습의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미술 관련서나 논문을 보려면 미대가 있는 대학 도서관을 가야 하는데, 학교에 적을 두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다. 대학의 지식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대학을 대체할 시민아카데미 같은 공간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재홍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어쨌든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사이버대나 방송대 같은 원격 대학을 다니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대학원도 가고 싶다. 당장은 군 문제가 고민이다. 군대를 다녀오면, 고민과 모색의 흐름이 끊기지 않을까 걱정된다.

대입수학능력시험인 한창인 11월10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 모인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소속 청소년들이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입시거부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대입수학능력시험인 한창인 11월10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 모인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소속 청소년들이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입시거부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현실과 타협하게 될까봐 두려워”

해솔 너무 이른 시기에 사회에 나와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다. 주변에선 계속 묻는다. 무슨 일을 할래? 그 일을 하려고 지금 어떤 준비를 하는데? 우리에게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이 넉넉했다면 모를까, 그렇게 묻는 건 좀 부당하다.

소영 1%에 속하는 친구들은 다르겠지. 그런데 대부분은 ‘어떻게 살래?’ 물어보면 막막하다. 이건 대학을 가더라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서울’이든 ‘지잡대’든. 무엇을 공부하고, 학자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일 거다. 기자들도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같은 일만 할 건 아니잖은가.

동혁 인권운동을 하고 싶은데, 지금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 나도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유혹과 난관에 맞닥뜨릴 테니까. 솔직히 현실과 타협하게 될까봐 두렵다. 학생회 활동을 하며 만난 선생님이 그랬다. 전교조에 소속돼 있고, 수업 시간엔 우리 앞에서 이상적인 얘기를 늘어놓다가도, 수업이 끝나면 학생부에서 아이들 잡으러 다닌다. 그분은 자기 직책과 타협한 거다.

해솔 대학생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고민스럽다. 우리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어쨌든 타협을 한 거다. 지금 대학을 가겠다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릴 보며 불편한 감정을 갖는 게 당연하다. ‘너희가 그러면 내 삶은 뭐냐? 나는 잘못 살아가는 거냐?’ 말은 안 해도 이런 생각을 할 거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보다 아주 조금은 잘 살게 되겠지. 아, 생각할수록 복잡하다.

재홍 모두가 피해자다. 나는 그다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데,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나한테 이질감을 갖는 것 같다. 실제 학교에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화제란 게 대부분 대학 얘기, 수능 얘기다. 나는 낄 자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점점 대화도 안 하게 된다.

-수능 거부의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받지 않나.

해솔 어젯밤에도 우리끼리 모여 많은 얘기를 나눴다. 뜻이 맞는 어른들과 함께 대안대학을 만들자, 누구나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운동이 필요하다, 대학을 가지 않는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자, 국가와 사회를 상대로 정책 제안을 해보자 등 다양한 논의가 나왔다. 더 많은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교육 바뀌려면 사회가 바뀌어야”

재홍 우리 선언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대학입시를 거부한다고 외쳤으니 이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잘 안 된다. 무조건 반대하고 거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고민하고 연구하며 담론을 만들어가야 한다. 정부가 뭘 하겠다면 우리가 반대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내놓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사회적 의제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솔 난 생각이 조금 다르다. 지금은 설득이 아니라 분노가 필요한 때다. 지금의 제도와 정책에 대해 당당히 화내고, 나에겐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내가 행복하게 살 기회를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소영 교육이 바뀌려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운동이 함께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우리에게 노동문제는 인권문제와도 연결된다. 똑같이 노동하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의견도 내지 못하고, 임금도 차별받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

동혁 나도 사회적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하는 분들과 힘을 모으는 게 필요하다. 일단 우리가 지속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 요구를 당당히 말하고, 외부와 함께할 부분을 찾아보자.

사회·정리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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